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두의 K-Sapience (2)] 밥상머리는 언제 민주화되나: 디지털노마드를 위한 식탁민주주의가 모든 것의 출발점

민병두 입력 : 2024.06.14 10:50 ㅣ 수정 : 2024.07.05 16:31

전인권의 '남자의 탄생', 한 식구가 사는 가정이 어떻게 서열화되는지를 분석해
아버지의 공간은 질서를 존중하는 공적세계, 어머니의 공간은 자유로운 사적공간
아버지 밥은 하얀 쌀밥, 형과 나의 밥에는 보리가 섞였고 어머니의 밥에는 쌀이 없어
아버지 세계의 언어는 존경과 복종의 언어, 어머니 세계의 언어는 친구와 사용하는 언어
원래 식문화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열적이지 않고 공동 작업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아
산업화되면서 남성은 집밖의 노동에 집중하고 여성은 집을 관리하는 역할 분담 생겨
여성의 역사에서 부엌과 아파트가 주거양식과 문화에서 일대 혁명적 변화를 초래해
우리나라에도 토론문화 존재, 세종대왕은 신하들과 여자 노비 출산 휴가 두고 논쟁 벌여
지식도 디지털 노마드인 '아이'에게 배워야 하는 시대, 식탁에서 '아이'의 상상력을 키워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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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정무위원장을 지낸 3선 국회의원 출신 민병두 보험연수원장이 한국인에 대한 예리하고도 심층적인 분석을 담은 '민병두의 K-Sapience'를 연재합니다. 문화일보 워싱턴 특파원과 정치부장으로 필력을 떨쳤던 언론인이기도 한 민 원장은 K컬처와 K푸드로 세계인을 열광시키고 있는 한국인을 'K-Sapience'라고 규정하고 그 내밀한 세계를 종횡무진 그려낼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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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는 지난 해 가부장제문화를 한국 저출산의 원인이라고 보도하면서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듯한 한국 여성들의 헤어롤은 남성이 만들어놓은 세상에 대한 '반항'의 상징이라고 해석했다. 사진은 '코리에레 델라 세라' 트위터 캡처. [사진=연합뉴스]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내 친구 전인권과 나와는 성장 배경이 비슷하다. 1957년생인 그는 강원도 철원에서, 1958년생인 나는 횡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학에 들어오면서 서울 생활을 했고, 나는 이농을 하는 부모를 따라 일곱살에 서울에 왔지만 비슷한 시대를 살았다. 그가 ‘남자의 탄생’(대한출판문화협회 2003 올해의 책에 선정)을 냈을 때 나는 얘기를 구수하게 풀어가는 그의 힘에 빠져들었다.

 

그는 소년 시절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관찰하면서 어떻게 한 식구가 사는 가정이 서열화되는지를 분석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 - 어머니 - 아들 남자 - 여자 딸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위계화되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야기는 1960년대 시골의 중산층 가옥구조에서 시작한다. 주로 어머니와 딸들이 기거하는 아궁이와 찬장이 있는 부엌과 그리고 바로 이어져 있는 안방, 그 중에서도 아랫목의 아버지 공간이  어떻게 긴장하고 공존하며 사는지를 보여준다.

 

“아버지는 물건 정리같은 시시콜콜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래도 족보를 본 후에는 깔끔하게 제자리에 올려놓았다. 같은 안방을 쓰지만 아랫목의 아버지 공간과 윗목의 어머니 공간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다. 아버지의 공간에는 신문 잡지 같은 것이 널부러져 있었고, 어머니의 공간에는 바느질 도구와 요강 같은 것이 있었다.

 

아버지는 위엄이 있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위치는 기독교로 치면 하느님의 위치 같았다. 질서를 대표하는 모습이었다. 완전한 존재였고 성스러움 그 자체였다. 아버지의 공간은 제사를 올리는 지성소라고 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공간은 공적세계였고, 어머니의 공간은 사적세계였다. 아버지의 공간은 질서를 존중했다. 어머니의 공간은 자유로움이었다”(정확한 인용이 아니라 편의적이고 압축적인 인용. 이하 같음)

 

