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두의 K-Sapience (4)] 지금은 여아선호시대...안티 페미니즘과 래디컬 페미니즘의 충돌 낳아
연애 시장에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각해지면서 루저 문화 형성돼
가부장제는 역사적 유물로 전락... ’변화하는 여성 vs 변함 없는 남성‘이 대조
일부 정치인은 젠더 이슈를 편가르기에 악용...무지와 남용은 시한폭탄을 키워
국회 정무위원장을 지낸 3선 국회의원 출신 민병두 보험연수원장이 한국인에 대한 예리하고도 심층적인 분석을 담은 '민병두의 K-Sapience'를 연재합니다. 문화일보 워싱턴 특파원과 정치부장으로 필력을 떨쳤던 언론인이기도 한 민 원장은 K컬처와 K푸드로 세계인을 열광시키고 있는 한국인을 'K-Sapience'라고 규정하고 그 내밀한 세계를 종횡무진 그려낼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남의 일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게지. 당해보면 심각하다 너. 우리 영감은 숫제 쓰고 드러누웠다니까. 맥이 풀려 사업이고 돈이고 다 귀찮대”
늘 낙천적인 친구의 목소리를 들은 지 일주일. 궁금하기도 해서 전화를 걸었더니 친구의 목소리가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어 파산했냐, 남편이 바람을 폈냐고 물었는데 되돌아온 답은 며느리가 또 딸을 낳았다는 것이다. 임의로 할 수 있는 노릇이 아니니 며느리한테 행여 불편한 내색하지 말라고 충고를 했다. 박완서의 중편소설 《해산바가지》의 도입 부분이다. 1980년대 초중반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남아선호 사상이 지배했던 세태에 대한 비판과 생명존중 사상을 담고 있다.
“왜 임의로 못하니? 양수 검사니 초음파 검사니 아들딸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데 제가 뭘 잘났다고 그런 것도 안해보고 겁없이 또 딸년을 덜컥 낳아놓느냐 말이야. 시집을 우습게 보아도 분수가 있지”
“…애를 뱄을 때부터 시부모 앞에서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한다는 소리가 ‘아들이고 딸이고 둘까지만 낳아보고 그만 낳을 테니 그런 줄 아세요' 글쎄 이러지 뭐니? 제가 남의 집 외며느리로 들어와서 그게 할 소리니?…딸년을 배고 시부모 앞에서 감히 그런 발칙한 소리를 한 생각을 하면 괘씸하고 분해서 미칠 지경이지 뭐니…”
마지못해 병원을 찾았는데 며느리의 친정어머니가 그를 보자 “사부인 면목 없습니다”고 했다. 외아들인 시아버지는 호적과 족보에 올릴 손이 끊길까봐 몸져 누웠고, 시어머니는 ‘딸년’을 낳은 며느리가 웬수 같이 느껴지고 사돈은 죄책감에 시달려 어찌할 줄을 모르는 설정은 당시의 시대 풍경을 정확하게 묘사한다.
1961년부터 정부가 대한가족계획협회를 통해 중점 사업으로 펼쳤던 가족계획은 1980년대 들어서 절정을 이뤘다. “덮어놓고 낳다가는 거지 꼴을 못 면한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등의 표어는 급기야 “둘도 많다”로까지 발전했다. 정관수술 등 피임이 장려되었다.
1차 베이비부머들이 결혼을 할 때였다. 셋을 낳으면 야만인인라는 소리를 들었다. 과거에는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임신을 하다보니까 남아 105명 대 여아 100명이라는 자연 성비가 지켜졌다. 그런데 아이 두명, 많으면 세 명 이내에서 ‘대를 이을’ 남아를 낳아야 하니 집안의 압박도 심해졌다. 때마침 초음파 기기가 국내에 들어오면서 임신 중절 수술로 여아는 지우고 남아를 선택하여 낳는 남아 선호의 절대적인 시대, 야만의 시대가 20년 이상 지속되었다.
1. 농경 사회와 함께 남아 선호 시작
동서양을 막론하고, 또 어떠한 종교이든지 효를 강조하고 제도화하였다. 기독교의 성경에서도 효는 주님의 명령이라고 했다.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너희 하느님 야훼의 분부다. 그래야 너희는 오래 살 것이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신명기 5장 16절/십계명)
인간은 효도하는 동물이다. 모든 동물이 자식을 사랑하지만, 효도는 인간만이 한다. 고대 사회에서 인간이 효라는 개념을 만들고, 이를 윤리로 발전시킨 이유는 노후 부양을 위한 복지 제도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농업혁명으로 단위 면적 당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인간은 무리지어 정착하기 시작했다. 수렵 채집 사회에서 남녀의 생산력은 동등했다. 남성이 어쩌다 성공하는 큰 크기의 동물 사냥과 여성이 일상적으로 채집하는 식량의 양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농경 사회가 되면서 농사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정주, 경작을 하면서 우월한 노동력을 가진 남자가 우대를 받았다. 잉여의 생산물, 즉 재산을 보호해야 했다. 남성이 사회의 안전 보장에 관한 일을 하게 되자 지위는 더 증대되었다. 국가가 들어서면서 군인이 필요해졌다. 가족과 부족과 국가의 재산을 지키는 일에 남자가 경쟁력이 있었다.
