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입력 : 2023.06.21 14:15 ㅣ 수정 : 2023.06.21 14:15
100년만에 찾아온 폭염으로 출입하는 방문객이나 병원의 의사 및 간호사들도 모두 치친 가운데 김일성 사망 치료 및 재활시간을 단축시켜 앞서가는 동기생들을 빨리 쫓아가자는 각오가 재활운동에 박차 가하는 불씨 댕겨
[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대구에서 을지병원으로 옮긴지도 두달이 넘어갈 즈음에 침대에 장착된 골반고정 그네에 누워 공중에 엉덩이를 띄우고 꼼짝없이 못 움직였는데 왠지 좌측 새끼발가락이 계속 퉁퉁 부어있으며 통증을 느꼈다.
회진하는 담당 과장에게 통증을 이야기하고 X-ray를 찍어보니 교통사고 당시에 다른 곳이 워낙 심하게 다쳐 좌5족지의 중간마디가 탈골된 채 엇갈려 붙어버린 상태를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엇갈려 붙으며 굳어버린 발가락 마디를 떼어내어 다시 정상적으로 붙이는 수술을 했다.
발가락 부분 마취를 하고 수술에 들어갔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도중에 마취가 풀렸다. 엇갈려 붙은 발가락 마디를 분리하여 다시 정상적으로 연결하고 이를 고정하기 위해 가운데에 핀을 박을 때 마취가 풀린 상태라 통증이 심했고 고통을 참는 온몸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져 수술대 위가 땀으로 질퍽해질 정도였다.
문득 일제 강점기에 왜경들이 잡혀온 독립투사들에게 손발톱을 벌리거나 뽑는 고문을 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우리의 애국 투사들도 독립을 위해 이런 고통을 참아내며 버티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수술대의 아픔은 잠시 희석되었으나 너무도 힘들었다.
때마침 100년만에 찾아온 폭염으로 출입하는 방문객이나 병원의 의사 및 간호사들도 모두 치쳐있는 모습이었다. 필자는 병원 밖의 폭염보다는 마취풀린 상태로 겪은 고통의 수술 때문에 기진맥진한 상태로 병실로 돌아와 다시 침대위의 골반고정 그네에 엉덩이를 싣고 다시 누웠는데, 그때 TV에서 속보가 떴다.
1994년 7월8일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뉴스를 전하며 패널들의 평가는 곧 지도자를 잃은 북한이 무너져 와해되고 남북통일이 앞당겨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 덕택에 관심이 돌려져 수술시 받았던 통증은 반감되었다.
■ 당시 가장 큰 소원은 홀로 일어서 나의 다리로 침대 바로 옆 화장실로 이동하여 직접 용변을 보는 것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던 당시에서 24년이 지난 2018년 8월17일 기상청의 '2018년과 1994년 폭염 비교' 보도자료에 따르면 2018년 여름철(6월 1일∼8월 16일) 전국 평균기온과 최고기온은 각각 25.5도와 30.7도에 달해 1973년 통계작성 이래 가장 높았다고 한다.
하지만 입원 당시인 1994년에는 평균기온과 최고기온이 각각 25.4도(2위)와 30.7도(공동 1위)였다. 2018년 같은 기간 일조시간은 611.3시간으로 역시 가장 길었다. 1994년에는 564.6시간으로 3위였지만 그때의 폭염은 위문온 방문객들의 더위에 지쳐있는 모습에서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치료를 위해 시원한 병실에 누워 극심한 더위를 느끼지 못한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필자는 어쩔 수 없이 누워만 있었지만 위의 사진처럼 월력에 그날의 주요 일정 및 방문자들을 메모하는 일로 지루함을 해소했다.
그때 필자의 배앞에는 골절된 골반의 고정을 위해 장착한 골반뼈에서 연결된 골반고정핀(Pelvis frame)이 불쑥 튀어 나와있었다. 헌데 로보캅처럼 쇠가 튀어나와 불편한 것보다는 침대에 누워 생리적 현상까지도 가족의 도움을 받는 것이 더욱더 괴롭고 미안했다.
