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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두의 K-Sapience (10)

K-스포츠와 민족주의④ 중앙정보부, 양지 축구단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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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두
입력 : 2024.07.22 17:30 ㅣ 수정 : 2024.07.23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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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 사상 최장인 105일 해외 전지훈련을 했던 양지축구단의 전훈 당시 사진. 뒷줄 맨 왼쪽이 양지팀 2대 감독이었던 고(故) 김용식 선생, 앞줄 왼쪽에서 3번째 이회택 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뒷줄 오른쪽에서 2번째 조정수 전 축구협회 상벌위원장, 3번째 김호 전 대전 시티즌 감독 [사진=윤기로 나가사키대 명예교수 제공=연합뉴스]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전장 밖에서는 올림픽이 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민족주의 포럼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Edward Wong) 이 말을 바꾸어 표현하면 남북간에 휴전의 시기에는 스포츠가 가장 강력한 국가주의의 전쟁터이다.

 

박정희 시대는 남북간에 대결이 가장 첨예했다. 스포츠를 통한 전쟁의 시기였다. 스포츠에서 승리하여 태극기 혹은 인공기를 휘날리는 것을 전쟁에서의 승패와 같은 느낌으로 바라보았다. 초등학교 시절 부터 체제 대결의 이데올로기를 교육했다. 일례로 북한에서는 1960년대 초등학교 체육대회에서는 수류탄 ‘미국놈 까부시기’라는 종목이 가장 인기있었다고 하고, 한국에서도 수류탄 던지기 등 전쟁놀이 비슷한 종목이 있었다.

 

첫번째 충격-천리마 축구단

 

1970년대 초반까지는 북한이 경제 국방 스포츠 등 여러 분야에서 한국을 확실하게 앞섰다.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이었다. 북한이 월드컵 2연패 국가로 강력한 우승후보인 이탈리아를 누르고 월드컵 8강에 진출했다. 평균신장 165cm 북한 선수들이 이탈리아를 꺾고 4강에서도 포르투칼과 대등한 경기를 벌이자 세계가 놀랬다. (대니엘 고든이 2002년 ‘천리마 축구단’이라는 다큐 영화를 제작했다) 사다리전법이라는 전술도 독특했지만 놀라운 주력에 놀랬다. 2년 후 1968년 1월21일, 북한의 특수부대가 박정희 암살을 위해 침투했을 때 그들이 보여준 놀라운 속도와 맞물려 공포가 증폭됐다. 예선에서 북한과의 대결을 피하려고 출전을 포기해 벌금(1,100달러)까지 물었던 한국으로서는 북한의 선전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1967년 3월 축구단을 창단했다. (그해 12월 박정희가 재선되었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는 중앙정보부가 창단한 축구단의 명칭은 양지. 구단주는 음지이고 선수단은 양지이다. 이세연, 이회택, 김호, 김정남 등 11명이 국가대표 선수 출신이고 병역에서 면제되었으며 국내 유일의 잔디구장(중정 구장)에서 훈련했다. 엄청난 대우를 받았지만 혹독한 훈련과 정신무장, 그리고 사생활 감시가 뒤따랐다. 한시도 정신무장을 소홀히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1969년 아시아 클럽 선수권에서 준우승했으나  양지선수단을 주축으로 한 한국 국가대표가 1968년 올림픽과 1970년 월드컵 예선에서 탈락했다.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자리에서 밀려나면서 양지축구단도 해체되었는데, 정보기관이 나서서 축구단을 운영할 정도로 스포츠 대결은 전쟁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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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팀 멤버로 105일 해외 전지훈련에 참가했던 멤버들. 사진 왼쪽부터 이세연 OB축구회 부회장과 조정수 전 대한축구협회 상벌위원장, 박이천 OB축구회 부회장. [사진=연합뉴스]

 

두번째 충격-신금단

 

북한의 육상 최강자 신금단이 1963년 자카르타 신흥국가경기대회(GANEFO)에서 혜성 같이 나타났다. 200m 400m 800m에서 3관왕이 되었다. 400 800m는 세계신기록. 특히 800m는 사상 최초로 2분대를 돌파하는 1분 52초1로 그 기록은 30년 이상 깨지지 않았다. 86 아시안게임에서 임춘애가 육상 3관왕이 되었을 때 800m 기록이 2분5초72였다.

 

신금단은 1964년 도쿄올림픽에 북한 대표로 출전했지만 자격이 박탈되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가 금한 신흥국가경기대회에 참가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신흥국가경기대회는 “신흥세력의 인민은 스포츠가 인간과 민족을 형성하고 국제적 이해와 선의를 창출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모든 형태와 표현에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세계를 구축하기를 열망하며….“ 라는 창립 선언에서 보듯이 분명한 정치적 지향을 갖고 있었다. 사회주의권과 비동맹국가들의 제전이었다. 강력한 메달 후보 신금단의 출전이 불가능해지자 북한은 선수단 철수 결정을 내렸고 중국, 인도네시아도 도쿄올림픽을 보이콧했다.

