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두의 K-Sapience : 한국인의 내사랑 아파트(1)] 한국은 어떻게 아파트 공화국이 되었을까

서민지 기자 입력 : 2024.12.29 04:29 ㅣ 수정 : 2025.01.02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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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 유튜브 '텔 더 스토리' 12월 16일 방송본

■ 대담 : 뉴스투데이 민병두 회장

 

◇ 인트로

 

안녕하세요, 뉴스투데이 회장 민병두입니다. 오늘부터 '한국인은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우리가 함께 여정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K-sapience'라고 이름을 붙여봤는데요. 전 세계인이 '한국'이라는 나라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외국인들이 우리한테 관심을 갖기 이전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누구인지 정체성을 묻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해외 아파트 사례

 

아파트가 건축의 여러 종류 중 하나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지배종이에요. 그렇지만 유럽의 역사에 있어서 아파트는 지배종이 아닙니다. 우리가 미국이나 유럽에 가서 보면 대부분은 전원주택 같은 단독주택이잖아요. 유럽의 역사에 있어서, 미국의 역사에 있어서 아파트는 보조적인 주택의 종으로 남아있습니다. 과거에는 '집단 주택'이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건축 기술상의 한계 때문에 고층 주택도 없었죠.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있고 난 다음에 프랑스는 큰 충격을 받았죠. '아 우리보다 영국이 굉장히 앞서 갔구나.' 그러면서 '만국 박람회'를 유치해서 계기를 만들어 보려 하는데, 지금은 '파리' 하면 '우아함의 도시'지만 그 당시에는 오래된 불결함의 상징이었습니다. 오물들 천지라고 할 수 있었죠. 19세기 중반 파리에서 처음으로 '현대 아파트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집단 주택이 생깁니다. '조르주 웨젠 오스만 남작'이 1853년 파리 시장에 올라 17년간 파리를 정비합니다. 거기에 잘 정비된 가로수 6∼7층 정도의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조르주 웨젠 오스만 남작은 '불도저 시장'이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주상복합' 건물의 특징은 1층에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이 다 있다는 것이죠. 가령 꽃집, 빵집이 기본으로 있고 2∼7층에는 발코니가 있어서 도시의 전망을 볼 수가 있죠. 조금 의외인 것은, 고층으로 올라갈 수록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엘리베이터가 없었기 때문이죠. 지금 우리나라 현대 아파트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두 번째, 스위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굉장히 전설적인 분입니다. '집이란 인간이 살기 위한 편안한 기계가 돼야 한다.' 어떤 기계가 가장 편안할까요? 대형 크루즈를 생각해 보세요. 크루즈를 타면 그 안에 모든 것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의 건물 위에 모든 것을 갖춘 개념을 창시한 분입니다. 마르세유에 실제로 1600명이 거주하는 고층 아파트를 지었습니다. '지상의 모든 공간을 자연녹지 위에 짓는다.' 고밀도로 올릴수록 다른 공간은 녹지화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타워 인 파크'라는 개념이 생긴 겁니다. 이를 통해 주택을 대량 생산하는 시도를 처음 해봤고요. 이는 주택의 역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 한국의 아파트 사례 

 

우리나라의 집의 역사는 전 세계적으로 독특합니다. 온돌을 기본으로 하죠. 일본은 '다다미방'이라고 하잖아요. 다른 나라는 골조가 있기 때문에 2∼4층 건물도 짓기에 가능했지만, 우린 온돌을 기본으로 해서 어려웠죠. 

 

조선시대 말 우리나라 인구가 500만 명, 서울 인구가 10∼20만 명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1940년도엔 70∼100만 명에 육박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대문 안에 70∼100만 명의 사람을 수용할 방법이 없자 마포·성동구 부근으로 하나씩 확장됩니다. 기존의 주택 양식으로는 사람들을 포용하기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주택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것이죠.

