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한국 거덜 내는 시대' 슬기롭게 헤쳐 나가려면

김민구 기자 입력 : 2023.01.11 01:00 ㅣ 수정 : 2023.06.05 10:48

미국 연준 금리인상 고속 페달 ‘주변국 거지 만들기’ 초래
美 IRA, 동맹국 가치 훼손 해치는 이기적인 행태
‘칩4’ 동맹, 미국-일본만 혜택 보는 ‘기울어진 운동장’ 될 수도
필요하면 EU와 손잡고 공동 대응도 고민해야
‘각자도생’ 시대에 국가이익 최대한 확보가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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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구 부국장 / 산업1부장

 

[뉴스투데이=김민구 기자]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작품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 문득 떠오른다. 숲속의 두 갈래 길 앞에서 망설이다가 한 길을 선택한 후 느끼는 소회를 담은 작품이다.

 

누구나 한 번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동경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온갖 험로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택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이 시(詩)는 경제학에서 자주 인용되는 격언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와 일맥상통한다. 좋은 뜻으로 시작한 정책이 때로는 정반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얘기다.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가 금리를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올리며 가지 않은 길로 향한 지 1년이 되어가고 있다. 인상 폭도 기존 베이비 스텝이 아닌 빅 스텝, 자이언트스텝 등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미국의 급격한 금리인상 행진은 주변국을 거지로 만드는 '근린궁핍화정책(Beggar thy neighbour)'이다. 영국 경제학자 J. V. 로빈슨이 설파한 것처럼 서양식 카드 게임 트럼프에서 상대방 카드를 모두 가져가는 근린궁핍화가 되면 승패는 불을 보듯 뻔하다.

 

미국의 가파른 금리인상에 맞서 주변국도 자국 경제 여건과 관계없이 금리를 계속 올려야 하는 부담을 느낀다. 지금처럼 세계 경제가 촘촘하게 얽혀있는 상황에서 주변국을 거지로 만드는 미국의 금리인상은 나 혼자 살겠다며 다른 나라 경제를 희생시키는 이기적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엄밀하게 따지면 미국의 이웃 거지 만들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미국, 일본, 서독, 프랑스, 영국 등 선진 5개국(G5) 경제수장이 1985년 9월 22일 미국 뉴욕시에 있는 플라자호텔에 모인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G5 재무장관은 회의를 시작한 지 20분 만에 서둘러 끝냈지만 이날 모임은 세계 경제질서를 뒤흔든 역사적 사건이었다. 달러를 제외한 다른 주요 통화가치를 올리는 내용을 담은 '플라자 합의'가 발표됐기 때문이다.

 

플라자합의의 표면적 명분은 세계 경제의 불균형 해소였다. 그러나 속내는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라는 '쌍둥이 적자'로 골머리를 앓아온 미국이 대미(對美)수출로 짭짤하게 재미를 본 일본과 독일에 엔화와 마르크화 가치를 높여(환율은 하락) 수출 규모를 줄이라는 압력을 주기 위한 장(場)이었다.

 

미국의 '우방국 손목 비틀기'는 효험을 발휘했다. 플라자합의 직전 달러당 240~250엔대였던 엔·달러 환율은 1985년 말 200엔, 1988년에는 120엔대까지 급락해 3년 만에 반토막이 됐다. 이에 따라 일본제품 가격이 세계무대에서 두 배로 껑충 뛰어올랐다.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40년'을 향하게 된 데에는 부동산 버블 등 여러 요인이 있지만 플라자합의가 위기의 원인이 됐다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금리인상에 이어 미국이 추진 중인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역시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미국이 금리인상으로 전 세계에 인플레이션을 수출하는 상황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추진하는 것은 궤변이 아닐 수 없다.

 

미국만 혜택을 보는 '기울어진 운동장'인 IRA가 시행돼 한국산 제품이 미국 판매에 타격을 입는다면 입만 열면 동맹 가치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외치는 미국 정책에 대한 신뢰감이 사라진다. 

 

미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동맹 '칩(Chip)4' 역시 우리가 좌고우면하며 주판알을 치밀하게 튕겨야 하는 사안이다. 한국이 반도체 분야에서 이미 세계 최강인 상황에서 칩4가 우리에게 얼마만큼 이득이 될지 명쾌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얘기다.

 

칩4가 글로벌 반도체 경쟁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일본과 미국에 큰 도움을 주고 우리는 반도체 최대 수출시장 중국을 잃는다면 이는 실패한 전략이다.

 

우리 반도체업계가 칩4로 최대 수출시장 중국을 포기하고 그 대안으로 얻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한번 해 볼 만한 일이다. 그러나 한국이 미국과 일본의 국제 전략에 등 떠밀려 칩4 '선발대'로 나서 우리 '밥그릇'을 잃는다면 이는 자살골이나 다름없다.

 

물론 우리가 미국 요구를 일방적으로 거부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 국가와 기업에 큰 손실을 안기며 미국 요구에 모두 따르는 것은 자주 국가의 면모가 아니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이끄는 미국 호(號)는 자유무역주의와 결별하는 모습이다. 그동안 자유무역 중요성을 외치며 세계화를 이끌어온 국가가 다름 아닌 미국이다. 미국은 교역국이 자유무역을 따르지 않으면 '슈퍼 301조'라는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며 일방적인 보복 조치를 해왔다. 그런 미국이 이제는 IRA 카드를 내세워 자유무역을 도외시하는 것은 자기모순도 이만저만 아니다. 

 

결국 이언 아서 브레머(Ian Arthur Bremmer) 유라시아그룹 회장 주장이 옳았다. 브레머 설명처럼 세계는 특정 국가가 전 세계를 포용하는 리더십이 사라지고 각자도생해야 하는 'G-제로(G-Zero)' 시대에 접어들었다.

 

G-제로 상황에서 미국이 동맹 가치를 훼손하고 보호무역주의에만 매몰된다면 우리 역시 국가이익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IRA에 우리나라 못지않게 크게 반발하는 유럽연합(EU)과 공동 대응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

 

미국이 가지 않은 길을 향해 질주하는 시점에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경구(警句)가 새삼 가슴에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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