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두의 K-Sapience (30)] 한국인의 연애, 결혼이야기⑦ 모던 걸, 못된 것, 毛斷걸
민병두 입력 : 2024.09.19 16:04 ㅣ 수정 : 2024.09.20 06:56
1920년대 중반에 수입된 모던걸, 처음에는 신선한 맛 내포돼 화류계가 학생계의 유행을 모방하면서 부정적 인식이 늘어나 모던걸을 대체한 개념인 현대여성, 신현모양처론으로 발전해
[뉴스투데이=민병두 회장] 신여성(new woman)이라는 단어가 영국에서 시작하여 일본을 거쳐 한국에 오기까지는 상당한 시차가 있었다. 19세기말 영국에서는 수천년간 지속했던 여성들의 태도와 가치관과는 다른 여성들이 출현했다. 임노동여성이 수백만명(1851년 283만명- 1901년 475만명)이나 늘어나고 노동조합에도 가입했다. 교사 간호사 사무원등의 숫자도 빠른 속도로 늘어났고, 중등교육을 받은 여성들도 출현했다. 대학의 문도 여성에게 개방되었다.
이들 신여성들 사이에서 “여성이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이 시작되었다. 보호자 없이 현관문 열쇠를 갖고 걸어다니는 여성, 치마 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여성,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는 여성, 신인류이자 신여성이었다. 이들은 여성이 있어야 할 곳이 가정인가, 직장인가, 사회인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부르주아적인 가정이데올로기(sweet home)에서 답을 찾는가 하면 페미니즘에서 길을 물었다
1920-1930년대로 가면 미국에서 도시화, 대량생산, 소비사회, 라디오, 대중음악의 등장으로 여성들의 자기 표현이 더 과감해졌다. 일부에서는 참정권 운동 등 여성해방운동으로 나갔지만 다대수의 여성들은 유행에 더 민감해졌다. 일본에도 그 흐름이 전파되었고 머리모양, 의상, 취향에서 서구를 쫓는 여성들이 등장했다.
일본만 해도 여성노동이 상당한 정도로 늘어나고 중등교육을 이수한 사람들이 많아 과거의 여성과는 다르게 독립적인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다. 긴자거리를 빠른 속도로 활달하게 걸어가는 단발의 머리를 한 여성들을 콕 집어서 ‘모던 걸’(Modern Girl)이라고 처음 특정화<잡지 ‘여성’>한 것이 1924년이다. 다음 해에 ‘모던걸의 윤곽“<‘부인공론’ 1925년4월호>에서 서구식 복장, 길고 곧은 다리 등 시각적 스타일로 그 개념을 구체화했다.
1920년대 중반에 접어들자 조선에서는 도쿄의 유행을 모방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경성의 풍경이 변모했다. 카페에서 비루(맥주)와 칵테일을 마시고, 영화관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축음기에서 재즈 음악을 들었다. <신여성> <별건곤> 등 여러 잡지와 신문에서 모던걸 특집을 다루었다. 초반에는 쾌활하고 활발한 새로운 여성군으로 묘사되고 장점이 많이 거론되었다.
“모던보이 모던걸이란 말이 우리에게 처음 수입될 때에는 거기에 여간 신선한 맛이 내포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든 것이 요즘 와서는 어떤가, 벌써 이 말은 얼간이란 말과 상통되지 않았을까”(조선중앙일보. 유치진) “이지적으로 월등… 쾌활하고 활동적인 것이 장점… 반면 사회인으로서 자각이 없는데서 비롯되는 허화부박(虛華浮薄) … ”(김기진) 도덕의식의 희박. 도회문명의 연독 . 마치 동경을 옮겨놓은 듯한 착각…. 점차 부정적인 묘사로 발전했다. 일본에서도 모던걸을 단발을 한 모단(毛斷)걸이라고 하여 한가지 특징만을 갖고 비하를 하게 되었는데 조선에서는 ’못된걸‘이라는 부정적 묘사로 까지 발전했다.
조선에서는 중등교육을 받은 여성의 수도 많지 않았고, 직업여성의 수도 빈약했다. 도시화 정도도 낮았다. 여학생에서부터 카페 여급, 기생과 여러 종류의 신종 여성 직업인을 망라하여 모던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의사 교수 교사 기자 간호사 등 엘리트 직업군도 포함되었고, 당시 인기가 있었던 직군도 망라됐다. 데파트걸 즉 백화점에서 판매를 하는 여성이 200여명 되었는데 미모를 구경하러 백화점을 찾는 남성도 적지 않았다. 버스걸(버스안내양. 1930년 경성에 처음 등장. 48명) 헬로걸(전화교환원) 엘리베이터걸도 인기가 있었는데 그 수가 얼마 안됐다. 그렇게 보면 다수는 학생과 기생이었다. 화류계가 학생계의 유행을 따라하면서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런 점이 모던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늘어나게 했다.