그런데 서양과 동양 사이에 정도의 차이가 있다.
“시장에서 제공하는 각종 보험, 대출, 주식, 투자펀드, 노후연금 등 금융 상품이 없다는 전제 하에 가정을 이루어 자녀를 양육하는 것, 특히 아들을 낳는 것은 미래 리스크를 회피하는 수단이었다. 다시 말해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부모의 미래를 위한 투자이자 보험이기도 했다. 곧 자녀는 인격화된 금융상품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가, 그렇지 않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자녀가 성인이 된 후 '효도'를 하는가의 여부였다. '효‘는 부모가 투자 이윤을 회수하는 관건이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아들을 낳는 것이 보험과 투자의 개념이었고, '효도'는 자녀가 부모와의 ’암묵적 계약’을 이행하는 방식이었다. '효'와 의무'를 핵심으로 하는 유교 문화는 공자와 맹자가 가족 간 ’암묵적인 거래'의 리스크를 줄이고 거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내 놓은 것이었다” (《중국식 모델은 없다》 천즈우 / 메디치 미디어).
서양에서는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보험 제도 등이 발달하기 시작해서 노후를 전적으로 자식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었다. 따라서 서양 사회에서는 부모 자식 간에 정서적 유대가 수직적 유대보다 더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모의 사후 세계는 종교의 영역에 속했다.
동양에서는 부모 자식 사이가 아주 엄격한 수직 사회가 되었다. 효가 그 기능을 했다. 효는 제사라는 양식을 통해 종교화 했다. 유교가 국교인 한국과 중국에서는 사후 세계를 담당할 다른 종교가 없다. 유교가 그 모든 것을 담당해야 하고 그러면서 생명의 근원이자 이제는 우주로 돌아가서 생명이 되어있는 조상(신)과 나를 연결하는 효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2. 고려 사람과 조선 사람. 남녀평등의 시대에서 불평등의 시대로
효는 삼국시대부터 이념화하고 제도화되었지만 시대에 따라 양태와 정도가 다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는 완전히 다르고 ‘고려 사람’과 조선 사람‘도 다르다. 고려시대에는 남자가 결혼을 하면 여자 집에 가서 살았고, 대부분의 고려 사람들은 어릴 적에 외가에서 살았다. 남녀는 평등했으며. 남녀 간에 내외를 하지 않았다. 개울물에서 속옷을 입은 채로 매일 목욕을 했다. 족보가 없었고, 딸이 부모를 모셨다. (함재봉 저 《한국사람 만들기 1》)
“무릇 부모에게 봉양을 바치는 것은 딸이 맡아서 하는 것이므로 딸을 낳으면 은혜와 부지런함으로 키워서 밤낮으로 자라서 능히 봉양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인데, 하루 아침에 품 안에서 빼앗아 4천리 밖으로 보내 버리기 때문에, 발걸음이 한번 문을 나서면 죽을 때가지 돌아오지 못하니, 그 마음이 어떠겠습니까?." (원나라가 고려에 동녀(童女)를 여러 번 요구했는데 이를 중지할 것을 요청하는 이곡의 상소문에서, 고려사 권 109, 열전 권제22, 제신, 이곡)
조선을 건국한 설계자들은 불교를 국교로 하는 고려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출가의 풍속은 비 윤리적이고 반 사회적인 것이며 불교의 세속을 떠난 출가는 가정과 사회의 윤리 기강을 무너뜨리는 요인이라고 보았다. 책임을 다하지 않는 행위로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윤회 사상도 비 현실적으로 보였다. 국가 경영에도 이롭지 않으니 배척받아 마땅하고 사회 윤리를 강화하는 건국 이념이 필요했다.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하여 세워진 조선에서는 효도는 국가의 기본 윤리이고, 남자는 효행의 효가 이뤄지는 가정의 중심 단위다.
부계 혈통과 장자 상속으로 모든 재산을 물려주는 종법제도가 조선의 개국과 함께 부활했다. 세종대왕은 1430년(즉위 12년) 공자에 의해 이론적, 사상적으로 정립된 과거의 예법을 부활하고자 했으나 현실은 간단치 않았다. 백성들은 수백년 동안 이어진 예법에 물들어 있었다.
세종대왕은 장인 장모가 사는 장인댁으로 장가를 가는 혼인 제도에 대해 못마땅해 했다. 조선 왕조가 세워진 지 42년이나 되는 해에 세종은 신하들과 토론을 하는 경연에서 이 주제를 다뤘다. 세종이 고례에 따라 친영(親迎 중국의 혼인의례. 신랑이 신부를 자기 집에서 맞이하여 혼례식을 치르는 제도)의 예를 부활하는 방안을 강구하자 김종서가 답했다.
