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구 기자 입력 : 2023.07.12 01:00 ㅣ 수정 : 2023.07.12 01:00
반도체 영업이익 추락 만회할 혁신책 시급 ‘제2의 애니콜 화형식’ 하지 못할 이유 없어 기술 혁신 없으면 인텔의 쇠락 전철 밟을 수도 ‘혁신자 딜레마(The Innovator's Dilemma)’ 빠질 여유 없어 경쟁업체 감히 추격할 수 없는 반도체 기술 초격차 일궈내야 반도체 지난해 한국 전체 수출 20% 차지...경쟁력 잃으면 국가 위기 윤석열 대통령, 반도체 경쟁을 국가 총력전으로 강조한 점 박수칠 일 우방 없는 냉혹한 반도체 전쟁에서 졸면 죽어
[뉴스투데이=김민구 기자] 글로벌 반도체 전쟁에서 '블랙스완(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나타나지 말란 법은 없다. 삼성전자도 예외는 아니다.
삼성전자는 올해 2분기 영업이익이 6000억원에 그쳐 지난해 2분기 영업이익(14조1000억원)과 비교해 무려 96%가 사라지는 참혹한 성적표를 거머쥐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는 올해 1분기(6400억원)에 이어 2분기에도 영업이익이 1조원을 밑돌게 됐다. 삼성전자 분기 영업이익이 1조원 밑으로 내려간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파고가 넘실댔던 2009년 이후 14년 만의 일이니 이를 지켜보는 심정은 착잡하다.
다운사이클(침체기)의 먹구름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 짙게 드리운 결과라는 전문가 분석이 그나마 위안이 됐지만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이런 가운데 반도체 업황이 올해 하반기 감산으로 나아지고 최신형 폴더블(접을 수 있는)폰이 등장해 삼성전자가 글로벌 무대에서 다시 맹위를 떨칠 것이라는 전망은 겹겹의 어둠을 뚫는 한 줄기 밝은 빛이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만은 없다.
삼성전자는 D램,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세계 1위를 움켜쥐고 있지만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0%가 넘는 시스템반도체 사업은 물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등 비메모리 시장에서 정상에 오르지 못한 게 엄연한 현실이다.
특히 메모리반도체 시장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양상을 보이면서 세계 1위 삼성전자가 추월당할 수 있는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다.
시계바늘을 잠시 28년 전 봄으로 돌려보자. 1995년 3월 9일 삼성전자 경북 구미공장 운동장에는 불량제품으로 판명 난 무선전화기와 팩시밀리 등 15만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무선전화기는 출시된 지 5개월이 채 안된 애니콜 신제품 ‘SH-770’이었다.
삼성 임직원 200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동장 한 곳에 있던 불도저가 이들 제품을 산산조각 냈고 잘게 부서진 제품에는 불이 붙었다. 500억원 어치 제품은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며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
이날 화형식을 집행한 주인공은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었다. 이 회장은 무선전화기에 불량품이 있다는 보고를 받자 불량품을 모두 한곳에 모아 불태우라고 지시했다.
제품을 집어삼킨 거대한 화염은 어쩌면 품질 완벽주의를 고집한 이 회장 분노의 표출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회장의 ‘애니콜 화형식’은 회사 내 느슨해진 규율을 바로잡고 삼성 스마트폰이 세계 1위 제품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위기 상황에서 때로는 충격요법이 필요하다.
고 이건희 회장의 결단은 위기에 신속하게 대응해 브랜드 가치와 매출을 끌어올리는 고차원의 마케팅 전략이었다.
성공은 자만을 낳고 자만은 실패를 낳는다. 오직 패러노이드(paranoid·편집광:사소한 일을 크게 걱정하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3류기업은 위기로 무너지고 2류기업은 위기를 이겨내며 1류기업은 위기를 발전의 기회로 삼아 도약해온 게 글로벌 기업사(史)의 교훈 아니겠는가.
고 이건희 회장이 설파한 ‘위기의식’은 자칫 1등에 안주해 긴장하지 않고 기술 초격차(경쟁업체가 추격할 수 없는 기술격차)를 등한시하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한다.
한때 세계 반도체 시장을 쥐락펴락했지만 지금은 옛 영광을 반추하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한 미국업체 인텔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삼성전자가 지금처럼 메모리반도체와 D램 점유율 1위에만 안주하고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 등 더 큰 먹거리 시장에서 세계 정상에 오르지 못하면 반도체 시장 왕좌를 빼앗긴 인텔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는 영국 경제잡지 ‘이코노미스트’의 충고를 결코 간과하면 안 된다.
만일 삼성전자가 ‘혁신자의 딜레마(The Innovator's Dilemma)’에 빠졌다면 서둘러 벗어나야 한다. 세계 초우량기업이 시장지배력을 잃지 않으려면 ‘달콤한 관성’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게임의 룰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을 일궈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현재의 우울한 반도체 시장판도를 바꾸기 위해 ‘제2의 애니콜 화형식’을 통한 돌파구 마련도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를 위해 이재용 회장은 회사 내 ‘반도체 워룸(전시작전상황실)’을 만들어 경쟁업체가 감히 추격할 수 없는 기술 초격차를 일궈내야 한다.
반도체는 지난해 한국 전체 수출액의 약 20%(1292억달러:약 169조원)를 차지하는 주력 산업이다. 한국이 반도체 경쟁력을 잃는 순간 국가적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정치권의 국내 반도체 산업 육성 및 지원책도 속도를 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반도체 경쟁을 국가 총력전으로 삼아 민관이 머리 맞대고 헤쳐나가야 한다고 설파한 점은 박수칠 만 하다.
정부는 삼성전자 등 국내 반도체 업체의 애로를 해결하고 관련 규제를 없애는 등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우방을 자처하던 미국마저 한국 반도체 산업에 강력한 견제구를 던지는 냉혹한 상황에서 자칫 1위에 취해 졸면 눈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벼랑만 있을 뿐이다.
반도체 전쟁에서 경쟁력을 상실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졸면 죽는다’는 정보통신기술(ICT) 시장 격언처럼 글로벌 경쟁에서 한순간 방심하면 끝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