사실 지금의 베이비부머, 즉 1950년대생들은 비슷한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1920~1930년대에 태어난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세대들의 세계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전인권의 관찰은 충분한 공감을 불러 일으킬 만하다. 나의 아버지도 늘 그랬다. 종친회에서 새 족보를 발행했다는 연락이 오면 적지 않은 돈을 들여 구입을 하고, 돋보기로 몇 번이고 일가 친척 명단을 확인을 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가족은 아버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고, 족보는 아버지의 역사책이었다. 아버지의 세계는 제사장의 세계다. 6.25전쟁 때 돌아가신 할머니의 사진을 장독대 밑에 땅을 파서 보관하고 피난을 다녀왔기에 영정사진을 놓고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자식들이, 나아가서 손자들이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제사 때만 되면 긴 시간을 반복적으로 회고했다. 아버지는 먼 조상 으로부터 내려오는 가족의 기억과 정신, 특히 당신의 효심을 아들, 손자에게 물려주고 싶어했다.

 

“남자들은 격식이 갖춰진 네모난 밥상에서 밥을 먹었고, 여자들은 상다리가 한 개 부러진 두리반 밥상(소반 교자상)에서 밥을 먹었다. 남자들의 밥상은 아버지부터 서열대로 공기에 밥을 퍼서 차려졌고, 여자들은 커다란 그릇(함지박)에서 다같이 밥을 퍼먹었다.

 

밥을 푸는 순서도 정해져 있었다. 아버지 - 형 - 나 - 남동생의 순서로 남자들의 밥을 먼저 푸고, 그 다음 누나와 여동생, 어머니가 마지막이었다. 아버지 밥은 순백의 하얀 쌀밥, 형과 나의 밥에는 보리가 조금 섞였고 어머니의 밥에는 쌀이 거의 섞이지 않았다. 

 

우리집 밥상에는 엄격한 질서가 있었고, 아버지는 밥상에서 가장 깍듯한 권위를 누렸다. 우리집 식사는 밥상의 주재자인 아버지가 맨 마지막으로 입석하여 수저를 들면서 “자, 먹자”라고 선언했을 때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러면 형, 그 다음 나, 또 그 다음은 바로 밑의 남동생이 수저를 들고 국그릇에 손을 댔다. 그렇게 밥상의 질서를 지키고 격식을 차린다는 것은  우리 식구들이 도덕적이며 사람답게 사는 격식을 지킨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질서를 사랑했다. 

 

형은 중학생이 되자 자신의 방을 갖게 됐지만 형의 지위는 계속 안방에 남아 있었다. 밥을 먹을 때 형은 네모난 밥상에서 아버지 건너편에 앉았다. 그 자리는 우리집 2인자가 앉는 자리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만 서열화된 것은 아니었다. 남자 형제들과 여자 자매들도 차등화되었다. 집집마다 기억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이같은 풍경은 1970~1980년대까지 계속됐다. 수천년 동안 주택의 지배종이었던 기와집과 초가집이 아파트, 연립주택 등 공동주택과 양옥으로 대체될 때까지 이같은 식문화는 이어져왔다.

 

1964년 우리가 서울에 처음 이사와서 살던 만리동 집의 가옥구조는 이랬다. 길가에 할아버지가 머무르는 가장 큰 방이 있었고, 초등학교를 다니던 아들 삼형제는 그 다음에 있는 방에서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리고 좀도둑이 가끔 드나들던 재래식 부엌이 있었고 그 다음 가장 안쪽에 누나 셋이 기거하는 방이 있었다. 이층에 있는 방 하나는 세를 주었고 옆에는 장독대가 있었다. 아마도 해방 후에 지어진 문화주택 같은 유형이었을 것이다(해방 후 주택개량사업의 역사는 1단계 일본을 통해서 들어 온 서양식 주택 스타일의 문화주택, 2단계 중산층 아파트. 지방에서는 새마을운동으로 불리우는 주택개량사업인데 1단계에서는 초가집을 슬레트 지붕으로 바꾼 뒤, 2단계에 가서는 부엌을 개량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1975년에 고향인 강원도 횡성에 농촌활동을 가서 2주일에 걸쳐 공중목욕탕(남탕과 여탕을 하루씩 교대)을 지었는데 동네 분들이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른다. 당시로서는 위생 문제를 국가와 민간이 나서서 해결해야 했는데 1980년대까지 이어진 과제였다).