“우리나라의 풍속은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는 것이 그 유래가 오랩니다. 만일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곧 거기에 필요한 노비, 의복, 기명을 여자의 집에서 모두 마련해야 되기 때문에 그것이 곤란하여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세종실록 세종12년 12월22일. 함재봉 저 《한국사람 만들기1》에서 재인용) 그리하여 타협안으로 왕족이 모범을 보이기로 하고 세종대왕의 딸, 숙신옹주가 조선 사람 중에서 처음으로 시집을 간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국가가 나서서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변화를 주창해도 민간의 습속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이율곡(1536~1584)도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자랐다. 오죽헌은 이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1504~1551)의 생가다. 모계의 영향력이 컸다. 퇴계 이황(1501~1570)도 장가를 갔다. 조선의 건국 후에도 백여 년 이상 고려 시대의 문화가 이어져왔다.
3. 임진왜란 이후 남아 선호가 이데올로기화
임진왜란과 두 차례의 호란으로 국가 기강과 사회 질서가 문란해지자 유교 성리학에 기대서 나라를 지켜야 했다. 임진왜란 당시 피난을 갔던 선조(1567~1608)가 특히 성리학에 의존했다. 임진왜란 이후 사대부들이 생존을 위해서, 또 세력 도모를 위해서 결속을 하고 여성들도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이에 동조했다.
마침 16세기 말엽부터 예학이 발전했다. 유학에서 분류하는 예의 종류는 300~3000종이 있다고 할 만큼 세분화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처와 부모의 칭호를 자칭 타칭의 경우에 따라 각각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까지 제도화했다. 이중에서도 가장 강조된 것이 효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형식화했다.
개인은 하늘과 땅이라는 우주의 부모로부터 태어난 우주적 자아이자 육체의 부모로부터 태어난 가문적 자아이다. 부모에 대한 효는 생명의 근원인 조상에 대한 공경과 보은의 출발점이자 전제다. 효를 종교화하여 자손에게 반드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제사는 혼을 부르는 초혼의 행위다. 제사를 행하는 주체는 자손이다. 따라서 아들을 낳는 것이 효이다.
부모가 살아 있을 때는 정성을 다하고, 죽은 뒤에는 경애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잘 지내고, 또한 아들을 낳아 제사가 끊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효이다. 장자는 제사를 물려받으며 재산의 상속에서도 우대를 받았다. 집안의 상속이나 제사와 같이 중요한 집안일을 모두 아들, 특히 장남에게 맡겼다.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데려와서라도 가계를 맡겼다.
가문이 중요했다. 누대에 걸쳐 족보를 만들고 조상을 과시했다. 가문을 결속시키고 사회적 세력을 쌓았다. 제사를 지낸다는 명분 아래 묘택에 딸려 있는 농경지와 종가의 위토 등을 가문의 공동 재산으로 집중하였고 이러한 재산을 종손을 통해 승계했다. 조직적으로 조상을 숭배하기 시작하면서 공동의 조상을 가진 자손들로 부계 혈연집단인 문중 구성원들의 결속력이 강해졌다. 신분상의 지위와 격이 문중에 따라 달라지면서 조상 모시기는 더 경쟁적이 되었다.
일제가 1923년 일본식 호적 제도를 시행했다. 일제가 호주를 중심으로 가계 혈통과 친족 관계를 한눈에 파악하여 징병 징세에 활용하고 독립군 색출 등을 위해 도입했다. 호주제를 만든 일본은 1947년 가족법 개정을 통해 호주 제도를 폐지했다. 지금은 부부와 그 미혼 자녀를 중심으로 한 신분증명제도를 채택하고, 가족의 성씨도 부부간 협의를 통해 결정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4년에 호주제 규정을 담고 있는 민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혼인의 남녀 동등권'을 헌법적 혼인질서의 기초로 선언한 헌법에 맞지 않는다는 반대가 있었지만 가부장제에 익숙한 다수의 의견에 밀려 관철되지 못했다.
호주제는 호주를 중심으로 가족의 관계를 등록하는 제도였다. 호주는 호적의 기준이 된다. 민법은 호주를 일가의 계통을 승계한 자, 가족은 호주와 같은 호적인 자로 규정했다. 부계혈통주의 사상을 법적으로 뒷받침한 것이다. 또 가족을 대표하는 남성 가장이 재산의 처분이나 가족의 결혼 등에 대한 우월적 권리를 갖는 제도이다. 호주의 승계 순위는 아들-손자-미혼인 딸-미혼인 손녀-배우자-어머니-며느리다. 철저히 남성 우월적 승계 순위이다. 호주제로 인한 병폐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남아선호 사상은 200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었다. 성리학과 일본 제국주의가 남겨놓은 호주제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 아들을 못 낳는다고 구박하는 시어머니, 딸을 박대하는 어머니와 할머니. 이들 중에는 자신들은 후사를 잇는 의무를 이행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며느리를 학대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시집살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설움을 한꺼번에 극복하는 길은 그토록 집착했던 아들이 잘 되는 것이었다. 집안의 대를 잇고 성을 이어갈 후손을 낳아줄 때라야 자신이 그 가문의 일원이란 소속감과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4. 인왕산 선바위에서 체질 개선까지
인왕산 선바위를 비롯하여 전국의 특별한 모양의 바위, 혹은 산신령에게 치성을 드렸다. 정말 정성을 다하여 새벽기도 백일기도를 드리고 심지어는 부처님 코를 베어다가 물에 넣고 끓인 후 마셨다.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가기도 했다.
