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영풍-고려아연 분쟁이 불러온 '늑대의 춤‘ 걱정된다
영풍-고려아연,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 놓고 ’치킨게임‘
두 업체 기 싸움에 중국-미국 어부지리 얻으면 안돼
사모펀드 ’울프팩 전략‘에 국내 우량기업 적대적 M&A에 노출
국내 기업, 차등의결권·포이즌필 등 경영권 방어 수단 없어
[뉴스투데이=김민구 부국장] 1955년에 개봉한 미국영화 ‘이유 없는 반항(Rebel Without A Cause)’이 문득 떠오른다.
주인공 짐(제임스 딘)과 버즈(불량배)는 여주인공 주디(나탈리 우드) 마음을 사기 위해 치열한 구애를 펼친다.
딘과 버즈는 상대방 담력을 떠보기 위해 각자 차로 절벽을 향해 달리다 먼저 차에서 뛰어내린 사람이 지는 게임을 하기로 한다. 먼저 뛰어내린 자는 ‘치킨’, 즉 겁쟁이가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자동차로 게임을 벌이다 버즈는 옷이 차 문에 걸려 뛰어내리지 못하고 절벽으로 추락해 죽는다. 한 명이 먼저 포기하면 치킨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지만 끝까지 가면 둘 다 사망하는 셈이다.
헝가리 물리학자 존 폰 노이만과 독일 경제학자 오스카르 모르겐슈타인이 1944년 발표한 논문 ‘게임이론과 경제 행동(Theory of Games and Economic Behavior)’은 세월이 흘러도 인간의 내적 갈등을 잘 보여준다.
게임이론에서 파생된 치킨게임은 ‘해피엔딩’이 없다. ‘모 아니면 도’다. 양측이 ‘신뢰의 비대칭성’ 때문에 공생이 아닌 공멸이라는 역(逆)선택(adverse selection)의 길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 재계의 뜨거운 감자가 된 ‘영풍-고려아연 경영권 분쟁’도 치킨게임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다.
영풍그룹이 자회사 고려아연 경영권을 거머쥐기 위해 사모펀드 MBK파트너스(이하 MBK)와 손잡고 고려아연 지분 공개매수에 나서고 있다. 이에 맞서 고려아연은 글로벌 사모펀드 베인캐피탈과 함께 고려아연 자사주 공개매수를 본격화하는 양상이다.
영풍과 고려아연의 치킨게임 탓에 주당 66만 원으로 시작한 고려아연 공개매수가는 89만원이 되면서 한 달 새 무려 34.8% 치솟았다. 양측의 장군멍군식 대응에 기업가치는 물론 주주가치도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쏟아지고 있지만 이들의 신경전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고 있다. 결국 두 업체 기 싸움은 내년 3월 고려아연 정기 주주총회에서 판가름이 날 전망이다.
고(故) 최기호·장병희 명예회장이 1949년 영풍그룹을 공동 창업한 후 지난 75년간 한솥밥을 먹어온 두 회사가 최 창업주 손자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과 장 명예회장 아들 장형진 고문 간 알력으로 동업자 정신이 한낱 휴지 조각이 된 점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는 이 두 사람 모습을 그렇다고 비난만 할 수는 없다. 피를 나눈 가족 간에도 경영권을 놓고 골육상쟁을 벌이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업 간 분쟁의 함정을 파고들어 어부지리를 얻으려는 이들은 늘 있기 마련이다. 기업의 동업 정신이 무너지면 경영권을 노리는 외부 세력은 더욱 힘을 얻는다.
MBK와 베인캐피탈도 예외는 아니다. 영풍과 고려아연 가운데 누가 이기더라도 구원투수로 나선 이들 사모펀드 영향력은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
사모펀드가 국내기업 경영권 분쟁에 참여해 인수 기업을 키우기보다는 기업 자산을 팔아 이익을 취하는 ‘기업 사냥꾼’으로 전락한 것은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특히 MBK에 새겨진 주홍 글씨는 깊고 뚜렷하다.
MBK는 2013년 ING생명(현 신한라이프)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금융당국, ING생명 임직원에 회사를 약 10년 이상 보유하며 장기적으로 경영하겠다고 약속했지만 ING생명을 인수한 지 약 6개월 만에 대대적 인력 감축을 단행했다.
홈플러스도 마찬가지다.
MBK는 2015년 유통업체 홈플러스를 약 7조원에 사들여 ‘인위적 인력 감축·구조조정’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홈플러스 경영권 인수 후 20개가 넘는 홈플러스 점포를 폐점하거나 매각 후 재임차해 자산을 처분하고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에 나섰다.
MBK의 ‘약속 어기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치킨프랜차이즈 BHC를 인수한 MBK는 가맹점 계약 부당해지, 물품공급 중단 등 가맹사업법을 위반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과징금 3억5000만원과 시정명령 처분을 받기도 했다.
‘양치기 소년’이 된 MBK가 고려아연 인수를 추진하며 앞으로 10년을 바라보고 어떤 구조조정도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공허하게 들린다.
베인캐피탈도 ‘먹튀’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베인캐피탈은 바이오업체 휴젤, 교육업체 에스티유니타스, 인천 청라국제업무단지 인수 등에 참여하면서 온갖 구설수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고려아연이 이들 사모펀드 품에 안기면 고려아연은 물론 국가 경제에도 치명적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다.
비철금속 세계 1위 제련기업이며 반도체·2차전지 등 4차 산업혁명 핵심 자원을 공급하는 고려아연이 중국계 자본이 배후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MBK 혹은 미국계 베인캐피탈에 좌지우지되고 첨단 기술력이 중국이나 미국에 넘어가는 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고려아연은 차세대 전기자동차 배터리 기술로 꼽히는 ‘전고체’ 제조 기술을 갖고 있어 전기차 배터리 기술 첨단화를 노리는 외국기업이 군침을 흘리기에 충분하다.
영풍-고려아연 간 갈등으로 두 기업 경쟁력이 타격을 입는 것은 물론 국가 첨단기술이 해외로 빠져나간다면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맞게 된다.
영풍과 고려아연 신경전은 적대적 M&A(기업 인수합병) 풍속도도 바꿔놨다.
사모펀드는 그동안 경영이 부실한 기업을 대상으로 적대적 M&A를 추진했지만 이제 초우량 기업도 사모펀드의 ‘울프 팩(Wolf Pack) 전략’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긴 것이다.
해외 주요국에 있는 차등의결권, 포이즌 필, 황금주 등이 국내에는 없어 기업이 경영권을 방어할 수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정부 당국이 기업 밸류업을 외치고 있지만 공허안 외침일 뿐이다.
공멸할 수 있는 두 기업 간 치킨게임은 이제 멈춰야 한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이 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제안한 대화를 장형진 고문이 애써 외면할 상황이 아니다. 두 사람이 물러설 생각 없이 마주 달리는 신경전의 결말이 낭떠러지라면 이제 핸들을 돌려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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