 

세번째 충격-한필화

 

북한은 1964년 인스브루크 동계올림픽에 ‘North Korea’라는 명칭으로 참가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와 한국이 조선이라는 국호로 참가하는 것을 반대했다. 평양체육대학 3학년 재학 중이던 천재 스케이터 한필화가 스피드스케이팅 3000m 경기에서 은메달을 땄다.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의 동계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었다. 동계올림픽에서 한국은 그때까지 메달 소식이 없었다. 한국은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 비로소 최초의 메달을 획득하였다. 이 역시 충격이었다. 이런 황망함을 해소할 방법을 엉뚱한데서 찾았다. 국내 언론은 일제히 약속이나 한 듯이 그녀의 외모를 비하하는 보도를 했다. “뚱뚱한 몸집에 눈이 째진 살짝 곰보로 여성다운 점은 찾아볼 수 없는데….”(동아 1964.2.20) 

 

네번째 충격-리호준 사격 금메달

 

1972년 드디어 남북이 올림픽에서 대결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가 North Korea라는 지명이 아니라 정식 국호로 참가하는 것을 허용했다. 올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올림픽에 첫 출전한 북한이 사격에서 금메달을 땄다. 한국은 1948년 헬싱키올림픽 부터 참가해서 오매불망 기다렸지만 금메달을 목에 걸지 못했다. 사격의 소구경 복사 종목에서 북한의 리호준이 600점 만점에 599점이라는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남과 북이 준 전시인 상황에서 백발백중의 사격 솜씨를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국민의 위기감은 증폭되었다. 

 

리호준은 수상 인터뷰에서 “저는 수령님이 말씀하신 대로, 과녁을 조선 인민의 철천지 원쑤인 미제놈의 털북숭이 심장을 겨눈다는 심정으로 보고 쏘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명백한 스포츠 정신 위반이라며 국제올림픽위원회가 메  달 박탈까지 고려했지만, 북한은 “통역 과정에서 오역이 있었다” “이호준이 현역 군인이라는 점을 감안해달라” “세계 신기록을 세운 나머지 흥분해서 그랬다”라고 무마하여 금메달을 지켰다.

 

북한의 소총복사 금메달 소식은 정말 충격으로 다가왔다. 미군의 정보수집함인 푸에블로호가 원산에 납치된(1968) 악몽이 생생하던 때였다. 북한이 우승한 종목이 다른 것도 아니고 사격이었다. 미국은 월남에서 패색이 짙어지면서 철수 시기만을 계산하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과 국경 분쟁 등으로 사회주의 패권을 다투던 중국과 국교정상화를 했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일본도 중국과 수교했다. 우리가 국제사회의 흐름에서 소외되어 있고, 자칫하면 미국이 한국을 버려서 제2의 월남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했다. 그런 우려를 불안감으로 조성해서 박정희는 헌법개정을 통해 영구집권의 길을 열었다. 

 

북한은 처음으로 참가한 하계올림픽에서 금메달 1개,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로 종합순위 22위, 한국은 은메달 1개로 종합순위 33위를 기록했다. 한국은 남북이 모두 강했던 복싱에서, 그리고 사상 최초의 구기종목 대결인 여자 배구에서 연달아 패배했다. 

 

북한의 여자 배구 실력은 세계 최강 수준이었다. 남북대결에서 북한은 한 세트도 내주지 않고 완승했다. 19세의 나이에 출전했던 조혜정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렇게 긴장했던 경기는 처음…이기자는 생각 보다는 어떻게 하면 지지 않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우린 북한과 일본전에서 패하면 난리 나잖아요. 한국에 그냥 못돌아오는 분위기였어요. 선수촌 숙소가 17층이었는데 그냥 거기서 뛰어내리고 싶었어요. 너무 참담해서”(스포츠해럴드 2016.8.17 메달리스트 그 이후의 삶 6. 조혜정 편) 이때까지만 해도 남북대결에 임하는 선수단은 “이기라면 이기고, 죽으라면 죽어라”(축구 양지팀 모토)는 자세로 임했다. 승리해서 돌아가면 영웅이 되었고, 패배해서 귀국하면 죽음이라는 생각으로 경기에 나갔다.

 

북한은 체육을 사상교양의 도구이자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위치지었다. ”신체를 다방면적으로 발전시키며 집단주의 정신과 혁명적 동지애, 굳센 의지, 규율 준수에 대한 자각성과 책임감을 배양함으로써 국방력을 강화하고 공산주의 건설을 성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메달리스트는 영웅의 칭호를 부여받고 조선체육대학에서 공부하게 하는 등 각종 특전을 주었다. 그들은 모든 성과를 당과 수령에게 돌렸다. ’우리‘가 중요했다. 그 모든 영광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탁구영웅 박영순의 일화는 ’마지막 한 알‘이라는 제목의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영된 바 있다. 주인공인 박영순의 아들이 북한 방송에 나왔다. 진행자가 ”나이는 열 살, 우리 당의 품 속에서 영생하는 박영순 동무의 아들입니다“라고 소개하자 아들은 ”저도 탁구를 잘해서 어머니 처럼 경애하는 아버지 김정일 장군님께  기쁨만을 드리겠습니다.“고 답했다.