체질을 알칼리성으로 바꾸면 남아를 낳을 확률이 80%가 된다는 믿을 수 없는 현대 의학도 판을 쳤다. 일본인 학자 스기야마 시로가 “배란일을 정확히 알아내고 성교 타이밍을 맞춤으로써 95% 이상 원하는 임신을 할 수 있다”고 한 주장이 널리 퍼져나갔고 체질을 바꾸는 장사도 성행했다. ‘한국 아들딸 조절연구원’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영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들은 못났어도 후사를 맡는다. 딸은 잘났어도 혼인을 하면 족보에서 없어진다”는 정도의 생각은 그나마 ‘논리적’이다. “든든하고 믿음직하고 기분이 좋다” 는 심리가 지배했다. 딸은 시집을 가면 호적에서 파이는데 그 심리적 결손감을 아주 크게 느꼈다고 한다.
사회적 부작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불만도 커졌다. 여성들이 정신과를 찾는 경우가 늘었다. 아들을 못 낳았을 때 남편이 바람을 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호소했다. 도태감, 좌절감, 무기력감이 커졌다. 자연적인 성비가 파괴되었다. 1980년대부터 심각해지기 시작해서 1990년 전후에 정점을 찍었다.
1984년 초음파 기기가 한국에 수입되었다. 초음파 기기는 죄가 없다. 한국에 와서는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 시대에 초음파 기술이 도입되면서 태아 감별이 가능해졌다. 수많은 여아들이 엄마 뱃속에서 유산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한 해에 3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진료비 명목으로 5만원을 받았다. 1987년 의료법을 개정하여 이를 불법화했다. 의료인의 영업 정지, 면허 취소까지 가능하게 하는 강력한 법이었다. 그러나 법망을 피해가는 언술이 늘어났다. “분홍색 이불이 어울리겠네요” 태아의 성별이 딸임을 암시했다.
5. 1982년생 김지영
“김은영 씨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채 어머님, 죄송해요, 하며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는 따뜻하게 며느리를 위로했다. ”괜찮다. 둘째는 아들 낳으면 되지."
김지영 씨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채 아가, 미안하다, 하며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는 이번에도 따뜻하게 며느리를 위로했다. “괜찮다. 셋째는 아들 낳으면 되지."
김지영 씨가 태어나고 1년이 채 되지 않아 세 번째 아기가 찾아왔다. 어느 밤, 어머니는 집채만한 호랑이가 대문을 부수고 뛰어 들어와 치마 속으로 푹 안겨 오는 꿈을 꾸었고 아들임을 확신했다. 하지만 김은영 씨와 김지영 씨를 받아 준 산부인과의 할머니 의사는 복잡한 얼굴울 하고 몇 번이나 초음파 기계로 아랫배를 훑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애기가, 참, 참, 예쁘네... 언니들을 닮아서..."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울다울다 먹은 것을 다 토해냈고, 할머니는 구역질하는 며느리에게 화장실 문 너머로 축하인사를 건넸다. 은영이 때도, 지영이 때도, 입덧이라고는 안하더니 이번에는 입덧이 이렇게 요란하다니? 쟤들하고는 다른 애가 들어섰는 갑다. 어머니는 화장실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한참을 더 울면서 토했다.
딸들이 모두 잠든 늦은 밤, 어머니는 뒤척이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만약에, 만약에, 지금 배 속에 있는 애가 또 딸이라면 은영 아빠는 어쩔 거야?“ 무슨 그런 질문이 다 있냐고, 아들이든 딸이든 소중하게 낳아 키워야 한다고 말해 주길 기다렸지만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응? 어쩔 거야, 은영 아빠?" 아버지는 벽을 향해 돌아누우며 대답했다. "말이 씨가 된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자." 어머니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소리 없이, 베개가 흠뻑 젖도록, 밤새 울었다.
아침이 되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침이 줄줄 흐를 정도로 입술이 퉁퉁 부었다... 어머니는 혼자 병원에 가서 김지영 씨의 여동생을 지웠다. 아무것도 어머니의 선택이 아니었지만 모든 것은 어머니의 책임이었고, 온몸과 마음으로 않고 있는 어머니 곁에는 위로해줄 가족이 없었다. 맹수에게 새끼를 잃은 동물처럼 울부짓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으며 의사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미치지 않은 것은 오로지 할머니 의사의 그 한마디 덕분이었다.’ (조민주 《82년생 김지영》)
6. 드라마 ’아들과 딸‘에 비친 남아 선호
드라마 역사상 최초로 남아 선호를 비판하는 주제를 담았다. 1992년 10월에 시작하여 역대 두 번째로 높은 시청률(평균 시청률 49.1% 최고 시청률 61.1%, MBC 드라마)을 기록했다. 김희애, 최수종, 채시라, 한석규가 출연했다.