 

부엌과 안방을 구분하는 구조 하에서는 이 같은 식사의 위계문화를 개선하기 힘들다. 아마도 성리학이 지배적이었던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관습이었을 것이다. 인류가 조리를 하고 잔치를 하면서부터는 식사의 위계 문화도 함께 생성되었을 테니까 위계의 역사는 더 오래됐을지도 모른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할아버지는 그 큰방에서 독상을 받았다. 이것은 ‘가장권’의 표시다. 조선시대 양반집에서는 집안의 가장 어르신이 독상을 받고, 나머지 식구들이 겸상을 하거나 아들과 딸들의 식사가 분리되었다.

 

내 어릴적의 기억으로는 아버지가 지방에서 근무하셔서 한달에 한번 정도 들르는데 어머니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루 세끼 아버지가 드실 밥을 사기 그릇에 담았다. 한 겨울에는 식지 않도록 아랫목에  놓고 이불을 덮었다. 지어미로서의 도리를 다한 것이다. 아버지가 가끔 주말을 이용하여 서울에 들르면, 할아버지방에 가서 큰 절을 올린 후 무릎을 끓고 장시간 안부를 묻는 의례의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식사시간이 되면 아버지와 남자 삼형제가 같은 상에 앉는다. 평소에 없던 고기가 찌개에 올라와서 어린 형제들이 먼저 먹으려고 하면, 어머니가 혼을 내셨다. 아버지가 먼저 숟가락을 드신 다음에 찌개에 숟가락을 얹으라고 하시는데, 정작 아버지는 “나는 밖에서 자주 먹으니 너희들이나 먹으라”고 했다. 식사 후에는 어머니가 아들들의 공부 성적 등에 대한 장황한 보고를 했던 것 같고, 아버지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내가 ‘남자의 탄생’에서 특히 주목하는 것은  특히 이 구절이다. “나는 두 가지의 언어를 배웠다. 하나는 존대말이고 하나는 반말이었다. 전혀 다른 언어체계를 갖춘 외국어 같았다. 아버지 세계의 언어는 선생님 상사 선배 공무원 손님들을 상대할 때 쓰는 존경과 복종의 언어였다. 어머니 세계의 언어는 형 동생 친구 후배 부하들과 사용할 때 사용했다.” 전자는 형식언어였고 후자는 자유언어였다.

 

가정은 식사공동체이다. 경제공동체보다는 좁은 개념이지만 경제 생활을 함께 하는 것을 포함하여 집안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함께 한다. 식사는 그 지역의 기후와 토지와 산과 강, 그리고 시대의 산물이다. 인간이 조리하는 동물로 발전하면서부터, 가장 가까운 환경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밥상을 차렸다. 밥과 찬에는 역사가 만들어지고 지역의 문화가 형성된다. 그러면서 식생활에서 위계가 형성된다. 

 

식사하는 장소에는 권력과 정치가 개입한다. 외국에서 사절이 왔을 때, 누가 어느 위치에 앉고 어느 정도를 대접하는가가 중요하다. 국내정치에서도 식사에 늘 정치가 개입한다. 정파, 계보라는 것이 알고보면 식사를 함께 하는 무리이다. 나라의 식사에서는 왕권이 보이고, 가정의 식사에서는 가장권이 보인다. 사람은 태어나서 어머니의 젖을 먹으면서 자란다. 아이들의 식탁이 무릎이다. 그래서 슬하에서 큰다고 한다.

 

젖을 뗀 후에 자리잡는 것이 식탁이다. 여기서부터 집안의 내력, 동네의 대소사, 나라에 대한 걱정이 이어진다. 우리나라 식탁에서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예의였고, 가능한 한 빨리 식사를 마무리했다고 한다. 이것은 상호간의 대화가 없었다는 것이지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수직적 대화가 없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남자의 식탁‘에서 말하는 수직의 언어들을 밥상머리에서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부터 식문화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열적이지는 않았으며 공동으로 작업을 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조선시대 왕의 수라(밥상)를 담당하는 수라간에는 400여 명이 근무를 했는데 종9품의 조리사와 각각의 요리를 담당하는 각색장은 모두 남자였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도 유교경전 ’맹자‘에서 맹자가 제선왕과 대화하면서 “군자원포주”(군자는 푸줏간과 부엌을 멀리해야 한다)고 답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조선 후기에 유교가 완전히 사상적인 지배를 하면서 맹자의 말을 왜곡했다. 양반가와 서민층까지 남성의 부엌 출입을 금지했고,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 물을 묻히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는 관습이 시작되었다. 심지어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고추가 떨어진다“는 말이 생겨났다.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시어머니가 아들 집에 들렸다가 아들이 주방을 들락날락하는 것을 보고  혼을 내는 일이 이어졌다.

