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뉴투 유리천장 보고서 ⑩] "여성 소비자 공략하면서" 식음료 업계 女임원 비율은 10%대 수준 그쳐
서민지 기자 입력 : 2024.09.26 09:51 ㅣ 수정 : 2024.09.29 08:29
CJ제일제당 115명 중 25명이 여성...업계 선도 "성과주의 등용과 유연한 근무환경 덕분" 보수적인 기업 문화 바꿔야..."능력·자질 고려한 인사 늘 것"
견고하고 단단한 한국의 유리천장에도 조금씩 금이 가고 있다. 국내 100대 기업 임원 여성 비율은 2019년 3.5%에서 지난해 6%로 지속 증가하는 추세다. 여성의 교육수준 향상과 경제활동 참여가 증가하면서 기업 내 여성의 기여도와 역할이 신장하는 흐름이다. 하지만 기업별, 업종별 수준이 상이할 뿐만 아니라 글로벌 수준과 비교하면 한국의 유리천장은 여전히 두껍고 단단하다는 지적도 있다. <뉴스투데이>는 국내 주요 기업들의 여성임원 현황과 실태를 점검해 보는 ‘2024 뉴투 유리천장 보고서’ 시리즈를 기획했다. <편집자주>
[뉴스투데이=서민지 기자] 국내 식음료 업계가 유연한 근무 분위기 속에서 여성 임직원들이 근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유리천장 밑 여성 임원들이 나아갈 길은 아직 멀기만 하다. 국내 대형 식음료 업체 10곳의 여성 임원 비율은 14.2%로 국내 주요 산업군에 비해 높은 편이나 개별 기업으로 보면 겨우 한두 명만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다만 CJ제일제당의 경우 여성 임원이 4명 중 한 명꼴로 높은 수치를 나타내고 있다. CJ제일제당은 △능력주의 인재 등용 △혁신적인 근무 환경 등 총 2가지 정책으로 여성 임원의 성장을 지원한다. 기업 문화만 제대로 정착한다면 현재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인 셈이다.
26일 <뉴스투데이>가 올해 반기보고서 기준 임원 현황을 조사한 결과, CJ제일제당과 동원F&B·오뚜기 등 지난해 식음료 업계에서 매출 3조라 불린 업계 선두 주자 10곳의 임원(미등기 포함) 416명 가운데 여성은 60명(14.2%)이다.
CJ제일제당이 115명 중 25명으로 업계 내에서 가장 많은 여성 임원을 기용하고 있다. 특히 국내 100대 기업 중 CJ제일제당은 삼성전자 다음으로 여성 임원 수가 많았는데, 지난해 기준 자산 총액으로 보면 438조 원에 달하는 삼성전자의 6.8% 수준(30조 1842억 원)임에도 긍정적인 결과를 내 고무적이다.
반면 여성 임원이 5명도 채 못 미치는 경우도 많다. 동원F&B는 23명 중 1명으로 가장 적었으며, 오뚜기·농심·CJ프레시웨이는 각각 14명과 39명, 12명 중 2명에 불과했다. 대다수의 식음료 기업이 여성 소비자를 타깃으로 다채로운 제품을 출시하며 마케팅 행보를 이어가는 것과는 달리 어두운 현실이다.
보수적인 기업 문화로 식음료 업계에서도 아직 여풍(女風)이 불기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식음료 특성상 현장 영업 경쟁이 매출로 직결되다 보니 다소 거친 영업 환경에서 살아남아 성과를 내는 건 자연스레 남성이 됐고, 기업 문화도 남성 중심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 CJ제일제당, 까다로운 해외 시장 입맛 사로잡은 비결은 '여성 임원'
이 중 눈여겨 볼 곳은 CJ제일제당이다. 성별 제한 없이 적극적으로 인재를 기용하며 여풍을 적극 경영이념에 반영하고 있어서다. 식품이라는 섬세한 사업 특성과 함께 CJ그룹이 지향하는 경영 철학이 다수의 여성 임원 배출로 이어졌다는 게 업계 전반의 분석이다.
대표적 인물이 비비고 식품연구소장을 지낸 임희정 경영리더와 81년생 배혜원 식품사업부문 식품전략기획담당 경영리더 등이다. 배혜원 경영리더의 경우 CJ제일제당의 '비비고' 브랜드를 해외에 알리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K푸드 확대를 위해 해외에서 비비고가 어떤 전략을 추진할 것인지 결정하고 실행했다. 내부에선 그를 두고 '비비고의 글로벌 위상을 높이고 질적 성장을 끌어낸 인물'이라고 평한다. 쓰 코테탄(Sze Cotte-Tan) 식품연구소장(부사장 대우)의 경우 네슬레 싱가포르 R&D센터장을 역임했는데, 2019년 CJ제일제당이 식품 R&D를 위해 전격 영입했다. 외국인이 식품 업계 R&D 사령탑을 진두지휘하는 것은 쓰 코테탄 부사장이 처음이다.