 

박정희는 분노했다. 1966년 태능선수촌을 건립했다. 이어 1972년 메달리스트연금제도와 체육특기자 제도를, 1973년에는 병역의무 특례규제를 도입했다. 동독을 벤치 마킹하여  국립체육대학 설립을 지시했다. 한국체육대학은 1977년 3월 19일 개교하면서 신입생을  특기자로 전원 선발하며 엘리트스포츠 시대를 열었다. 박정희 시대는 스포츠를 육성하는 정책개념이 들어온 최초의 시대였고 그 동인은 남북대결이었다.

 

박정희가 드라이브를 걸면서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우리는 북한을 간발의 차로 제치며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1974년 테헤란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은 북한을 포함해 중국 몽골등 공산권 국가가 처음 출전했던 아시안게임이다. 남북한의 대결도 심각했다. 1974년 8월15일 육영수 여사가 총에 맞아 사망했는데 8월17일 선수단은 육영수 여사를 향해 일동 묵념을 하고 테헤란으로 날아갔다. 승무원들은 가슴에 ‘이기고 돌아오라’는 리본을 달았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을 진두지휘한 김택수 대한체육회장은 ”북한의 끈질긴 도전을 꺾고 피나는 투쟁을 벌인 것은 총칼을 휘둘러 싸우는 백병전 보다도 더 가열찬 싸움“(경향 1974.12.19)이라고 했다. 피차간에 민족이 없었던 시대이다. 오직 이념과 국가만이 있었다. 

 

“38도선을 사이에 둔 남북한의 삼엄한 정세는 그대로 테헤란으로 옮겨졌다. 개막 전 호텔과 프레스센터에서 몇 차례 남북 기자들이 서로 웃는 얼굴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과 마주쳤다. ‘역시 같은 민족이구나. 어쩌면 대회를 통해서 대화가 재개될 수도 있겠지….’ 이런 기대감을 막연히 품게 되었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자 대립은 모습을 드러내었다…. 복싱 경기장에서 있었던 일. 한국을 꺾고 우승한 북한 선수의 시상식에서 북한 국가가 연주되자 한국 측 응원단은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아이들까지도 같은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보고서 마음이 아팠다” (아사히 신문 1974년9월18일)

 

미국이 1973년 북베트남과 평화협정을 맺고 완전 철수 한 후, 1975년 4월30일 북베트남이 사이공을 점령했다. 한국에서는 연일 대통령 담화가 나오고 반공특집이 TV를 장식했다. 프로그램이 끝날 때 마다 “너와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싸우며 일하고 일하며 싸우자” 같은 군가가 흘러나오던 시절이었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레슬링의 양정모는 건국 이후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하며 한국인의 여망을 실현했다. “체육관에 있던 500명의 교포는 목이 터져라 양정모와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애국가를 합창하며 눈물을 흘렸다. 해방 31년만의 쾌사요, 건국 28년만의 개가요, 1948년 런던올림픽 처녀 출전 이래의 숙망의 달성이요 1936년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마라톤에서 우승한 이후 실로 40년만에 맛보는 감격”(조선일보 사설)이었다.

 

1976년 사상 첫 남북 축구대결이 있었다.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에서 북한에게 패배하자  고교 대학 일반까지 연령대별로 상비군 제도를 운영했다. 1978년 박항서가 주장으로 뛴 방글라데시 아시아청소년 축구대회에서는 페널티킥 승부에서 승리했다. 박항서와 동료들은 경기가 끝난 뒤 10분간 부둥켜 안고 기쁨을 나누었고, 북한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주저앉았다. 그들은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양지 축구단까지 만들었던 한국은 축구 부흥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1971년에 처음 열린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박스컵(Park’s Cup)을 만들어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 태국의 킹스컵, 일본의 기린컵, 인도네시아의 독립기념대회와 경쟁했다. 북한과 위상차이를 벌리기 위한 의도도 숨어있었다.

 

남과 북의 체제경쟁은 국제대회 유치전으로도 이어졌다. 북한의 사격금메달에 충격을 받아서 1978년 세계사격대회를 한국에 유치했다. 1979년 세계 농구선수권대회도 유치했다. 이에 질세라 북한은 1979년 세계 탁구선수권대회를 유치했다. 1973년 한국선수단이 공산주의 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에서 우승한 것은 북한에 충격이었다. 한국이 잠재적 적지인 공산권 국가의 영토에서 중국과 일본을 꺾고 우승한 것은 남북 모두에게 파장이컸다. 상대방이 앞서면 기필코 앞서가야 했다. 국제대회 유치는 결국 장군멍군이었다. 박정희는 결정적 한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준비하지도 못하고 대회 유치를 신청했다가 준비 부족으로 대회를 반납해 벌금까지 물어야 했던 아시안게임의 기억이 아직 남아있었다. 아시안게임을 월반하고 올림픽으로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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