 

서양은 어떠했을까. 밀레의 그림 중에 ‘이삭줍기’를 보면 여성 셋이 그 일을 한다. 대표작인 ‘만종’에서는  농부 부부가 하루 농사일을 끝내고 삼종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서양미술사에서 처음으로 농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밀레 뿐만 아니라 다른 화가들의 풍속화를 보더라도 남녀가 바깥일도 집안일도 함께 한 것을 알 수 있다. 산업혁명은 유럽에서 남녀가 일을 분화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부엌의 여성성이야말로 현대인의 선택적 기억이다. 산업혁명 이전에 집의 안과 밖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집은 휴식처이자 일터다. 가족 노동에 안과 밖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남성이 밭일을 하거나 가축을 돌보고 여성들이 요리와 청소, 세탁, 육아를 맡았지만 여성도 밭에서 남성을 돕고 남성도 집안일을 도왔다”(근대부엌의 탄생과 이면. 도연정 지음. 제11회 심원건축학술상 수상작)

 

산업화가 되면서 가족의 생활양식과 역할 분담에 변경이 생겼다. 남성은 집밖의 노동에 집중하여 재화를 획득하는 것이 그들의 몫이었으며 여성은 집을 관리하는 역할 분담이 생겼다. 도연정의 ‘근대부엌의 탄생과 이며’을 보면 가사노동은 재화를 생산하지 못하는 무가치한 노동이라는 생각도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옥스포드 영어사전에서 영국은 1841년에, 미국은 1871년에 가사노동(housework)이라는 말이 등재됐고, 영국의 인구조사에서는 1851년에 주부(housewife)라는 항목이 새롭게 도입되는 등 19세기 중엽에 와서 집안일과 밖의 일이 구분되었다.

 

가정성(home, sweet home) 즉 집안 일을 담당하는 여성에게 가정을 성실하게 유지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강요가 생겼고 가정은 도덕적이고 선한 것이라는 의식이 형성되었다. 이런 흐름을 바탕으로 해서 미국에서는 1883년에 <Ladie’s Home Journal>이라는 여성잡지가 발간되었고 "미국 가정의 바이블"이라고 광고를 했으며 아름다움이란 강력한 힘이라고 강조했다. 

 

가구에 대한 관심도 여성 위주로 변화했다. 19세기만 해도 미국의 부엌은 대부분 지하에 있었다. 동양에서처럼 미국과 유럽도 부엌과 식당에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집에서 테이블, 요리 재료, 도구, 싱크대, 식당 등이 서로 머리 떨어져 있었다. 침침한 지하에서 밝고 위생적인 지상으로 올라온 것도 여성들이 집안일을 전업화하면서 편리성을 추구해온 것의 결과물이다.

 

미국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1880년에는 취업여성의 절반이 하녀였는데, 1890년에는 31.1% 그리고 1920년에는 11.8%로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중산층 여성의 입장에서는 정체성의 위기였고, 명칭도 '하녀(servant girl)'에서 '청소하는 숙녀(cleaning lady)'라고 할 정도로 하인 구인난이었다. 때맞춰서 가전제품 광고가 등장했다. '하인 대신에 전기를 부릴 수 있다, 전기하인(electrical servant)' 같은 문구가 나왔다. 산업현장에 취업하기 시작한 여성에게 변화가 필요했다.

 

1926년 독일공작연맹이 '바이센호프 지들룽(Weissenhof siedlung)'이라는 새로운 주거 형태를 선보이면서 부엌의 현대화 역사가 시작된다. 기차의 식당 칸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 여성의 요리 노동 시간을 줄이고 동선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근접 거리에 모든 것을 배치했다. 이것이 '프랑크푸르트 부엌'의 시작이자 현대 부엌의 모태다. 주방이 집의 중심이 되는 혁명이 시작됐다. 프랑크푸르트의 주거 단지 사업에 맞춰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성 건축가 마가레테 슈테-리호츠키(Margarete Schuette-Lihotzky, 1897~2000)가 설계했다. 그는 '부엌(주방) 건축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1938년에는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침략에 맞서 저항운동을 하기도 했으며 1940년에 독일군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세계 평화운동을 위한 공로상 등을 받았다.