<별건곤>에서는 특집을 통해 “카페 극장 딴스장 과 같은 화류 우거진 곳에 다니는 낭비군 퇴폐군”으로 묘사했다. ”모던뽀이는 나팔통바지에 폭넓은 넥타이, 길다란 발모“가 특징이었다. 모던걸은 단발이 다수였지만 파마를 하기 시작했다. 모던보이들은 자본가의 아들로 탕아에 비유되었다. 모던걸은 유녀와 매음 생활을 하는 여성들로 비하되기도 했다.
남성들의 현대여성을 보는 부정적인 인식이 작용한 면도 있다. 이들은 급진주의자도 아니고 사회주의자도 아니다. 비정치적이었다. 의복과 화장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단발한 젊은 미인들이라며 경박자(輕薄者)라는 딱지가 붙어다니기도 했다. 일본인 상권이 밀집해 있던 명동성당 남쪽의 진고개가 번창해지고 데파트가 일반화된 1930년대에 와서 신여성은 짦은 치마에 뾰족구두를 신는 허영심 외에 아무 것도 모르는 여성으로 비하되었다.
서구와 일본의 모던걸이 자본주의의 병폐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조선의 모던걸은 사회적 토대가 없는 가운데 외향을 따라했다는 점에서 기형적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사회경제적 토대가 약한 탓에 사실 모던이라는 개념도 부정확했다. '모던'이라는 말을 갖다가 붙이면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되기도 하고 전근대와 다른 무엇을 표현하는 듯이 보였다. “모던! 모든 것이 모던이다. 모던껄 모던뽀이 모던대신 모던왕자 모던과학 모던종교 모던예술 모던자살 모던극장 모던스타일 모던순사 모던도적놈 모던잡지 모던연애 모던건축 모던기생… 무제한이다" (‘별건곤’ 1930년1월호)
제국주의 지배의 전박적인 억압과 세계대공항의 여파,빈곤과 대량실업으로 인한 고통은 청춘세대의 방황을 촉진했다. 퇴폐적 성격의 도시 소비문화의 확산은 대중을 체념과 무기력으로 빠트렸다.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게 했고, 일각에서는 정사(情死)가 하나의 사회 풍조가 되어버렸다. 막연한 불안감과 억압 아래 에로틱시즘의 극단적인 형태로 자살을 택했다. "연애의 가치란 차라리 실연에 있으며 실연으로 말미암아 광열하며 사랑에 초민(焦悶)하여 죽는 것은 절대 미의 극치"(윤근 1922)라는 생각이 발전했다. 현실의 악착한 경제적 고난과 봉건적 유습의 철벽에 부딪힌 수많은 청춘남녀들이 “천국을 찾아서 현세와 고별”(이석훈 1932)했다.<‘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 김경일 지음. 푸른역사>
1930년대 성의 특징은 퇴폐적 쾌락주의와 향락주의로의 도피로 특징지워진다.(김경일) “불안이 증대되고 사회적 중압이 격화하며 오늘과 같이 전시적 분위기가 창일하는데 있어서는 향락, 그중에서도 단적으로 말하자면 먹는 것과 성적인 것 가운데 전 신경 계통을 매몰시키는 것은 어느 단계에서나 공통적“(윤규섭 1938)이었다. 하지만 이런 진통을 거쳐가면서 서구화도 정착되어갔다. 1930년대 들어 양장이 늘어나면서 색채도 전보다 더 과감해졌다. 계절에 따라 색상도 달라지고 소비문화의 대중화가 진전되었다. 이런 변화를 반영하여 '현대여성'이라는 신조어가 모던걸을 대신해 나갔다.
일제하의 사회상의 변화를 다룬 많은 저서와 논문을 보면 조선 동아 조선중앙등 신문, 삼천리 별건곤등 몇몇 잡지에 기초한다. 하지만 신여성이나 모던걸, 그리고 현대여성에 이르기까지 여성사의 변화는 아주 소수의 삶을 대표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언론이나 지식인들이 새로운 조류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신여성 모던걸이 그 시대의 삶을 과다대표하고 있다. 절대다수의 삶은 그보다 몇 발 늦게 서구화의 영향을 받았다.
결혼에서 우리가 갖는 또 다른 관심은 가정, 집안, 가족의 구성에서 누가 중심이냐는 것이다. 앞서 19세기말 영국 여성의 질문'은 여성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냐는 것이었다. 산업화 도시화의 반영이다. 그들이 이런 질문을 할 때 우리는 조혼금지, 이혼 및 재혼 허용등이 이슈가 되었다. 전근대성에서 탈출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개화파와 외국인 선교사, 일본 유학생들이 잇달아 오래된 가족제도를 비판했다. 조선시대 가족제도에서 ‘주인’은 가장인 남자였다. (1960년대 까지만 해도 이웃이 방문할 때 “주인 양반 계신가”라고 묻는 경우가 많았다) 주부의 위치는 종속적이었다.
