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행적 '손실 돌려막기' 철퇴내린 당국…증권가 '발등에 불’
[뉴스투데이=임종우 기자] 금융당국이 증권가에서 관행적으로 이뤄지던 랩어카운트(랩) 및 특정금전신탁(신탁) 상품 ‘돌려막기’를 다수 적발하고 관련자들의 징계를 예고했다.
그동안 증권사들은 대형법인 고객을 놓치지 않기 위해 사전에 제시한 목표 수익률을 맞추고자 증권사들끼리 채권을 자전거래 하는 등 이른바 ‘짬짜미’ 거래를 진행한다는 논란이 제시돼왔는데, 당국이 문제 소지가 있는 관행을 개선하기로 나선 것이다.
일부 증권사들은 당국이 적발 사항을 발표하기 이전 고객들의 배상에 나선 가운데, 다른 증권사들도 배상 규모와 시기 등으로 고심하고 있는 상황이다.
■ 6000건 이상 자전거래로 5000억원 손실 전가…대표이사가 승인하기도
20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이달 금융감독원은 지난 5월부터 최근까지 실시한 채권형 랩·신탁 업무실태에 대한 집중 점검 결과를 발표했다. 금감원은 9개 증권사(KB·하나·미래에셋·NH·한국투자·키움·교보·유진·SK)를 대상으로 벌인 해당 점검에서 모든 점검 대상에 대해 랩·신탁 업무처리 관련 위법사항 및 리스크 관리 내부통제상 다수의 문제점이 잠정적으로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적발된 사례는 대체로 고객 계좌의 손실을 불법 자전거래로 다른 고객의 계좌에 전가하거나, 고객 투자 손실을 증권사 고유자산으로 보전해주는 등 중대한 위법 사안들이었다. 또 랩·신탁 운용 과정에서 리스크 관리 및 이상가격 거래 등에 대한 내부통제를 소홀히 한 부분도 드러났다.
채권형 랩 및 신탁은 증권사가 고객과의 일대일 계약을 통해 자산을 운용하는 금융상품으로, 다수 고객자산을 집합 운용하는 펀드와 달리 개별 고객의 투자목적과 자금수요를 감안한 ‘단독 운용’이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어 법인고객의 단기자금 운용수단으로 선호돼 왔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 자금시장 경색으로 다수 법인고객들이 가입 중이던 채권형 랩·신탁의 환매를 요청했을 때 CP(기업어음) 등 편입자산의 시장 매도가 어려워지면서 환매가 중단 및 지연됐고, 이 과정에서 일부 증권사가 고객 투자손실을 회사 고유자산으로 보전해줬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등 시장 불신이 퍼져나갔다.
실제로 이번 금감원 조사에선 △제삼자 이익도모 △사후 이익제공 △계약조건 위배 △동일 투자자 계좌 간 자전거래 △OEM펀드(증권사가 운용사에 요청해 만드는 펀드) 등 다수 위법행위 사례가 적발됐다.
우선 랩·신탁 운용 시 특정 투자자의 이익일 해하면서 자기 또는 제삼자의 이익을 도모해선 안 되지만, 일부 운용역은 만기도래 계좌의 목표수익률 달성을 위해 불법 자전거래로 고객계좌 간 손익을 이전했다.
A증권사의 경우 지난해 7월 이후 다른 증권사와 총 6000회가 넘는 연계·교체거래를 통해 특정고객 계좌의 CP를 다른 고객 계좌로 고가 매도하면서 약 5000억원 규모의 손실을 고객간에 전가했다.
또 금융투자업자는 원칙적으로 투자자에게 일정 이익을 사후 제공해선 안 되지만, 시장상황 변동으로 랩·신탁 만기 목표 수익률을 달성하기 어려워진 일부 증권사가 대표이사 등 주요 경영진의 결정하에 고객 계좌 CP를 고가 매수하는 방식으로 이익을 제공했다.
