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야심 찬' 1000조원 투자 청사진, 'R의 공포'에 올스톱 위기
[뉴스투데이=전소영 기자] 이전 문재인 정부가 친(親)노동 성향이 강했다면 현 윤석열 정부는 친기업 정책을 펼칠 전망이다.
이를 보여주듯 윤석열 정부는 공식 출범 이전부터 규제완화와 함께 기업이 경영하기 좋은 환경 조성을 약속하며 ‘기업친화적 정서’를 꾸준히 드러내 왔다.
이러한 현 정부에 재계가 힘을 실어주기 위함일까. 윤 대통령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삼성, SK그룹, 현대차그룹, LG그룹 을 중심으로 국내 10대 그룹은 ‘1000조원’ 상당의 중장기 대규모 투자를 선언했다.
이러한 훈훈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주요 기업들이 풀었던 곳간을 다시 걸어 잠그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과 금융권 자금조달 환경 악화에 따라 자금 부담이 커진데다 세계적인 경기침체라는 '블랙 스완'마저 등장했기 때문이다.
자칫 과도한 투자와 생산이 경영을 옥죄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이른바 ‘R(Recession·경기침체)의 공포’가 기업 중장기 대규모 투자계획의 중대변수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 SK·LG, 'R공포'에 투자 한발 쉬어가나?
25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지난달 29일 열린 이사회에서 청주 반도체 팹(공장) 증설 안건을 논의 끝에 최종 결정을 보류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당초 SK하이닉스는 청주 테크노폴리스 산업단지에 4조3000억원을 투자해 신규 반도체 공장(M17)을 증설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향후 2~3년 안에 전 세계 시장에서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계속 증가할 것으로 보여 생산시설을 사전에 확보하자는 취지에서 추진됐다.
예정대로라면 신규 반도체 팹이 오는 2025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이사회 보류 결정에 따라 착공이 연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SK하이닉스 역시 아직까지 정확한 일정 등에 관해 결정한 바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증설 보류 요인으로는 오리무중에 빠진 반도체 시장 전망 때문이다. 경기침체 공포가 잘나가던 반도체 시장에까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 세계 D램 시장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미국발(發) 인플레이션, 중국 경기 둔화 영향에 따른 정보기술(IT) 기기 수요 둔화로 지난해 하반기부터 하락세를 나타냈다. 이에 따라 올해 3분기 기준 D램 가격이 이전 분기보다 10% 가까이 떨어질 것이라는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 전망도 있어 당분간 가격 하락세가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원화 약세로 원자잿값 등 수입 물가가 큰 폭으로 오른 점도 주요인이다. 물가 상승에 원래 계획했던 투자비가 더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 경제매체 블룸버그통신은 최근 여러 소식통을 인용해 SK하이닉스가 전자기기 수요 감소를 고려해 내년 자본 지출을 당초 계획보다 25% 가량 줄인 16조원으로 줄이는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보도했다.
이를 보여주듯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 14일 열린 ‘대한상의 제주포럼’에서 “투자계획은 당연히 변경될 가능성이 있다”며 “원재료값 상승이 크기 때문에 원래 투자 계획대로 하기에는 어렵다”고 언급했다.
이보다 앞서 전기자동차 배터리업체 LG에너지솔루션도 지난 3월 미국 애리조나주(州) 퀸크리크에 1조7000억원을 투자해 연간 11GWh(기가와트시) 규모 원통형 배터리를 생산하는 신규 공장 설립 계획을 전면 재검토하기로 결정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올해 2분기 착공에 들어가 오는 2024년 하반기 양산을 목표로 했지만 고물가·고환율 등 여파로 투자비가 기존 계획보다 늘어나 2조원대 중반까지 치솟을 것으로 보이자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SK나 LG뿐만 아니라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市)에 170억달러(약 22조원)를 투자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설립하려는 삼성전자나 미국 조지아주에 6조3000억원을 투자해 전기차 전용 공장과 배터리셀 공장을 지으려는 현대차 계획도 변수가 있을 수 있다고 점친다.
■ 주요기업 당분간 투자 관망세 지속할 듯
기업들의 투자 부담은 이미 연초부터 시사됐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지난 3월 14일 공개한 500대 기업 ‘2022년 국내 투자계획’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105개사)의 50.5%가 투자 계획에 낙관적이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보여주듯 ‘올해 투자계획이 없다’는 응답자가 12.4%, ‘아직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는 응답자가 38.1%로 집계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주도 성장·규제완화’를 약속한 윤석열 정부에 화답하듯 지난 5월 국내 주요 그룹은 조 단위 중장기적 대규모 투자 계획을 줄줄이 발표했다. 삼성, SK그룹, 현대차그룹, LG그룹 등을 중심으로 국내 10대 그룹의 향후 5년 내 투자금 계획은 모두 합쳐 총 1055조6000억원에 이른다. 이는 역대 정권 초기 발표한 금액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불과 2달여 만에 SK하이닉스와 LG에너지솔루션이 기존 투자 계획을 보류해 당초 모습과 상반된 행보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현재 기업들은 국제원자재 가격 상승 등 대내외 불확실성이 갈수록 커지자 올 하반기에는 상반기 수준의 투자를 유지하거나 오히려 투자 규모를 줄일 전망이다.
전경련이 지난달 30일 공개한 500대 기업 대상 ‘하반기 국내 투자계획’ 조사 자료에 따르면 하반기 투자 규모를 확대할 것이라고 밝힌 기업은 16%에 그쳤다. ‘상반기와 비슷하다’는 기업이 56.0%로 가장 많았고 ‘상반기보다 축소한다’는 기업은 28.0%로 나타났다.
투자규모를 축소하겠다는 기업들은 그 이유로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 등 국내외 경제 불안정’을 43.3%로 가장 많이 지목했다. 이 밖에 △금융권 자금조달 환경 악화 19% △주요 투자프로젝트 이미 완료 11.5% △소비·수요 감소 9.1% △실적·재무구조 악화 전망 7.5% △해외투자 비중 확대 4.0%가 뒤를 이었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이 투자를 결정할 때 크게 정책 리스크와 시장 리스크 2가지를 염두에 두고 변화에 따라 투자 계획을 수정하기도 한다”며 “현재는 시장 리스크가 매우 커진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연초만 해도 지금처럼 무역적자가 발생하거나 미국 물가 상승률이 9%까지 오를지 아무도 예상 못했다”며 “이러한 돌발 변수가 생겼기 때문에 계획대로 투자를 단행할지, 아니면 조정을 해야 할지 기업별로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시장 리스크) 변곡점이 예상돼야 하는데 지금으로선 이러한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몰라 당분간 관망세가 지속될 것 같다”고 부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