 

1925년 '조선과 건축'이라는 잡지에서 처음으로 '아파트먼트(apartment)'가 소개됩니다. 몇 년이 지난 후 아파트를 짓는데, 거주용이라기 보다 직원들 숙소였어요. 지금 충정로의 '유림 아파트'가 실제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거주했던 최초의 아파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동아 1933년 5월 호에도 '아파트먼트(apartment)'가 최초로 소개됐는데 개념이 재밌습니다. '일종의 여관 또는 하숙 하는 곳이다·한 빌딩 안에서 방을 여러 개 만들어 놓고 세를 놓는 집이다·사람들을 실어 수용하는 곳이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이승만 정부가 들어섭니다. 이때부터 엄청난 변화가 생기죠. 서울의 인구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늘어납니다. 1946년 서울 인구가 115만 명이었어요. 1960년도에는 245만 명, 1970년도에는 543만 명. 이호철 작가가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소설을 씁니다. 모든 사람들이 서울을 향해서 꿈을 갖고 오는 것이죠. 매일 같이 판자촌이 생기고 꼬방동네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승만 정부가 주거 혁명을 시작합니다. 그중에 하나가 '문화 주택'인데, 처음으로 서양식 주택을 짓기 시작합니다. 당시에는 현대적인 주택이었는데, 부지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아파트를 처음 짓기 시작한 것이죠. 1959년 고려대학교 앞 처음으로 아파트를 지었는데, 이게 우리나라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아파트입니다. 대통령이 직접 가서 삽을 떴죠. 대통령이 축사를 할 정도였으니까 아파트가 우리 사회에서 주는 의미가 굉장히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시행착오 

 

이승만 대통령이 삽을 뜨면서 한 축사 중 하나가 '국민이 싫어하더라도 아파트를 지어야 한다' 입니다. 왜 그 당시는 아파트를 싫어했을까요? 첫 째, 한국인들의 고정 관념에서 화장실은 멀면 멀수록 좋다고 했어요. 근데 화장실이 집 안에, 방 구조 안에 같이 있으니까 불편해했던 것이죠. 두 번째, 김장독을 어디에 둬야 할 것인가. 우리 식생활 문화에 있어서 김장독, 고추장독, 간장독 중요했거든요. 세 번째는 연탄가스 문제예요. 산에서 나무를 베고 온돌로 난방을 했는데 연탄 문화로 바뀌었던 말이죠. 연탄가스로 죽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5·16쿠데타를 일으키고, 박 대통령 역시 똑같은 문제에 부딪힙니다. '생활 혁명을 해야겠는데, 주거 혁명을 일으켜야겠는데' 생각이 든 것이죠. 

 

당시 북한이 남한보다 1인당 GDP도 높았습니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북한도 아파트를 많이 지어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굉장히 좋은 주거 형태라고 할 수 있어요. 평등하니까 똑같은 아파트를 똑같이 공급할 수 있죠. 못사는 사람들한테도 대량으로 주택을 공급해 주니까 좋아 보이고, 1960년대 초기에는 북한이 우리한테 '선망의 대상' 같은 거였어요.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주거 혁명으로 서울 곳곳에 아파트를 짓기 시작합니다. 마포에 '서민 아파트 시대'를 열기 시작했죠. 아파트 붐을 일으키기 위해서 주택 공사 사보에 아파트 산 소감까지도 올렸습니다. '여기가 낙원이다, 밤에 보면 한강 노을이 보인다, 하루에 지친 몸의 피로를 샤워를 하며 풀 수 있다.' 이런 소감문이 쭉 쓰입니다. 

 

문제는, 아파트를 빨리 지으려다 보니까 홍대 뒤 와우산에 지어진 아파트가 날림 공사가 되며 한 동이 통째로 무너졌고 39명이 죽는 사태가 일어납니다. 국민들의 인식 속 아파트는 '위험하고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주거 혁명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결국은 어떤 전기가 필요한데,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 한강에서 시작됩니다.

