[뉴스투데이=김민구 기자] 역대 정권이 출범하면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정치적 화두가 있다.
이른바 ‘국가 허브(Hub)화 전략’이다. 허브 국가는 특정 분야에서 세계 중심이 되는 나라를 뜻한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얘기다. 외국기업이나 외국인 투자자들이 돈을 들고 한국으로 앞다퉈 달려 오는 ‘투자의 요람’이 눈 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려한 정치적 어구는 휘발성이 강하다. 정치 지도자가 한마디 던진 후 이를 뒷받침할 구체적인 액션플랜이 없으면 야심찬 계획은 언제 그랬냐는 듯 슬그머니 사라지기 때문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는 경구(警句)도 무시할 수 없다.
명실상부한 허브 국가로 자리매김하려면 경쟁국에 비해 월등하게 나은 조건을 두루 지녀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또한 화려한 미사여구에 그치지 않고 외국 기업과 투자자들을 매료시킬 킬러 콘텐츠를 내놔야 한다.
그동안 허브 국가로 등장한 나라를 살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영어가 공용어로 사용된다. 1990년대 말 영어를 공용어로 정하자는 움직임에, 최근 부산을 영어 상용도시로 만들어 ‘글로벌 허브 도시’로 발전시키려는 청사진에 반발이 들불처럼 번지는 우리나라는 허브 국가 자격 미달이다.
두 번째, 허브 국가는 모든 이들이 고객를 끄덕이며 받아들이는 보편타당한 기업 정책과 규제가 있기 마련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황당한 ‘갈라파고스 규제’로 어깃장을 놓는다면 어림도 없다.
세 번째, 외국인이 호감을 보이는 사회적자본(Social capital)이 차고 넘쳐야 한다.
사회적 자본은 신뢰, 규범, 호혜(互惠) 등 협력하고 갈등을 해소하는 가치관이다. 외국 기업이나 투자자는 정부의 일관성 있는 기업 정책과 예측 가능성 등을 사회적 자본의 척도로 여긴다.
쉽게 설명하면 외국 투자자들은 한국에 투자하는 데 따른 경제적 이득과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돼야 돈 보따리를 푼다는 얘기다.
그러나 한국의 기업 정책은 막스 베버의 ‘합리성의 강철 새장(Iron cage of rationality)’처럼 합리성을 좁은 새장에 가뒀다. 합리성이 운신의 폭을 넓히지 못하면 그 사회와 경제는 퇴화한다.
우리 ‘자화상’을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보면 멀쩡한 대기업 앞에서 24시간 장송곡을 틀며 저주의 굿판을 벌이는 게 현주소다.
건설 현장 노동자와 관리 감독관의 안전의식 부재와 부주의로 일어난 사고에 건설사 대표가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신세가 되는 우리나라는 외국 투자자들에게 그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아닐 수 없다.
또한 다른 나라에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기이한 정부 규제와 ‘시민단체’로 포장된 정체성이 모호한 각종 이익단체의 불법과 떼법, ‘내로남불’ 정서가 넘쳐난다면 글로벌 허브 국가의 꿈은 그저 요원하기만 하다.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강성노조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노조가 노동생산성 향상을 통한 기업 경쟁력 개선에 등을 돌리고 사상 유례없는 강력한 카르텔을 구축해 지대추구(Rent-seeking) 행위에 매몰된다면 갈수록 치열해지는 글로벌 경쟁체제에서 표류할 수밖에 없다.
이런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한국을 ‘혁신 허브’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선언을 한 점은 박수 칠만한 일이다.
윤대통령이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으로 신발이 닳도록 뛰고 또 뛰겠다고 강조한 대목은 신선해 보이기까지 하다.
특히 우리나라 제도를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지 않으면 우리가 국제사회에 살아남을 수 없다고 설파한 점은 늦었지만 다행이다.
한국을 세계 최고 혁신 허브로 만들어 총성 없는 경제 전쟁에서 우리 기업이 혼자 싸우도록 만들지 않겠다는 윤대통령의 결연한 의지가 결실을 거두려면 한국이 외국기업이나 외국인 투자자가 선호하는 기업 친화적 환경을 만들어야 함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세계 최고 혁신 허브는 공허한 정치적 구호만으로는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름없다.
칡넝쿨처럼 얽히고설킨 규제를 과감하게 없애고 기업가 정신을 함양하며 기업을 돕는 토양을 조성하지 못한다면 혁신 허브는 공허한 한여름 밤의 꿈으로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는 고(高)물가·고환율·고금리에 수출은 부진의 늪에 빠져 사면초가다.
우리가 맞닥뜨린 복합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려면 조지프 슘페터나 피터 드러커가 외친 기업가 정신이 충만한 경제체제를 서둘러 갖춰야 한다.
기업이 고용창출과 경제발전의 핵심축이라는 사실은 지나가는 강아지도 알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