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일 기자 입력 : 2024.04.01 08:21 ㅣ 수정 : 2024.04.01 08:21
투자자 접촉 시작으로 배상 절차 본격화 은행권 배상금 1.9조 육박할 가능성 제기 자율배상 결정 제재 경감 노림수 평가도
[뉴스투데이=유한일 기자] 5대 시중은행과 SC제일은행이 홍콩항셍중국기업지수(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자율배상을 결정하면서 사태 수습에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이들 은행 통틀어 최대 2조원의 배상금이 투자자들에게 지급될 것으로 추산된다. 은행권의 발 빠른 자율배상 결정이 향후 제재 감경으로 이어질 지도 관심사다.
1일 은행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SC제일 등 6개 은행은 지난달 22~29일 사이 잇따라 개최한 임시 이사회에서 금융감독원의 홍콩H지수 ELS 분쟁조정 기준안을 수용하고 자율배상에 돌입하기로 결의했다.
이는 지난달 12일 금감원의 홍콩H지수 ELS 분쟁조정 기준안이 발표된 지 17일 만이다. 당초 은행권 자율배상이 자칫 주주를 상대로 한 배임 우려가 있다며 난색을 표했으나, 신속한 투자자 보호 필요성이 커지면서 자율배상으로 의사결정이 모아졌다.
당장 이들 은행은 이날부터 홍콩H지수 ELS 투자자들과 접촉해 배상 절차를 개시한다. 은행이 투자자별 배상비율을 결정해 통보하고, 투자자가 이에 동의하면 배상금을 지급해 매듭짓는 식이다. 앞서 금감원은 대부분 투자자가 손실 원금의 20~60% 범위 내에서 배상을 받을 것이라고 계산한 바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은행권 홍콩H지수 ELS 판매 잔액은 15조4000억원에 달한다. 이 중 8조7000억원(56%)이 올 상반기 중 만기 도래한다. 은행별 판매액은 △국민은행 8조1000억원 △농협은행 2조6000억원 △신한은행 2조3000억원 △하나은행 2조300억원 △제일은행 1조2000억원 △우리은행 400억원 등으로 추산된다.
이에 따라 이들 은행의 홍콩H지수 ELS 배상금은 2조원에 육박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한국신용평가의 경우 배상비율을 40%로 잡으면 6개 은행의 배상금이 1조95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판매 잔액이 가장 많은 국민은행에서만 거의 1조원의 배상금이 지출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신용평가는 “금융지주의 주주환원 확대 기조에 따른 은행의 배당 부담, 저하되는 수익성까지 감안하면 홍콩H지수 ELS 배상은 자본적정성에 어느 정도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한다”며 “손실 규모는 각 은행의 자율배상 논의 결과 및 향후 홍콩H지수 변동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 이에 대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은행권은 홍콩H지수 ELS 배상금을 일단 충당금 적립 방식으로 쌓아놓고 투자자들에게 지급할 것으로 알려졌다. 배상 규모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올 1분기 실적에 반영하는 방안과 1~2분기 나눠 반영하는 방안을 놓고 고심 중이다.
분쟁조정 기준안 발표에 이어 자율배상 결정이라는 두 번째 산을 넘은 은행권은 이제 금감원 제재에 대비해야 한다. 금감원 현장조사에서 은행들의 설명 의무 위반, 부당 권유 등 불완전 판매 사례가 다수 확인된 만큼 고강도 제재는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배임 우려를 주장하던 은행권이 자율배상으로 입장을 선회한 건 제재 감경을 노린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이복현 금감원장이 “과거의 잘못을 상당 부분 시정하고 책임을 인정해 이해관계자에 적절한 회복 조치를 한다면 과징금(제재) 감경 요소로 삼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 이번 홍콩H지수 ELS 관련 과징금이 수천억원에서 최대 조 단위가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는 만큼, 은행권은 ‘피해 보상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지속해서 보낼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 제재는 금융소비자보호법 시행 후 첫 사례인 만큼 받아들여지는 부담도 큰 상황이다.
은행권은 일단 신속하게 자율배상 절차를 마무리하고 불확실성을 해소하겠다는 목표다. 업계 안팎에서 제기되는 최고경영자(CEO) 징계 가능성에 대해선 높지 않다는 의견이 많다. 과거처럼 전반적인 내부통제 미흡의 문제라고 보기 어렵고, 과거 파생상품 불완전 판매 사태 당시 징계 받았던 금융사 CEO가 소송으로 징계 취소 결정을 받은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금감원은 은행권의 자율배상 진도를 지켜보면서 본격적인 제재 절차에 돌입할 계획이다. 불완전 판매 등 위법 행위가 발견된 은행에 검사 의견서를 발송하고, 이후 해당 은행의 소명 절차를 거친 뒤 최종 제재 수위가 결정될 것으로 전망된다.
은행권의 한 관계자는 “자율배상 결정을 내렸다는 거에 끝나지 않고 투자자들이 얼마나 수용할지, 은행이 얼마나 더 세심하게 피해를 지원하는지 같은 걸 종합적으로 볼 것 같다”며 “과징금 뿐 아니라 일부 영업정지가 내려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원장의) 감경이라는 건 어떻게 산정한다는 건지 아직 알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