이 시기는 태아의 남녀 성비로 볼 때, 남아 선호가 최고점에 도달했던 시기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고도 성장으로 여성들의 취업문이 열리면서 남녀 평등 심리가 표출되고 있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탓인지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 남매 중에서 온갖 천대를 받고 살았던 여자아이(후남)가 온갖 귀여움을 독차지 한 남자아이(귀남)를 앞서는 설정에 사람들의 시선이 끌렸다.
깨끗한 금색 강보에 싸여진 아들과 달리 남루한 검은 천에 싸여진 딸. 인생의 출발이 남녀의 신분 차이를 드러낸다. 후남이라는 남자아이 이름도 남자에 대한 편애를 상징한다. 다음엔 꼭 아들이었으면 하는 기원을 담아 후남(後男)이다. 귀남과 함께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지만, 오로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어머니한테 차별받고 자란다. 생일날 귀남이는 잔칫상을 받아먹지만, 후남은 부엌에서 그 음식을 해댄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도 귀남이는 엄마 등에 업혀가고, 후남이는 걸어간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귀남이는 자전거 사 주고, 후남이는 걸어다닌다.
후남이는 가난한 살림과 성차별 때문에 고등학교에 가지 못할 상황이었는데, 전교 1등을 다투는 우수한 성적 덕분에 장학생으로 진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후남이가 귀남이보다 성적 좋은 걸 칭찬하기는 커녕 귀남이 기를 죽이고 귀남이 앞길 막는다며 못마땅해 한다. 그러다가 귀남이는 대입 시험에 떨어지는데 후남이는 식구 몰래 본 대입 시험에 합격하자 엄마한테 두들겨 맞으며 "자고로 한집에 한 해 급제자 두 명 안나온다고 했다. 니가 귀남이 떨어뜨린 것이여", "내 저것이 귀남이보다 먼저 나올 때부터 알아봤지. 귀남이 앞길 막을 년"이라는 악담을 듣는다.
이에 열받은 후남은 가출해서 상경해 온갖 고생을 한다. 처음에는 의류 공장에 다녔으나 작업반장이 추근대고, 동료 중 한 명이 아플 때(돈을 알뜰하게 모은 게 후남이 뿐이라) 불가피하게 빌려준 돈도 받지 못하고 공장을 나와 우연히 김밥 파는 아줌마를 만나 같이 지낸다. 후에 김밥 아줌마가 공사판 함바집을 맡았을 때에도 같이 일하며 지내는데, 이 과정에서 김밥 아줌마 아들의 전과자 친구인 동춘이라는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할 뻔하기도 하는 등 후남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은 시청자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김밥 아줌마의 함바집에서 나와 가출 생활을 접고 귀남, 종말과 함께 지내게 된 이후에도, 낮에는 출판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방송통신대를 통해 공부하며 주경야독한다. 그 와중에 글을 쓰는 것도 잊지 않을 정도로 잠시도 쉬지 않고 자신을 다그치지만, 그런 혹사로 결핵을 얻어 몇 년간 고생한다.
그러나 고생한 보람이 있어 '현대문학'에 추천받아 등단도 하고,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로 편입해서 졸업 후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일생을 소재로 한 자전적 소설을 발표해 성공하는데 그 소설의 제목이 바로 '아들과 딸'. 그리고 귀남이의 대학동창이며 현직 검사이고 엄친아인 한석호와 결혼해서 행복해진다. (나무 위키에서 인용)
아마도 그 당시의 수많은 어머니들이 이 드라마를 보면서 남녀 차별의 시대를 살았던 한을 푸는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젊은 엄마들과 10대, 20대 여성들은 열렬히 후남이를 응원했다.
7. 호주제의 폐지 / 역사를 바꾸다
자연적으로 신생아 성비는 남자 103~107 대 여자 100이 정상이다. 산아 제한 정책과 태아 감별로 성비가 왜곡되었는데 1983~2006년, 약 20년간이 특히 심했다. 신생아 성비는 1980년 105.3명, 1985년 109.4명, 1990년 116.5명으로 악화되었다. 범띠, 용띠, 뱀띠, 말띠 여자는 팔자가 드세다고 해서 해당되는 해에는 출산을 기피했다. 1990년생 백말띠의 해에는 최악의 성비를 보였다. 셋째 이후의 성비는 무려 189.3까지 치솟아 올랐다. 대구시 392.2 경상북도 294.4 경상남도 291.4까지 인류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일이 벌어졌다.
