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195)] 군생활 포기까지 생각했던 재활의 시련③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입력 : 2023.07.03 19:11 ㅣ 수정 : 2023.07.03 19:11

거구의 외국인 선수를 호쾌하게 링에다 내리꽂는 프로레슬러 김일을 보며 어려운 형편을 잠시나마 잊고 환호성을 질러
박준영 을지재단 회장, "나라를 위해 병역 의무를 성실히 이행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분위기 조성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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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링 경기에서 호쾌한 승리 후에 챔피언 벨트를 차는 전성기의 고(故) 김일 선수 모습과 그의 영정사진 [사진=을지병원]

 

[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레슬링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60~70년대에는 경기가 있는 날이면 동네마다 흑백TV나 라디오가 있는 집이나 주변 만화가게로 주민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그곳에 합류했던 필자를 포함해 흑백TV를 시청하던 국민들은 거구의 외국인 선수를 호쾌하게 링에다 내리꽂는 한국 프로레슬러를 보며 어려운 형편을 잠시나마 잊고 환호성을 질렀다. 특히 일본 선수들과 경기일 경우 그 함성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 환호성 가운데는 국민 영웅으로 불리던 '박치기왕' 김일이 있었다. 이후 프로레슬링이 쇠락의 길을 걸으면서 기억 속에서 '김일'이라는 이름은 잊혀져갔지만,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김일'은 영원한 영웅으로 남아있다.

 

헌데 을지병원 복도에서 재활치료를 위해 열심히 걷고 있는 필자의 바로 눈앞에 그 김일 선수가 환자복을 입어 약간은 초췌해 보였지만 아직도 건장해 보이는 모습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어린시절 국민적 영웅이었던 김일 선수를 직접 만났고, 그가 재활치료 중인 필자를 스쳐간 것에 흥분하며 걷는 다리에 힘이 더 들어갔다.

 

김일은 평소 당뇨합병증, 고혈압, 심부전 등의 지병을 앓아왔고, 필자가 을지병원에 입원했던 1994년부터 병원 4층에 병실을 무료로 제공받고 치료를 받아왔다. 박치기 하나로 시대를 풍미했던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는 결국2006년 10월26일 낮 12시17분 서울 하계동 을지병원에서 향년 77세로 별세했다. 

 

13년 동안 치료를 받아왔던 을지병원에서도 김일은 영웅이었다. 당시 김중봉 을지병원 원무부장은 “다른 환자나 문병객들이 그분을 보려고 병실을 방문해 사인을 받아갔다”고 말했다. 

 

스타의 입원을 미리 알고 있었던 다른 병실의 환자들도 그 분위기에 동참했다. 이들뿐 아니다. 어린 시절의 꿈과 희망이었던 별이 진 것에 많은 이들이 명복을 빌었다. 그해 10월28일 오후 경기도 벽제에서 화장한 뒤, 유골은 고향인 전남 고흥에 안치됐다. 허나 많은 이들이 김일 선수에게 프로레슬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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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의 김일 선수와 영정사진, 전남 고흥에 위치한 '김일기념체육관' 앞의 김일 동상을 찾은 이왕표 한국프로레슬링 연맹 대표 모습[사진=고흥군]

 

김일 선수, 건강 호전돼 후진 양성의 의욕을 보였지만, 결국 2006년 서울 하계동 을지병원에서 영면

 

김일 선수는 1929년 전남 고흥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0센티미터의 건장한 체격과 괴력을 갖고 있던 김일의 운명은 어느날 우연히 일본 잡지에 실린 역도산의 기사를 보고 바뀐다. 씨름에서는 천하장사였던 김일은 프로레슬링으로 이름을 떨치겠다고 결심했다. 

 

부모도, 16살 때 결혼한 아내도 모르게 씨름판에서 모은 자금을 복대에 차고 일본행 배를 탔다. 그러나 김일의 일본행은 순탄치 않았다. 불법체류자로 체포돼 1년형을 살았다. 그는 1년간 역도산에게 편지를 지속적으로 보냈고, 역도산은 얼굴도 모르는 김일의 신원을 보증하고 그를 감옥에서 구해냈다. 

 

이어 1957년 김일은 역도산체육관에 1기로 입문하면서 프로레슬링을 시작했다. ‘오오키 긴타로’라는 일본명은 프로레슬러로서의 첫 이름이었다. 이후 김일은 가난하던 1960년대 서민들의 위안이자 청소년들의 영웅이었다. 

 

온갖 반칙에 코너에 몰리다가 위기의 극단에서 박치기 일격으로 상대 선수를 제압하는 모습, 무엇보다도 일본인 안토니오 이노키와의 대결에서 선보인 박치기는 많은 시청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줬다. 호랑이 모습의 삿갓과 곰방대가 그려진 가운을 입고 일본 프로레슬러들을 상대로 싸우는 장면은 TV앞의 시청자들을 열광시켰다.