 

기존 부엌의 크기를 대폭 축소했다. 주부가 수납장에서 도구를 꺼내고 가스레인지에서 요리를 하고 그릇에 음식을 담고 식탁에 가져가는 일련의 활동과 그에 따른 동선의 길이를 연구했다. 주부가 가장 짧은 거리를 움직이고 가장 효율적으로 공간을 활용하도록 가스레인지와 개수대, 식기건조대, 수납장의 위치를 결정했다. 주택의 부엌도 열차 내의 부엌처럼 기능성을 최대한 높여 6.5㎡ 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갖추어진 일체형 표준 설비를 갖추고자 했다. 

 

“가정에서 일하는 여성이 요리 이외의 새로운 삶을 기대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여성은 더 이상 가족의 순교자가 아니다. 그들이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행복하다, 인생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건축예술이다”(르 꼬르뷔지에) 

 

주방의 얘기가 길어졌는데 주방의 변화는 가족 구성원들의 관계의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이전에 유럽에서는 집안의 식당도 철저히 위계와 질서를 반영했다. 등받이와 팔걸이도 차등화되었다. 직육면체의 긴 식탁에서 가장은 한쪽 끝에 앉아서 식사 자리의 대화를 주재했다. 심지어 부부간에도 긴 식탁에 멀리 마주 앉아서 식사를 했다. 현대식 다이닝룸이 들어서면서 가족들은 평등하고 자유롭게 대화를 할 수 있는 구조를 갖게 되었다. 식탁이 있는 통합된 주방이 도입되면서 변화가 생겼다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와 보자.  도연정의 책에서는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부엌의 변천사를 잘 담고 있다. 서양의 변화는 일본을 통해 조선에도 유입되었다. '주택은 생활을 담은 그릇'(주택은 인생의 그릇이요, 생활의 용기-김윤기 [주택] 창간사 1959)이라는 생각을 갖고 민간 차원에서 주택의 개선을 통한  식생활, 의생활의 개선 움직임이 있었다. 위생적으로 전통 가옥의 주방과 변소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주택 개선은 일제가 식민지 황국신민을 길러내기 위한  군국의 어머니상을 강조하는 일환으로 진행되었고 조선 인민의 생활을 개선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가 아니었다.

 

이승만 정부 들어서는 국가 차원에서 부엌 개량 운동을 전개했다. 1950년대의 신생활운동은 가정 개조를 강조하는 신현모양처에 기초한 계몽운동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 "한국 부엌은 과학적이지 못하며 부엌을 바꾸면 주부가 평생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을 아껴 교양과 여가시간에 활용할 수 있다", "부엌이 고통스러운 노동의 장소가 아니라 주부들이 흥미와 쾌락을 가질 수 있는 연구실이며 실습실이 되도록 하자"는  생각은 현대판 현모양처론으로 연결된다.

 

미군정에서 신설된 부녀국의 ‘새살림’ (1947년 1월부터 1949년 7월까지 총 12호까지 발행) 7호를 보면 “수많은 여성들이 남성의 노예라기보다는 부엌의 노예로서 한참 즐겨야 할 시기의 태반을, 아니 전 생애를 부엌에서 왔다갔다 하는 낭비와 세탁과 밥짓기로 보내는 비극적인 운명을 되풀이하고 있다. 부엌은 어디까지나 주부들의 흥미와 쾌락을 가지고 연구할 수 있는 연구실이며 실습실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현실화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는 아파트가 주택난의 해법이라는 생각을 갖고 정책을 밀어부쳤다. 그러나 장독대, 변소가 어떻게 안방, 마루, 부엌과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느냐는 생각의 저항에서부터 부실공사로 인한 붕괴 사건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1970년대 들어서 동부이촌동, 여의도동, 압구정동 아파트가 인기몰이를 하면서 아파트가 주택의 대세가 되었고 이와 함께 입실부엌, 시스템 키친이 보편화되었다

 

아파트가 바꾼 것은 스카이라인 뿐만이 아니다. 여성들의 지위 향상에는 아파트 투기도 한몫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부동산은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에서 작가 최시현은 복부인으로 불리우는 여성들이 주택으로 발생한 소득 신장을 통해 발언권을 키웠다고 본다. 또 주부들이 잦은 도난사고 걱정에서 자유로와 지면서 다양한 활동이 가능해져 여성권 신장에도 기여했다고 보는 분석이 있다.