내 집에서 남성이라는 종의 우위를 보존하는 것이 결국 사회 전체적으로 어떤 파장을 갖고 올 지 고민이 심각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남자들끼리 짝꿍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성장기의 아이들 정서와 세계관에도 영향을 미쳤다. 정부에서도 인기 연예인을 통해 계도 활동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1980년대 크게 히트를 쳤던 최성수의 ‘동행‘은 노랫말이 아름다와서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았다. 최성수는 노랫말을 바꿔서 초음파 검사를 비판하는 노래를 불렀다. “이러다간 다음 세대 여자 없는 세상 되겠네. 언젠가는 방방곡곡 노총각 줄을 서겠네… 아들 열 둔 아버지는 제주도 구경가지만 딸 하나 둔 어머니는 하와이 여행 떠나네. 아들이든 딸이든 구별 말고 잘 키워서 조화로운 한 세상 멋지게 살아가요.” 1988년에 TV에 출연해서 그가 부른 노래다.
여성계는 호주제가 남아 선호 사상을 배태했다고 보았다. 이를 표적으로 삼았다. 여성계의 조직적인 운동은 갈수록 거세졌다. 1997년 3월 8일 여성대회에서는 이이효재 교수를 비롯한 171명 여성계 인사들이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에 동참하며 호주제 철폐를 외쳤다. “우리는 태아 성감별에 의한 여아 낙태로 인간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는 현실을 통탄하면서 남아 선호의 고정관념을 깨트리기 위해 부모성 함께 쓰기 선언을 채택하게 됐다.
우리의 가정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가부장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아들 손자 딸 순으로 승계되는 호주제, 부계 혈통만을 중시한 동성동본 제도, 여성이 남성의 집안에 시집가도록 되어 있는 부가 입적 제도, 아들이 제사를 모시는 관습, 자녀는 원칙적으로 아버지 성을 따르도록 되어 있는 제도는 ‘아들을 낳아야 대를 이을 수 있다’는 강고한 가부장적 의식 구조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며 호주제 폐지를 주장했다.
2005년 2월 3일 헌법재판소가 호주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2008년 2월 폐지되었다. 최재천 교수가 EBS에 출연해서 “동물의 왕국에는 호주제가 없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번식을 하는 암컷이 우위에 서 있다.”고 한 것이 인연이 되어 참고인으로 헌법재판소에서 진술을 했다. “인간의 남성 우위는 동물의 세계에서 보면 매우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농경 사회가 되면서 남성 우위가 정립되었는데 인류의 전 역사로 보면 불과 5%의 기간에 불과하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에 따르면 인류의 조상과 뿌리를 추적할 때 여성과 그 여성을 낳은 여성, 즉 할머니의 할머니를 유전적으로 추적하는 것이 훨씬 과학적이라고 한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혈통에서 모계를 지워버리는 호주제는 비과학적인 것이다. 그의 발언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헌법 재판소의 판결로 부계 우선이라는 제도로서의 남성 우위는 몇 백년만에 마감되었다. 반대편에서는 종북이라고 비판하는 등 거세게 저항을 했지만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해서 전세계에 유일하게 존재했던 이 제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로 시작되는 개구리 노래의 경우는 한술 더 떠서 부계 혈통을 중심으로 한 확대 가족을 예찬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 남아 선호 사상을 부추겨 온 호주제가 폐지된 마당에 언제까지 ‘아들, 손자’ 타령을 하고 있을 것인가?(곰 세마리에 딴지 걸기, 구미정 대구대학교 겸임교수 2006) 호주제는 폐지되었어도 의식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지적인데, 그 후 실제적 인식의 변화는 놀랍도록 빠르게 전개됐다.
8. 자연 성비로의 복원, 그리고
2005년에는 태아 성비가 107.8로 자연 성비의 범주 안에 들어왔다. 2013년부터는 안정적으로 105 대 100의 성비를 보여주고 있다. 사회 의식은 이보다 더 빨리 변화해서 지금은 여아 선호 시대라고 할 정도로 세태가 변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확대되고, 문화적으로도 인식이 개선되었고, 2007년을 기점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남아 선호 사상이 약해졌다. 여성의 대학 진학률, 취업률에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다. 이미 1990년대 말부터 많은 회사들이 성적순으로만 신입사원을 뽑으면 대부분 여성들로 채워질 것이라는 고민을 했다.
“성적은 단연 여학생 쪽이 우세했는데도 아직 한 명도 취직이 된 여학생은 없었다. 교수님도 부모님도 ‘시집이나 가자’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남녀 불평등에 대한 분노를 함부로 내색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여권 운동자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니까. 우리 과 남학생들은 여권 운동자를 무슨 털벌레처럼 싫어하고 있었다. 아마 세상 남자들도 우리 과 남학생들과 대동소이하리라”(박완서 《나의 아름다운 이웃》 중 ‘키 큰 신랑’) 30여 년만에 세상이 크게 변한 것이다.
