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기술·인력’ 유출 위기 놓인 삼성·SK…패권경쟁 ‘비상등’
[뉴스투데이=전소영 기자] 반도체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삼성과 SK하이닉스에 비상등이 켰다. 기술과 인력유출이 끊이지 않고 있어 두 회사의 '초기술격차'가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Big Data) 등 정보통신기술이 중심이 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핵심 인프라인 반도체 분야에서 고위기술 선점을 위해 전 세계 기업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기술유출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각사는 전직금지 약정서와 국가핵심 기술 등의 비밀 유지 서약서 등으로 규제하고 있지만 기술유출을 완전히 막지 못해 큰 피해를 보고 있다. 자칫 그간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들여 구축한 '초기술격차'가 허물어질 수 잇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우리 기업들은 기술유출을 막기 위해 내부 인력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는 자체 제도를 마련하고 있지만 전문 인력의 전직과 기술 유출을 봉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HBM(고대역폭메모리) 등 반도체 분야 핵심기술· 전문 인력 유출 사건에 대해서는 현재 수준보다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업계는 입을 모으고 있다.
법조계와 반도체 업계 등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제50민사부는 최근 SK하이닉스가 경쟁사인 마이크론으로 이직한 전 연구원 A씨를 상대로 제기한 전직금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다. 그리고 위반 시 1일당 10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A씨는 SK하이닉스에서 D램과 HBM 설계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메모리연구소 설계팀 주임 연구원, D램설계개발사업부 설계팀 선임연구원, HBM사업 수석, HBM 디자인부서의 프로젝트 설계 총괄 등을 지냈다.
A씨는 2015년부터 매년 '퇴직 후 2년간 동종 업체에 취업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정보보호서약서를 작성했다. 또 2022년 7월 26일부로 퇴사한 A씨는 그 무렵 전직금지 약정서와 국가핵심기술 등의 비밀유지 서약서에도 서명했다. SK하이닉스의 전직금지 약정은 전직금지 대상이 되는 경쟁업체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으며 전직금지 기간도 2년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A씨는 전직금지 기간 동안 경쟁사인 마이크론의 임원으로 이직을 했고, 이 사실을 확인한 SK하이닉스는 지난해 8월 법원에 전직금지 가처분을 냈다.
마이크론은 SK하이닉스 전직금지 약정에 명시된 전직금지 대상 경쟁업체 중 하나다. 특히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주도권을 다퉈온 HBM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후발주자다.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랜스포스에 따르면, 2024년 HBM 글로벌 시장점유율 추정치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각각 46~49%, 마이크론이 3~5%다. 마이크론은 아직은 기술력이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에 한참 못 미치지만 올해부터 본격 참전을 예고해 두 회사를 위협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마이크론은 지난달 26일(현지시간) 5세대 HBM인 4GB(기가바이트) 8단 HBM3E D램 대량 생산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현재 업계 공급되고 있는 최신 제품은 4세대 HBM3인데 마이크론은 이보다 한 세대 앞선 제품 대량 양산을 시작하며 점유율 끌어올리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SK하이닉스가 HBM 설계 업무에 관여한 A씨의 마이크론 전직에 대해 기술유출 가능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자칫 기술경쟁력 위협으로 이어질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법원 역시 이를 인정하고 SK하이닉스의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다.
재판부는 "채무자(A씨)가 취득한 정보가 유출될 경우 마이크론은 동종 분야에서 채권자와 동등한 사업 능력을 갖추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상당 기간 단축할 수 있다"면서 "채권자(SK하이닉스)는 그에 관한 경쟁력을 상당 부분 훼손당할 것으로 보이는 점, 정보가 유출될 경우 원상회복은 사실상 불가능한 점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SK하이닉스는 법원의 판결을 환영하고 있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뉴스투데이> 통화에서 "HBM을 포함한 D램 설계 관련 기술은 국가 핵심기술에 포함되기에 법원의 판결은 적법하다"고 말했다.
반도체 기술유출 문제는 비단 SK하이닉스만의 일은 아니다. 반도체 업계에서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삼성전자에서도 상무 출신인 B씨가 2018년 8월부터 2019년까지 회사의 영업비밀이자 국가핵심기술인 반도체 공장 BED(Basic Engineering Data)와 공정 배치도를 부정사용한 사실이 밝혀져 큰 논란이 됐다.
그는 삼성전자뿐만 아니라 SK하이닉스 등 국내 주요 반도체 기업에서 활약한 인물로 업계에 더욱 충격을 안겼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산업기술 해외유출 적발 사건은 2019년 14건에서 2023년 23건으로 9건 늘었다. 같은 기간 반도체 적발 건수는 3건에서 15건으로 늘었다. 전체 적발 건수는 2배도 채 늘지 않은 반면, 반도체는 5배가 증가했다. 다른 산업 대비 기술유출 심각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기술유출을 막으려면 결국 내부 인력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수성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한계가 있다.
기업들은 퇴사 시 전직에 제한을 두거나 보안 서약서 등 기본 규제 장치 외에도 임직원의 역량을 끌어올릴 수 있는 업무환경 조성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애초에 퇴사를 예방함으로써 인재도 지키고, 기술유출 위험 가능성도 차단하는 취지다.
SK하이닉스는 우수한 엔지니어들에게 회사에서 지속해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정년 없는 엔지니어' 제도를 운영한다. 오랜 기간 쌓아온 전문 지식을 활용해 기술 개발과 노하우 전수에 기여할 수 있는 우수 엔지니어를 'DE(Distinguished Engineer)'로 선발한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역량과 전문성을 지닌 엔지니어를 'HE(Honored Engineer)'로 발탁하는데, HE가 바로 정년 없는 엔지니어에 해당된다.
SK하이닉스는 "이전에는 실무자에서 관리자를 거쳐 임원으로 승진하는 커리어 패스만 존재했는데 DE와 HE 도입 이후 수십년 간 쌓은 연구 역량을 보존·계승하면서 엔지니어들이 경력을 지속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본사가 있는 용인으로 출퇴근이 힘든 반도체 사업부 임직원의 근로환경 개선을 위해 서울 강남과 경기도 분당 등에 공유오피스를 운영한다. 또 임직원 자기개발을 위한 교육 등도 적극 지원한다.
이처럼 반도체 인력을 지키기 위해 기업 스스로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두고 있으나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현재 기술·인재 유출에 대한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이라는 게 기술유출의 유인요소가 된다는 점이다.
대법원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된 1심 사건 33건 가운데 무죄 60.6%, 집행유예 27.2%다. 10명 중 8명은 사실상 처벌을 받지 않은 셈이다.
이 때문에 기술·인재 유출 사건에 대해서는 정부가 매우 강력하게 처벌하지 않는다면 근절되기 어렵다는 의견이나온다. 업계의 관계자는 <뉴스투데이> 통화에서 "기업들이 기술유출을 막기 위해 인재를 지키기 위한 자체적인 노력을 하고는 있지만 이러한 문제가 반복해서 발생하고 있다"면서 "기술유출이나 전직금지 등 회사와의 서약을 어기는 사람에 대해서는 처벌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른 관계자는 "기술을 유출에 따른 처벌보다 득(得)이 더 크기 때문에 비슷한 일들이 반복해서 발생한다. 처벌을 강화하지 않고 기업의 자생 노력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면서 "바로잡지 않으면 반도체 패권경쟁에서 뒤쳐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