■ "여성 임원이 일할 수 있는 근무 환경과 능력·성과주의 기조 덕분"
이들은 CJ그룹의 '인재제일(人材第一)'이라는 경영 철학 아래 성장했다. CJ는 젊은 인재와 여성 인재를 능력 위주로 발굴하려는 기조가 강하다. 섬세하고 창의적인 시각으로 먹거리 소비자들의 입맛을 책임져야 하는 만큼 여성 임원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이는 최고 경영진에서부터 강하게 시작된다. 손경식 CJ그룹 회장은 올해 신년사를 통해 "훌륭한 최고 인재를 확보해 꾸준히 육성하며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한다"며 "분명한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고 다양한 기회를 제공한다면 조직 구성원들은 자기 주도적으로 몰입해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며 성과를 창출할 수 있다"고 조직원들을 향해 당부하기도 했다.
또 CJ제일제당은 조직원이 자신의 역량을 드러낼 수 있도록 혁신적인 기업 문화를 정착시켰다. 직원 스스로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자 '거점 오피스'와 '선택근무제'를 도입했다. 또 여성 임직원이 일과 가정을 조화롭게 병행할 수 있도록 직장 어린이집 'CJ키즈빌(CJ Kidsville)'을 운영하고 난임 휴가를 지원하고 있으며, 여성 직원들이 출산 후에도 경력 단절에 빠지지 않도록 남성 육아 휴직제 등 다양한 지원을 펼치고 있다.
직급제를 폐지해 유연한 조직문화를 구축한 점도 여성 임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CJ그룹은 2022년 인사부터 사장 이하 상무대우까지 모든 임원의 직급을 '경영리더'로 통일했다. 이재현 CJ 회장은 '2023 중기 비전'을 발표하면서 "나이와 성별, 연차, 직급에 관계 없이 누구나 리더가 될 수 있고, 새로운 세대들이 틀을 깨고 새로운 도전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겠다"고 밝힌 바 있다. 직급에서 오는 서로 간 거리를 허물어 조직원들의 능동성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업계 관계자는 <뉴스투데이>에 "CJ제일제당의 여성 임원이 두각을 드러낼 수 있는 이유는 그룹사의 인재 육성을 향한 목표가 크고, '일과 가정의 양립' 문화가 정착했기 때문"이라며 "여성 임직원들도 다양한 기회 속에서 도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 보수적인 기업 문화, 이젠 바꿔야 한다
CJ제일제당의 사례를 보며 기업 문화부터 바꿔야 한다는 업계 내부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세계은행은 '여성, 비즈니스와 법률 2024' 보고서를 통해 "여성들이 일하거나 사업을 시작하는 것을 막는 차별적인 법과 관행을 해소하면 전 세계적으로 국내 총생산(GDP)이 20% 이상 증가하고 세계 경제 성장률 또한 두 배 오를 것"이라 내다봤다. 한국 기업 여성 임원들의 활동을 보장하고 유리천장을 부순다면 기업과 국가 경제 성장까지 가능하다는 의미다.
주형환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은 지난 6월 열린 '인구감소의 노동시장 영향과 대응 과제' 세미나에서 "우리나라 여성 3040세대가 출산과 육아에 대한 부담을 느끼면서 경제활동참가율이 하락하고 있다"며 "노동 유연화 등을 통해 일과 가정의 양립을 활성화하고, 경력 단절을 해소하는 등 경제활동의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에 여성 임직원들이 육아 부담을 덜고 업무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정책들이 생겨나고 있다.
여성 임원을 선임하는 것이 사실상 벌칙 없는 권고에 가깝다는 점도 개선돼야 한다. 2020년 1월 자산 총액 2조 원 이상의 기업은 이사회를 구성할 때 최소 여성 1명 이상을 포함해야 한다는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법)'이 통과된 이후 주요 경영진 내 여성들이 자리하기 시작했으나 좀처럼 늘지 않아 '시늉'이라는 날 선 비판의 목소리를 받기도 했다.
업계 내부적으론 최근 기업들이 여성들의 근무 환경을 보장하고 있는 만큼 추후 시간이 지나면서 여성 임원들이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업계 전반적으로 여성 인력을 육성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어 향후 다수의 기업도 능력과 자질을 고려한 혁신 인사를 단행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