세태의 변화는 각종 여론 조사에서도 드러난다. 2008년 부부 2,078쌍을 상대로 한 설문 조사(육아정책연구원) 결과 딸을 원한다는 부모가 38%로, 아들을 원한다는 부모보다 약 10% 더 많았다. 2013년 전국 만19세 이상 기혼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향후 출산을 하게 될 경우 딸(43.1%)을 낳고 싶다는 답변이 아들(18.9%)을 낳고 싶다는 답변보다 많았다. 2021년 한국리서치 조사 결과 '딸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에 대한 질문에 남자는 54%, 여자는 59%로 남아 선호에서 여아 선호로 크게 바뀌었다.
1980년대 우스갯소리로 회자되었던 금메달, 은메달, 목메달이 2000년대 들어서서는 현실적인 느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잘난 아들은 국가의 아들, 돈 잘 버는 아들은 사돈의 아들, 빚진 아들은 내 아들, 아들은 사춘기 되면 남남 되고, 군대에 가면 손님, 장가 가면 사돈 된다… 딸 둘 가진 엄마는 해외 여행하고, 딸 하나 가진 엄마는 딸 집에서 설거지 하느라 싱크대 앞에서 사망하고 아들 하나 둔 엄마는 양로원에서 사망한다. 딸 둘에 아들 하나면 금메달, 딸만 둘이면 은메달, 딸 하나 아들 하나면 동메달. 아들 둘이면 목메달”
세태의 변화를 반영한 듯 2024년 2월 헌법 재판소가 임신 32주가 되기 전에 의료인이 태아의 성별을 알려주지 못하게 한 법률이 헌법 불합치 위헌라고 판단했다. 의료법 20조2항 남아 선호에 따라 성을 선별해 출산하는 것을 처벌하는 의료법이 만들어졌다. 헌재는 사회 변화에 따라 이 조항이 실질적인 기능을 잃고 사문화됐다고 판단했다. 이제는 태아의 성별을 알더라도 임신 중절 수술로 이어진다는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고, 전통 유교 사회의 영향인 남아 선호 사상이 확연히 쇠퇴했다는 것이 판단 이유이다. 부모가 태아의 성별을 알고자 하는 건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욕구로 이를 막는 것은 불합리하며 부모의 알 권리를 과도하게 제한하는 처사라고 보았다.
9. 여아를 선호하는 열가지 이유
외환 위기와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가계의 부담이 커졌다. 미래에 대한 불안정감도 늘어났다. 지금은 결혼을 할 때 양가가 집을 마련하는 부담을 나눠가진다고 하지만 여전히 신랑 쪽이 적어도 50% 이상의 부담을 가진다. 아들과 딸을 키웠을 때에 가성비가 떨어지는 첫번째 이유다.
정서적 유대감도 크게 작용했다. 노후에는 자녀와의 정서적인 교류가 중요한데 아들은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또 살갑지가 않아서 교류가 상대적으로 딸에 비해서 적다. 요즘 부모들은 유교 문화 시대의 효와 같은 수직적 관계보다는 친구 같은 수평적 관계를 좋아하는데 딸들이 경쟁력이 훨씬 높다.
양육의 부담 등을 얘기하는 경우도 있다. 남자 아이들이 기르기가 힘들고, 사춘기 시절에 겪는 갈등도 크고 군대와 사회등 위험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과거와 달라질 리 없지만 여성들이 맞벌이를 하면서 기회비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따라서 이것저것 따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북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김광진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원은 RFA에서 북한에도 ”아들만 있는 집은 국제 고아다“라고 하는 말로 세태를 꼬집는다고 한다. 군 복무 기간이 만 10년인데다가, 과거에는 맏아들을 ‘묘주’라고 해서 부모들이 사망하면 묘를 지켜주고 술이라도 한잔 부어주는 역할을 했는데 화장을 많이 해서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딸들은 집안 세간을 축내는 도둑놈이라고 했었지만 딸들과 함께 사는 것을 더 편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남녀 신생아의 성비 불균형의 후과가 만만치 않다. 독신남의 증가와 안티 페미니즘, 그리고 정치적 편가르기 등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남초의 시기에 태어난 남자들이 평생 미혼으로 살다가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그 수가 최소한 120만 명이 될 것으로 추산했다.
49세까지 결혼은 안하고 있으면 평생 결혼을 못하게 되는 것으로 보는 생애 미혼률이 한국 남성은 1985년 0.5%에 불과했지만 2021년 17%로 상승했고 2050년에는 30%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더들리 포스턴 미국 텍사스 A&M 주립대(사회학) 교수는 온라인 학술지 ‘컨버세이션’에 기고한 글(2024.1)에서 “1980년 부터 30년간 한국의 성비 불균형으로 인해 여아보다 남아가 약 70~80만 명 더 태어난 것으로 추산한다”며 ”한국에 곧 독신남 시한폭탄이 터진다“고 경고했다.