 

여성의 역사에서 부엌과 아파트가 갖는 비중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어쨌든 주거양식과 문화에서 일대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만은 사실이다. 아파트에서는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가족의 구성이 바뀌었고 따라서 위계질서도 완화되었다. 마침 다자녀 가정에서 한 두명만 낳아서 키우는 문화로 바뀌면서 남녀의 차별도 줄어들었다. 당연히 식탁의 대화도 민주적이 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었다. 밥상머리 교육 문화도 바뀔 수 밖에 없었다.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대화 구조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았다. 아버님 어머님 진지드셨습니까 같은 인사말이 아빠 엄마 밥 먹었어로 변화했다.

 

밥상머리 교육하면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이 유태인의 질문 문화다. 그들은 안식일 전날 가족들이 모두 모여서 '마따호세프(네 생각은 어때?)'라고 묻는 토론을 하고, 평일에는 아이들이 학교에 다녀오면 “오늘 선생님에게 무슨 질문을 했니”라고 묻는다고 한다. 질문의 크기가 답의 크기를 결정하며, 토론이 생각을 정립한다. 그래서 노벨상 수상자가 가장 많이 나오고 미국경제를 움직이는 바탕이 됐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미국의 대표적인 정치 명문가인 케네디가에서도 식사시간이 토론시간이었다고 한다. 케네디 대통령은 “내가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게 된 것은 순전히 밥상머리 교육의 덕분”이라고 회고했다. 톨스토이 가문도 4대에 걸쳐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 일기를 쓰는 문화와 전통을 유지했다. 톨스토이는 “일기는 자신을 관찰하고 성찰하며 깨달음과 통찰력을 키워주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라고 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질문과 토론 문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세종대왕은 부임하자마자 신하들과 함께 의논할 것을 제안했고, 공부 모임인 경연을 수시로 열었다. 한번은 여자 노비에게 출산 전 30일, 출산 후 100일 휴가를 주는 안을 갖고 토론을 했다. 신하들은 그렇게 하면 여자 노비를 대신할 일꾼을 어떻게 구하나며 반발했다. 세종은 하나 하나 반문을 하며 토론을 이어갔다.

 

출산 직후에도 노비에게 일을 시키면 몸이 약해져서 죽지 않느냐, 휴가를 주면 몸을 회복해서 오랫동안 일을 시킬 수 있고 아이도 건강하게 자라나게 되어서 노비가 늘어나게 된다고 반박했다. 또 계속되는 토론에서 산모가 죽으면 누가 아이를 돌보는가, 아이도 곧 죽지 않게 되겠는가라고 조목조목 반론을 폈다고 한다. 마지막에는 경들이 ‘임금은 만백성의 아버지’라고 하는데 노비를 돌보는 것이 아버지의 도리 아니냐고 반박했다고 한다.

 

세종의 예는 밥상머리 교육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국가의 공무를 다루는 가운데서 벌어진 토론의 예이다. 세종이 성군으로 불리우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 문화에서도 질문과 수평적 토론이 있었다는 예로 거론된다. 하지만 성리학이 지배를 하면서 사라졌든, 일제강점기와  군사정부의 병영문화로 쇠퇴를 했든 토론문화가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미래세대에게는 그런 유산을 넘겨줄 수는 없다. 위계질서를 지탱하는 부엌과 식탁의 하드웨어는 바뀌었는데 실질적인 식탁의 민주화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밥상머리의 민주화는 아이들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넘겨주는데서 시작한다.

 

내가 아는 지인은 집에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무서운 얘기, 재미있는 얘기를 하는 게임을 했다. 아이들이 먼저 얘기를 만들기는 힘드니 아빠가 엉성하게나마 얘기를 만들면 아이들이 살을 보태는 식의 답을 하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식이었다. 애들이 나이가 들어서는 토론을 즐겨했다. 요즘은 아이들이 훈계를 하면 대화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들어주는 것이 가족간의 대화가 이어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세대의 문화와 기억을 전통이라며 아이들에게 전승하기에는 시대의 변화가 너무 빠르다. 요즘은 지식도 디지털 노마드인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 농경시대에는 집안의 어르신이 언제 파종을 하고 언제 이앙을 해야 하는지 오랜 경험으로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노인이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사서삼경 같은 교과서가 개정판도 없이 이천년 가까이 내려왔다. 암기와 지식의 시대가 아니다. 검색과 모색의 시대라고 하는데 이제 그것도 옛날 말인지 모른다. 아이들의 꿈을 높게 하고 도전을 주저하지 않으며 상상을 하게 하는 것이 지금의 식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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