부부는 평등하지 않았다. 남편이 하늘이었고 시아버지와 죽은 조상들은 섬김의 대상이었다. 그 다음 서열이 장남과 아들들이었다. ”전제적인 가정에서 부인은 문 밖에 나가지 못하고… 암흑무식한 부인이 될 밖에 없고 그 아이들은 나약 나태한 사람이 된다“고 지식인들은 한탄했다. 결혼식에서 폐백을 할 때 신랑의 부모가 대추를 던져주면서 축복을 하는 것은 ‘다산이 다복’이라고 믿었던 우리의 신앙에서 유래했다. 농경사회에서 힘이 센 남아가 선호의 대상이었다. 여아는 어차피 남의 집으로 보내는 노동력에 불과했다. 오래 키울수록 밥만 축내고 손해였다.
2000년대 이후에는 거의 모두 ‘부부’가 가정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이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부부가 중심이 될려면. 가족제도가 변화해야 한다. 서구식 사회학 용어로 핵가족, 1920년대의 우리 표현으로는 단가(單家)를 이루어야 한다.
1920년대 신가정운동론자들이 주장했던 것은 첫째 부부가 가정의 중심이고 둘째 대가족 대신에 단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들은 가정의 개조가 국가의 개조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나라를 고쳐 만들고자 하면 반드시 국민 각 개인을 고쳐야 할 것으로, 국민을 양성하는 곳-선남선녀를 기르는 곳은 즉 가정이라. 이 가정을 새롭게 함이 개조의 첫 일이 아니리오… 우리 가정을 개조하려면 먼저 무엇을 할까. 먼저 가정의 기초는 무엇인가… 이는 물을 것도 없이 부부이라 할지니라‘(김창재 신가정에 대하여 . 신가정 창간호 1921)
가정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중요한 뼈대 중의 하나가 성별분업론이다. 성별분업론은 산업혁명 이후 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중후반까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했다. 성별분업론은 남성이 밖에서 돈을 벌어 집안을 책임지고, 여성은 가사와 양육을 책임지는 구조이다. 남자는 경제, 여성은 정서라는 역할분담은 신현모양처론으로 발전했다.
”가정이라는 회사의 지배인은 남편이 아니오…가정은 부인의 유일한 영토이니 가정의 통치권은 부인의 것… 아이를 가정의 중심에 두어 길러야 민족발전”(전영택),“이 직분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남자에게 정서적 위안을 제공…여자의 한번 웃음은 남자의 만사를 성공케 하고 여자의 일은 남자의 만가지 걱정을 환기케 하나니 꽃 보담도 향기로운 것은 여자의 정이요 봄날 보다도 따듯한 것은 여자의 사랑이니다“(김필순) 동반자인지, 보조자인지 그 위상이 논자에 따라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근대적인 부부일심동체론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 양처현모론을 교육이념의 하나로 채택한 바 있다. 현모양처와 양처현모는 선후관계, 비중의 차이가 있다. 여성은 결혼하지 않고 현모가 될 수는 없다. 양처가 되어야 현모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래로 우리 조선 가정에서는 남편이 어디를 갔다가 돌아올 때 그 부인이 생글거리며 마중 나아가 두루마기를 벗기고 모자를 받으며 한 상에 겸상하여 밥을 먹는 일은 절대 없었습니다. 이는 기생이나 첩들의 잔혹한 수단이라 하며 그 정실부인은 이를 욕하고 흉보았습니다.”<‘저녁에 돌아오는 남편을 어떻게 맞을까‘부인 창간호 1922.6> “밥이나 짓고 먹기나 하면 그것만이 여편네의 할 일이라고 생각하여서는 안됩니다… 가장 가깝게 통정할만 친구로 생각하여야 합니다. 남편의 이상이 어떠한지 밖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지 못하고 집에 돌아오면 변변치 않은 일 큰일이나 난듯이 잔소리를 퍼부어 더 한층 머리가 괴롭게 하기만 해서야 되겠습니까”<신여자 창간호 1920.3 편집부 가정의 책임을 가지신 부인들에게>
여자가 집안의 중심이 되어 가정을 남편과 아이들의 오아시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가정신성론은 여성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일제와 신여성, 현대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주택개조 식탁개조 부엌개조와 같은 물질적 토대의 개조와 함께 가정생활의 일정한 변화를 가져온 측면이 있다. 한편 카페여급의 조선인 거주지 진출 등 위험요소는 주부들에게 보다 능동적인 가정 내 역할을 촉진시켰다고 보는 관측도 있다.
신현모양처론은 서구에서는 결혼의 황금기(1950-1960년대)에 꽃피웠다. 우리나라에서도 베이비부머들의 결혼 황금기인 1990년대까지 가장 일반적인 사고였다.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정의 시대를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다. 해방과 전쟁, 그리고 처음 경험해보는 미국문화의 직수입은 한국인의 연애과 결혼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1부를 여기에서 마치고 해방 이후 부터 현대까지는 2부로 다룬다. 해방 이후의 자료 수집에 시간이 걸릴 듯….
참고도서 /이 글에서 일제 시대 신문 잡지의 인용은 아래 김수진 김경일의 책에서 대부분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