그래서 당시의 가장 큰 소원은 바로 침대 옆에 있는 화장실을 침대위의 골반고정 그네에서 빠져나와 스스로 나의 다리로 이동하여 직접 용변을 보는 것이었다.
드디어 입원 3개월 정도 지나자 침대에서 일어서도 된다는 의사의 통보를 받았다. 그동안 꼼짝 못하고 누워만 있다보니 다리의 근육은 모두 빠지고 앙상한 뼈만 남은 새다리가 되어있었고, 머리가 똑바로 서자 현기증으로 시야가 흐려지며 중심을 잡지 못해 침대에 쓰러지며 다시 누워야만 했다.
하지만 몇일 뒤에 난 당시 최대의 소원이었던 코앞에 있는 화장실을 두다리를 이용해 갈수 있었다. 물론 힘이 빠진 다리보다는 손으로 침대 모서리를 잡고 간신히 이동했지만 3개월만에 가족의 도움없이 화장실에서 편하게 용변을 볼 수 있다는 현실에 천하를 모두 얻은 기분이었다.
■ 찾아오는 지인들의 위문에 힘을 입은 재활치료는 결국 본인 의지와의 싸움
어느날 고교시절 절친인 이일성 한림대 교수가 찾아왔다. 그는 양손에 매우 무거워 보이는 책들을 들고 위문했는데 그 책들은 소설 ‘영웅문’ 시리즈 였다.
의사인 그는 지금은 거의 없어진 소위 영양탕 수육도 정성스레 펼쳐 놓으며 그 수육의 세포조직이 사람과 거의 유사하여 병상 환자들의 회복 영양식에는 최고라며 강권했다. 필자는 그것이 평소에도 즐겨 찾던 음식이었고 가족의 도움을 받아 누워서 너무도 맛있게 먹으며 고교시절 짝꿍의 배려에 감사했다.
이 교수는 고교 3학년때 육사 입학시험에 응시하는 전날에 수업 휴식 시간에 조용히 필자를 불러내 쟁반만한 크기의 엿을 건네주며 합격을 기원했던 친우로 현재까지 근 50년 동안의 지속적인 우정을 나누고 있다.
특히 병원 침대위에서 재활치료를 하던 필자가 지루하지 않게 소일할 수 있도록 영웅문 시리즈를 선물해 침대에서 꼼짝 못하고 누워있던 기간을 독서의 재미에 빠져들며 극복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후 가족의 도움없이 화장실에서 편하게 용변을 볼 수 있다는 현실에 천하를 모두 얻은 기분이었지만 한 단계 격상된 재활치료는 내 의지와의 싸움이었다.
한때 당시 상황에 따라 군생활 포기까지도 생각했던 필자에게 사관학교 동기들은 이미 대대장으로 취임해 열심히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소식은 필자에게 치료로 당시는 병원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재활시간을 단축시켜 앞서가는 동기생들을 빨리 쫓아가겠다는 각오와 동기부여가 되어 재활운동에 박차를 가하는 불을 댕겼다.
근육은 모두 빠지고 앙상한 뼈만 남아 새다리가 된 상태로 머리가 똑바로 서자 현기증으로 시야가 흐려지며 중심을 잡지 못해 침대에 쓰러지기를 반복하다가 드디어 훨체어를 타고 물리치료실을 찾아 보행기에서 첫걸음을 떼었다. 그때 근육이 없는 새다리보다는 팔의 힘에 의지했고, 그나마 팔에 힘이 남아있는 것이 다행이다는 생각도 했다.
위의 사진에 게시된 재활기구들을 사용해 보행 치료를 받는 모습처럼 보행기에서 처음에는 다리가 끌렸으나 몇일이 지나자 다리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였고, 점차 좋아지자 우측 사진처럼 이동식 보조기를 사용해 병원 복도를 쉴새 없이 누비고 다녔다.
그때 복도에서 환자복을 입었지만 왠지 카리스마를 느끼며 단단해 보이는 노인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우리나라의 프로레슬링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김일 선수였다.(다음편 계속)
◀김희철 프로필▶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제복은 영원한 애국이다(오색필통,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