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어떤 일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거나 하소연 하는 사람이 있을 때 이에 대한 대답으로 쓰인다. 협박을 받은 것도 아니고 스스로 선택한 일이니 불평하지 말라는 것이다.
누칼협과 비슷한 부류의 표현들은 전 세계적으로 오래 전부터 사용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관용구다. 비교적 고급진 표현으로는 '자기책임' 정도로 치환할 수 있겠다.
게임 커뮤니티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누칼협은 점차 금융시장이나 직업, 일상 생활까지 여러 방면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자산시장에서의 누칼협은 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로 집을 마련한 '영끌족'이나 빚을 내서 주식이나 가상화폐에 투자한 '빚투족' 등의 사람들에게 많이 사용됐다.
누칼협의 표면적인 부분만 보면 투자에 대한 의사결정은 분명 본인이 내리는 것인 만큼 이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최근 누칼협이 사용되는 것을 보면 단순히 '네 책임이다'라는 의견에서 벗어나 '고소하다'거나 '잘 됐다'는 등 조롱의 측면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 같은 일방적인 조롱은 2020~2021년 당시 자산시장이 호황기를 지나던 상황에서도 나타났다. 코스피는 3,000선을 돌파하고 집값은 천정부지를 찍으며, 가상화폐는 신흥 투자처로 부상하던 그 당시의 유행어는 '돈복사'였다.
이른바 돈복사의 시대에는 지금과 정반대로 투자를 하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바보' 취급을 받았다. 투자를 통해 얻는 수익이 순수 노동에 따른 소득과는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컸던 상황에서 대중이 바라보는 노동력에 대한 평가 가치는 나날이 절하되기만 했다.
오늘날 자산시장에서 누칼협이 이처럼 호응을 받는 것은 호황기 당시 일부 투자자들이 내놓은 '비웃음'의 반작용으로도 보인다. 지금 누칼협을 사용하는 이들의 머리 속에는 "오르면 아무 말 않았을 거 아니냐"는 항변이 자리했을 수 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비소(誹笑)를 날리는 현 세태가 단체로 압박을 받고 있는 국면에서 나타났다는 점이다.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지고 시장의 위기가 피부로 와닿는 시점에서 푸념을 하는 누군가에게 내뱉는 누칼협은 마치 자신이 받고 있는 스트레스를 푸는 모양새로 비춰진다. '나보다 더 큰 손실을 입은 자'를 보고 한시름 놓으며 괜한 훈수나 비웃음을 툭 뱉는 것이다.
최근 몇 년 새 우리나라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특정 집단 간의 갈등도 누칼협의 유행을 부추긴 요인으로 보인다. 이미 세대·정치·성별·빈부 등의 갈등이 팽배한 상황에서 △손실을 본 투자자와 △비(非)투자자 간의 갈등 정도는 쉽게 발생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이와 같은 냉소적인 현상은 사회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기 힘들 것이다. 특히 지금처럼 위기 의식이 짙게 자리한 시기에는 더욱 나쁜 분위기를 심화할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고 당장에 누칼협이 쏙 들어갈 수 있도록 사회 분위기를 역전시킬 수 있는 묘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가 없다.
그렇게 '누칼협의 해'가 되는 듯하던 지난해 문득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라는 신조어가 반짝하고 나타났다.
지난해 10월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LoL)'의 세계 대회인 '2022 LoL 월드 챔피언십(롤드컵)'이 개최됐다. 당시 대회에 참가한 DRX 소속 프로게이머 데프트(김혁규, 현 담원 기아 소속)는 조별 리그 첫 경기를 패배한 이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오늘 졌지만, 무너지면 않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고, 인터뷰를 담당했던 기자는 해당 인터뷰의 제목을 <DRX 데프트 “로그전 패배 괜찮아,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지었다.
대회 내내 언더독으로 평가받던 DRX는 인터뷰 이후 극적인 롤드컵 우승을 달성했고, 이에 인터뷰의 제목이었던 중꺾마도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이후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마찬가지로 언더독으로 여겨지던 태극전사가 극적으로 16강에 진출한 이후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적힌 태극기를 들고 환호하는 모습이 송출되며 중꺾마는 범국민적인 신드롬을 일으키게 됐다.
정반대의 뉘앙스를 풍기는 누칼협과 중꺾마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해당 단어들이 주로 '상대적 약자'에게 사용된다는 점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누칼협의 약자는 본인이 자초한 것으로 여겨진다면, 중꺾마의 약자는 말 그대로 강함에 도전하는 언더독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가만 보면 누칼협의 대상으로 지정된 그들이 과연 불만 자체가 부정되고 조롱을 받을 정도로 잘못된 선택을 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본인의 실수를 배제하고 특정 대상이나 시스템만을 비난한다면 그건 소위 '징징대기'에 불과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잠시 한숨을 뱉은 언더독으로 간주할 수 있지 않나.
사회적 피로가 축적된 상황에서 누군가의 볼멘소리를 듣는 것은 피곤하고 짜증나는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가끔은 힘든 일을 양껏 뱉어낼 수 있는 대나무숲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대나무숲에서 울린 메아리에 냉소와 조롱 섞인 손가락질을 보내기보다는 위로가 담긴 따뜻한 손길을 내어주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