B증권사는 다른 증권사에 가입한 특정금전신탁을 통해 지난해 11~12월 고객 랩·신탁의 CP 등을 고가 매수해주는 방식으로 총 1100억원 규모의 이익을 제공했다. C증권사도 자사 설정 펀드를 통해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5월까지 같은 방식으로 총 700억원 규모의 이익을 지급했다.
이외에도 몇몇 증권사는 고객과 계약으로 정한 편압자산의 잔존만기·신용등급 등을 위반했거나, 목표 수익률 달성을 위해 동일 투자자의 랩 계좌간 위법 자전거래를 했다. 또 고객자산 손실을 보전하고자 고유자금으로 펀드를 설정하고 특정 채권 및 CP를 고가 매수하도록 요청하는 등 펀드 운용에 관여하기도 했다.
■ 금감원 “올바른 시장질서 정착해야”…업계 ‘사적 화해·적극 소명’ 고심
금감원은 올바른 랩·신탁 시장질서를 정착하기 위해 증권업계의 개선 노력과 투자자 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증권업계에 “고객자산 운용시 고유자산 운용에 준하는 충실한 리스크 관리가 필요하고, 거래가격 등에 대한 내부통제가 강화돼야 한다”며 “랩·신탁을 확정금리형 상품처럼 판매·운용하고 환매 시 원금 및 수익률을 보장하는 잘못된 관행은 근절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투자자들에게는 “랩·신탁은 실적배당상품이므로 증권사에 과도한 목표 수익률 제시를 요구하거나 이를 신뢰해선 안 된다”며 “투자손실 보전 또는 목표수익률 보장을 요구하는 행위는 투자자 자기책임원칙에 반하는 행위로, 법상 허용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금감원은 이번 검사 결과 확인된 위법행위를 신속 조치해 랩·신탁 시장 질서를 확립하고, 운용상 위법행위로 손실이 발생한 랩·신탁 계좌에 대해선 금융투자협회와 증권업계가 협의해 객관적 가격 산정 및 적법 손배 절차 등으로 환매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금감원 적발 이후 증권업계는 자체 위법 규모를 측정하면서 수습 과정을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다. 금감원이 이번에 검사한 랩·신탁 고객들은 대부분 여유자금을 유치한 법인으로 알려지면서, 위법 수준이 중대하지 않고 금액이 적다면 당국 제재 이전에 선제적으로 움직여 회사 대 회사 차원으로 해결하는 것이 리스크를 털고 가기에 좋은 상황이어서다.
실제로 SK증권은 올해 초 선제적으로 사적화해를 마치고 1월부터는 해당 상품 판매를 중단했다. NH투자증권도 지난 9월부터 자율 배상을 실시해 현재 마무리했으며, 금액도 비교적 작은 100억원대 수준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위반 규모가 큰 경우 적극 소명에 나서면서 혐의를 최대한 줄여나가는 전략을 취할 수도 있다. 배상 규모의 부담도 큰 데다가, 선제 배상 시 막대한 규모의 위법을 인정하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어서다.
증권업계의 한 관계자는 “앞서 사적화해를 마무리 한 증권사가 있던 것처럼, 금액이 작은 곳들은 일이 더 확대되기 전에 합의하고 마무리하려고 할 것”이라며 “위법 규모가 큰 증권사들은 문제가 커졌는데, 일단 분위기를 지켜보겠다는 양상이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사실상 묵인되던 채권 돌려막기에 대해 당국이 칼을 빼든 첫 사례인 만큼, 향후 신뢰 제고를 위해 또 다른 관행적 문제도 있을지 지켜볼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학계 전문가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검사 대상 증권사에서 다수 적발 사례가 나왔다는 것은 좋지 않은 관행이 업계 전반적으로 퍼졌다는 것을 시사한다”며 “소위 돌려막기도 사실상 묵인돼 오던 영업행위인데, 이렇게 되면 당국이 다른 관행이 있는지도 지적할 것이라는 긴장감이 강화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증권업계는 추가 적발 이전에 다른 기존 시스템에도 문제가 있는 지 여부를 자체 판단할 필요가 생겼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