 

◇ 중산층 아파트

 

1971년도에 나온 노래가 있어요. 남진, 우리나라의 전설적인 가수죠. '님과 함께'라는 노래입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서울이 온통 꼬방동네예요. 청계천은 판자촌이고 정말 심각한 문제죠. 그래서 자고 일어나면 사람들을 상계동, 목동에 갖다 버렸어요. 존슨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건 나라의 수치다'라고 했어요. 가난한 사람이 나라의 수치가 될 수는 없지만 가난 자체를 숨기려 했던 국가의 책임이 있죠. 성남시에 서민 아파트를 지어봤지만 별 효과가 없었어요. 그러다 '대한주택공사'가 생기며 한 가지 방안을 찾아냅니다. 

 

당시 이촌동은 바다보다 넓고 폭이 큰 모래사장이었어요. 사람들이 한강에서 목욕도 하고 수영도 하고, 겨울에는 스케이트와 썰매를 탔던 곳입니다. 여기에 아파트를 지을 생각을 한거죠. 그래서 처음으로 이촌동에 매립을 추진해서 주택을 조성하고 '동부이촌동 아파트'를 짓기 시작합니다. 공무원 아파트, 시범 아파트 등 하나씩 짓게 되는데 성공을 거둬요. 

 

먼저 '모델하우스'를 만듭니다. 사람들의 인식 속 '아파트'는 '불결하고 지저분하고 위험한 건물'인데 모델하우스를 보여주며 인식을 바꾼 것이죠. 또 모래 위 건물을 짓는 게 건설회사 입장에서는 돈이 필요 없어 좋습니다. 모래를 정비해 부지를 조성하면 되니까, 건설사는 '한강 어디 부지가 있으면 우리한테 주세요' 하게 된 것이죠. 정부 입장에서도 재정이 없지만 건설사가 주택을 대량으로 생산해주니 이득이죠. 그래서 모델하우스, 홍보비, 매립지 비용으로 거대한 아파트를 지을 수 있게 됐습니다. 

 

동부이촌동 아파트가 성공하자 여의도에 처음으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섭니다. 분양가 200만 원으로 시작했는데 두 달 만에 천만 원이 됐습니다. 12층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어떻게 사용할 지 몰라, '엘리베이터 걸'이 입주자들에게 설명해주기도 했어요. 전시용이지만 수영장도 생겼죠. 이후 반포, 압구정까지 기회의 땅들이 늘어났습니다. 

 

한강의 구조와 물길, 주거의 형태, 서울의 권력 지도까지 바꼈습니다. 기존엔 서울의 강북이 부유층이었거든요. 성북동과 한남동이 부의 상징이었어요. 그러다 반포동과 압구정동으로 아파트가 들어서며 변호사와 판사, 검사, 고위 간부, 대기업 사람들이 강남으로 이사를 갑니다. 중산층 아파트 시대가 열린 겁니다. 남진의 '님과 함께'가 윤수일의 '아파트'로 바뀐 겁니다. 당시 국내 아파트 보급률이 3∼4% 밖에 안됐지만 선망의 대상이 됐습니다. 강남의 시대가 열렸죠. 

 

다만 중산층 아파트는 시대적 배경과도 연결돼 있습니다. 1960년대 빠른 경제 성장과 월남 파병으로 중산층이 형성됐습니다. 이들의 수요에 맞는 아파트를 건설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또, 당시 동남아시아가 공산화되자 남북 간의 대결도 심해졌습니다. 북한의 도발도 빈번해졌습니다. 사람들은 6.25 전쟁의 경험으로, 서울의 행정 중심은 강북이 아닌 강남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자 강남 개발이 시작되며 다리가 놓였죠. 1976년 경기고등학교 등 명문 학교와 주요 기업들의 본사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주거·교육까지 일치합니다. 강남은 강북을 완전히 대체하며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죠.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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