 

김일이 세계 챔피언에 오른 해는 1963년이었다. 선천적으로 단단한 이마를 앞세워 미국 로스앤젤리스에서 세계프로레슬링협회(WWA) 대회에서 세계태그챔피언에 등극했다. 그러나 같은 해 스승 역도산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고국으로 돌아와 대한프로레슬링협회를 설립했다. 

 

1964년 북아메리카 태그챔피언, 1965년 극동 헤비급 챔피언, 1966년 올아시아 챔피언, 1967년 세계헤비급 챔피언 등 무수한 챔피언 벨트를 손에 넣으며 승승장구했다. 1972년 도쿄 대회에서 마지막으로 세계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며 1970년 중반까지 세계 프로레슬링을 휘어잡은 김일은 프로레슬링 인기가 몰락하면서 은퇴했다. 

 

은퇴 이후 김일에 대한 소식은 이런저런 투병 소식이 대부분이었다. 사업가로 변신은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선수생활에서 얻은 후유증이 김일을 괴롭혔다. 1994년에 국민훈장 석류장, 2000년에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기도 했다. 

 

최초 은퇴한 것은 1970년대였지만, 은퇴식은 그때 한 번이 아니었다. 일본 신문기자단은 1995년 도쿄돔에서 김일의 은퇴식을 다시 마련해주었고, 한국에서도 대한체육회가 2000년 장충체육관에서 은퇴식을 거행했다. 

 

이후 건강이 호전돼 후진을 양성하겠다는 의욕을 보였지만, 결장 제거수술 이후 운신에도 어려움을 겪었으며 결국 2006년 10월26일 서울 하계동 을지병원에서 영면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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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남침전쟁중에 만나 결혼한 을지병원 설립자 박영하 박사와 아내 전증희 여사의 당시 군복입은 모습과 생전 을지재단 회장시 고(故) 박영하 박사의 모습[사진=을지재단] 

 

박 회장 부자(父子), ‘인간사랑 생명존중’과 “제복을 입고 병역의무를 다하는 사람을 존중하고 예우하겠다”는 정신으로 많은 혜택 제공

 

김일 선수의 무료 치료와 마지막 영면시까지 도움을 주었던 을지병원은 1956년 11월1일 박 산부인과의 개원을 모태로 굴지의 교육의료재단으로 성장했다. 

 

70년이 다되도록 끊임없이 성장해 온 을지재단 역사의 중심에는 박영하 설립자의 ‘인간사랑 생명존중’의 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그 가치를 바탕으로 을지재단은 6.25남침전쟁으로 황폐화된 의료시설의 재건과 의료복지 구현이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서 일찌감치 병원을 공익법인으로 전환하여 의료복지 선진화의 길을 개척했다.

 

고(故) 박영하 박사는 1950년 6.25남침전쟁 당시 자진 입대해 군의관으로서 부상병들을 치료했고, 1953년 7월 속초 제1외과병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고도 3년을 더 복무하다가 1956년 7월 중령으로 예편했다. 아내 전증희 여사도 결혼후 강릉의 59육군병원 간호부장으로 재직하며 휴전을 맞았다. 

 

6.25남침전쟁은 국토를 초토화시키고 엄청난 상흔을 남겼지만, 의학 자체의 발전도 따랐다. 전쟁은 당시 대부분부상병의 치료와 연관성이 높은 일반외과, 정형외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마취과 등 외과계열의 의료기관들에게 더욱 큰 영향력을 끼쳤다. 

 

박 박사 역시 의대를 갓 졸업한 젊은 의사로 전쟁에 뛰어들어 수천건의 수술을 담당하며 군진의학(Military Medicine)의 개척자로 부족함 없는 실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이뿐 아니라 민족의 비극을 절절히 체험하며 공고화된 조국애를 갖고 실천했고 이후 국민보건의료향상에 기여한 공로를 더해 그가 별세하자 의사 최초로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됐다.

 

또 2018년 이달의 현충인물로, 그해 4월에는 이달의 영웅으로 각각 선정되기도 했으며, 부인인 전증희씨도 6.25남침전쟁 당시 간호장교로 참전했고, 박 박사의 아들인 현 박준영 을지재단 회장과 손자 역시 병역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여 ‘병영명문가’로 선정됐다.

 

현 박준영 을지재단 회장은 “나라를 위해 병역 의무를 성실히 이행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확산하는 데 일조하고 싶었다”라며 “앞으로도 병역 명문가의 값진 용기와 헌신을 극진히 예우하기 위해 실질적인 혜택을 확대하겠다”라고 말했다.

 

박 회장 부자(父子)의 이러한 사명감과 ‘인간사랑 생명존중’의 정신은 국민 영웅인 김일 선수의 장기간 지병 치료와 삶의 마지막까지도 도움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병역 명문가인 박준영 회장의 “제복을 입고 병역의무를 다하는 사람을 존중하고 예우하겠다”는 말처럼 비록 전시가 아닌 평시였지만 불의의 교통사고로 군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뻔한 필자와 김종완 동기에게도 직접 을지병원으로 데려와 완벽하게 치료하는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해 진심어린 감사와 함께 깊은 감동을 주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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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 프로필▶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제복은 영원한 애국이다(오색필통,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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