10. 남아 선호의 후과
미국과 유럽에서 Incel(비자발적 독신주의자 Involuntary Celibate)이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초였다. 연애 권력에서 소외된 계층들이 취미 생활에 몰두하거나 인터넷상에서 사회 불만 세력으로 발전했다. 자신들을 사회적 약자로 규정하면서 여성 혐오에 빠져들었다. 연애 시장에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각해지면서 루저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서구에서 Incel 1세대는 벌써 50대에 접어들었지만 한국에서는 M세대들 일부가 그 문화에 젖어들고 있다.
《남자의 종말》(The End of Men. 해나 로진)에서는 세계화와 금융 위기로 남자의 오랜 힘과 역할이 끝났다고 보았다. 이로 인해 가부장제는 종말을 맞았고 가모장제 사회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금융 위기 이후에 실제로 미국에서는 히세션(He-cession), 맨세션(Mancession)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남성을 의미하는 'he'에 불황을 뜻하는 'recession'을 결합시킨 조어로 남성 우위 시대가 끝났다는 뜻이다.
해나 로진은 '남성성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사회적 구성물에 불과'하며 '전투용 가면이나 갑옷의 일종'이라고 분석했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진짜 사나이’는 모두 죽었으며 과거의 남성성에 대한 향수만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남성성이 지배하던 우월적 위치를 여성성이 대신하면서 양육과 보살핌이 비남성적이라는 관념이 녹아버리고 있어서 남성성에 대한 미묘한 재정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수천 년간 아니 수만 년간 남성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지난 수십 년간 남성의 역할에 대한 변화를 강요받고 있다. 반면 여성들은 준비를 해왔다. 가부장제가 사라져가는 역사적 유물이 된 가운데 ’변화하는 여성 vs 변함 없는 남성‘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특히 한국 여성은 겨우 한 세대만에 가정 주부에서 정신없이 바쁜 슈퍼우먼이 됐다. 또는 집단적으로 결혼을 피하기 시작했다. ’공주로 대접받는 신부‘(The Princess Bride)의 꿈에서 다른 어떤 나라보다 일찍 벗어났다. 남아 선호 시대에서 자신의 어머니들을 보며 자란 영향일 수도 있다. 2010년에 한국 여성의 초혼 연령은 32세로 미국보다 6살 많다.
2030 남성들의 공격적인 안티 페미니즘 성향과 그 반대에 선 래디컬 페미니즘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한국에서 빠른 속도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페미니즘 갈등이 본격화된 2010년대 중반 시점에 2030 연령층 상당수의 남성이 인터넷 공간에서 거부감을 드러냈다. 1980~1990년대 출생자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남아 선호 사상의 피해자다. 부모들은 남아를 수혜자가 되라고 해서 선별 출생했는데, 부모의 바람과는 반대로 피해자가 되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부모들이, 특히 남성 정치인들이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것을 보면서 위선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기성 세대들은 오로지 여성들에게만 죄책감을 가지며 자기 만족을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젠더 이슈가 사회 문제에서 정치 문제로 발전하게 된 배경이다. 일부의 정치인들은 젠더 이슈를 편가르기에 이용하고, 다른 대다수의 정치인은 맥락도 모른 채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그런 무지와 무신경, 남용과 오용이 계속되는 한 시한폭탄은 더 큰 폭음과 희생을 낳을 것이다.
글 마무리에 - 마광수 교수가 27살 때 쓴 ’효도에‘라는 시를 떠올렸다. 그는 자유분망한 생각을 표현하여 사회에서 매장되고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었다. 생각과 이념을 강제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한때는 아들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고 제사가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많은 희생을 강요했다. 지금에 와서 보면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마광수 교수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실어본다.
'어머니, 전 효도라는 말이 싫어요. 제가 태어나고 싶어서 나왔나요? 어머니가 저를 낳으시고 싶어서 낳으셨나요. '낳아주신 은혜' '길러주신 은혜' 이런 이야기를 전 듣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와 전 어쩌다가 만나게 된 거지요. 그저 무슨 인연으로, 이상한 관계에서 우린 함께 살게 된 거지요. 이건 제가 어머니를 싫어한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제 생을 저주하여 당신에게 핑계 대겠다는 말이 아니에요. 전 재미있게도, 또 슬프게도 살 수 있어요. 다만 제 스스로의 운명으로 하여, 제 목숨 때문으로 하여 전 죽을 수도 살 수도 있어요. 전 당신에게 빚은 없어요, 은혜도 없어요. 우리는 서로가 어쩌다 얽혀 들어간 사이일 뿐, 한쪽이 한쪽을 얽은 건 아니니까요. 아, 어머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난 널 기르느라 이렇게 늙었다, 고생했다" 이런 말씀일랑 말아주세요. 어차피 저도 또 늙어 자식을 낳아 서로가 서로에 얽혀 살아가게 마련일 테니까요. 그러나 어머니, 전 어머니를 사랑해요. 모든 동정으로, 연민으로 이 세상 모든 살아가는 생명들에 대한 애정으로 진정 어머닐 사랑해요, 사랑해요. 어차피 우린 참 야릇한 인연으로 만났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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