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쏘아 올린 '제로금리' 시대의 종언, 왕따 신세된 일본
[뉴스투데이=정승원 기자] 미국의 공격적인 금리인상에도 꿋꿋하게 제로금리 기조를 유지했던 유럽이 결국 금리인상을 단행했다. 2011년 7월 이후 꼭 11년만의 일이다.
22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유럽중앙은행(ECB)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통화정책회의를 열고 기준금리를 기존 0%에서 0.5%로 인상하는 빅스텝을 결정했다. 예금금리는 기존 마이너스 0.5%에서 0%로 인상했고 재금융금리와 한계대출금리도 각각 0.5%와 0.75%로 올렸다.
이에 따라 2014년부터 8년 간 이어져온 유럽의 예금 마이너스 금리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됐고, 2016년부터 유지해온 제로금리 시대 역시 끝나게 됐다.
사실 유럽의 기준금리 인상은 뒷북에 가깝다. 올들어 각국이 코로나19 기간 중 풀린 통화로 인해 무지막지한 인플레이션을 겪으면서 앞다퉈 기준금리를 올렸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은 진작에 0.5%포인트, 0.75%포인트 등 빅스텝과 자이언트스텝을 단행하며 공격적으로 금리를 끌어올렸다.
일각에서는 대폭적인 금리인상이 극단적인 경기침체를 불러올 것이라며 우려를 표시했지만 연준은 모든 정책의 초점을 인플레이션 잡기에 맞추며 연달아 금리를 대폭 올리는 초강수를 뒀다.
미국의 공격적인 금리인상에도 유럽은 그동안 국가부채가 많은 남유럽 국가들이 갑작스런 금리인상으로 겪을 어려움을 고려해서 금리인상 조치를 머뭇거렸다.
하지만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공포가 유럽을 덮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EU 국가는 아니지만 영국의 6월 소비자물가지수가 전년 동월 대비 9.4% 상승했고 유럽의 6월 소비자물가지수 역시 전년 동기 대비 8.6% 상승하자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며 금리인상의 칼을 빼든 것이다.
유럽의 소비자물가지수는 지난 4월 7.4%, 5월 8.1%에 이어 6월에는 8.6% 오르는 등 최근 수개월간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다.
앞서 많은 전문가들은 ECB가 금리를 인상하더라도 7월에 0.25%포인트를 인상하고 9월에 추가로 금리를 인상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ECB는 이번에 한꺼번에 0.5%포인트를 올리는 빅스텝 카드를 내놓았다.
ECB는 성명에서 “물가상승률이 예상보다 더 높은 수준”이라며 “이전 회의에서 시사한 것보다 더 큰 폭으로 올리는 것이 적절하다”고 밝혀 이번 대폭적인 금리인상의 배경이 물가상승률 때문임을 분명히 했다.
ECB의 금리인상은 최근 유로화가 1달러=1유로의 패리티마저 깨지며 사상 최저수준까지 떨어지는 등 가치가 급격하게 떨어진 것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이 공격적인 금리인상을 국제자금시장의 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면서 유로화 가치가 끝모르게 떨어지는 것을 그대로 두고볼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유럽의 제로금리 탈피로 이제 남은 것은 일본뿐이다. 일본은 달러 대비 엔화가치가 1998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까지 떨어지는 속에서도 꿋꿋하게 제로금리 정책을 유지하고 있고, 앞으로도 제로금리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본의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은 지난 21일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단기 정책금리(기준금리)를 마이너스 0.1%, 장기금리인 10년물 국채 금리를 제로로 유도하는 현행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은행은 한술 더떠 향후 추이를 지켜보며 추가적인 금융완화정책에 대해서도 주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일본이 이렇게 제로금리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것은 현재 상황에서 금리를 올리게 되면 주택 담보 대출 등의 금리가 함께 오르며 소비까지 부진해지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적인 금리인상 속에 나홀로 제로금리를 고집하는 바람에 일본은 자금유출과 함께 통화가치 하락에 따른 수입물가 상승으로 올 상반기 7조9241억엔(약 75조원)에 달하는 상반기 기준 역대 최대규모의 적자를 기록했다.
1달러 당 130엔을 넘어선 것이 엊그제였는데, 이제 엔화는 1달러당 140엔에 바짝 다가섰다.
세계적인 추세와 완전히 거꾸로 가는 일본의 뚝심이 과연 성공할지, 아니면 유럽처럼 제로금리 정책을 포기할지 관심이 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