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방순 칼럼] 대만을 3차례 포기했던 미국, 2024년 대선 이후 선택은? (1)
첫 번째 사례 : 1940년대 중·후반 국공내전에서 무능·부패한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포기
최근 트럼프 前 미국 대통령은 선거 유세 과정에서 ‘유사시 대만 지원’ 여부에 대한 질문에 모호하게 답변하고 있다. 미국은 근현대사 속에서 3차례 대만을 포기한 바 있다. 이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대만 국민은 4번째 외면당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하고 있다. 역사를 되돌아봄으로써 중대 국면에 접어든 미국-대만 관계를 조망하는 4편의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뉴스투데이=임방순 前 국립인천대 교수] 국제정치 전문가들은 2024년 리스크 중 하나를 ‘트럼프의 재등장’이라고 한다. 트럼프가 올해 11월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면 국제질서 전반에 큰 변화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대만 문제에 대해서 트럼프는 입장 표명을 회피하고 있다. 1월 21일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재집권 시 중국의 침략으로부터 대만을 보호할 것이냐”라는 질문에 “대만이 우리의 반도체 사업을 모두 가져갔다”라고 동문서답식 답변을 했다.
그는 2023년 6월 로이터 통신과 인터뷰에서는 “나는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경우 미국이 군사적으로 대만을 지원할지에 대해 얘기하지 않겠다. 그 이유는 내 협상 입지를 해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지난 4년간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중국의 위협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대만을 협상 카드로 보겠다는 속셈이다.
■ 트럼프의 재등장 가능성에 민감…대만은 미국이 저버린 역사 잊지 않아
미 언론은 트럼프가 백악관 재입성에 성공할 경우 ‘대만을 포기할 수 있다’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고,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트럼프 2기 안보정책 전망을 두고 “트럼프는 왜 작은 섬나라 때문에 미국이 핵무장한 강대국(중국)과 전쟁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만을 포기하는 거래를 할 수 있다”라는 다소 과장된 분석을 내놓았다.
대만 국민은 불안하다. 그들은 현 바이든 대통령이 “중국이 대만 침공 시 군사개입을 하겠다”라고 3차례에 걸쳐 공개적으로 언급했어도 ‘과연 미국이 병력을 파견해 대만을 도울 것인가’라는 의문을 떨쳐버리지 못한 상태에서 트럼프의 재등장 가능성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대만은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대만을 저버린 3번의 역사를 잊지 않고 있다. 1편은 미국이 1940년대 중·후반 국공내전에서 장제스(蔣介石) 국민당을 포기했던 사실을 살펴보겠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이어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버마-중국 운남성 쿤밍(昆明)으로 이어지는 ‘원장(援蔣) 루트’로 장제스에게 전쟁물자를 지원해 주었다. 미국이 장제스를 지원한 이유는 ① 일본군을 중국에 고착시켜 태평양 지역으로 전환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과 ② 장제스 국민당이 중국을 장악한다면 향후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긍정적일 거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때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들은 중국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장제스를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 초청했다. 그러나 중국이 전쟁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판단하자 전후 처리가 주요 의제였던 1945년 2월 얄타회담에는 초청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국민당의 무능이 드러났고 부패가 심해져 장제스는 연합국의 신뢰를 잃어갔다. 루즈벨트 미 대통령은 장제스에 위임한 연합군 중국전구 지휘권을 중국 주둔 사령관인 스틸웰 장군에게 넘기는 방안도 고려했다.
■ 미국, 국공내전 시기에 패배하고 있는 장제스의 국민당에 원조 중단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해인 1946년부터 국공내전이 시작됐다. 장제스의 국민당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초기에는 군사적으로 우세한 상황이었다. 미국이 1937~1948년에 국민당 정부에 제공한 금액은 46억 110만 달러였다. 이 중에서 무상공여 및 차관인 35억 2,300만 달러의 60%는 국공내전 직전인 1945년 8월 이후부터 제공됐다. 1945년 8월 당시, 국민당 군대의 253개 사단 중 39개 사단은 미국이 제공한 최신 무기와 장비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공내전 초기 장제스의 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국부군은 1947년 들어서면서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고, 중국 국민의 지지도 잃어가고 있었다. 고질적인 무능과 부패 때문이었다. 미국은 장제스를 언제까지 지원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장제스가 공산당과 통일 연립 정부를 구성해 안정되고 강력한 중국을 만들어 아시아에서 미국의 전략적 이익을 보호해주기를 기대했으나 장제스는 미국의 희망을 저버리고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1945년 12월, 마샬을 중국에 특사로 보내 장제스와 마오쩌둥(毛澤東)을 중재토록 했다. 미국은 장제스 중심의 친미 우파 정권을 세우고 공산당에게 지분을 줘서 참여시키면 중국 내전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중국공산당을 하나의 정치집단으로 인식하던 미국의 중재안은 몇 개월 후 결렬됐다. 마샬은 사태 악화가 국민당 책임이라며 ‘장제스 정부에 대한 원조 중단’을 건의했고, 트루먼은 지원 중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 장제스 대신 승리하고 있는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과 협력 가능성 모색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포기하면서 다른 대안을 선택했다. 그것은 ① 아시아 정책의 중심을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환하는 것이고, ② 중공(중국공산당)에게 유화정책을 사용해 중국이 소련의 위성국이 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중공이 소련공산당과 연계가 없고, 소련도 중국공산당보다는 장제스의 국민당을 지지하고 있어 중공과 소련을 분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중공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회유책을 취하였다. ① 1948년 가을부터 미국 군사고문단에 의한 국부군 훈련을 중지하고 그들을 철수시켰으며, ② ‘중국 원조법’에 따라 장제스를 지원하는 금액 중 집행되지 않은 수천만 달러를 회수했다. ③ 1949년 4월 공산당이 난징(南京)을 점령하자 미국은 중국주재 미국대사 존 스튜어트에게 국민당 정부를 따라 광저우(廣州)로 가지 말고 난징에 체류하면서 공산당 측과 접촉할 것을 지시했다.
장제스의 국부군은 1948년 후반부터 주요전투에서 패배하면서 1949년 12월 10일 대만으로 이전했다. 마오쩌둥은 이보다 2달 앞서 1949년 10월 1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신중국 건국을 선포하고 국민당이 최후 저항을 하는 대만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공 지도부는 대만을 중국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어 ‘대만 해방’ 의지는 확고했다.
이때, 미국은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밀려나고 있는 장제스 국민당에 더 이상의 미련은 없었고, 오히려 중국의 패자로 등장하고 있는 중국공산당에 관심을 보이면서 우호적인 신호를 보내고 접촉을 시도했다. 1949년 8월 5일, 미국 국무부가 발표한 ‘미중관계 백서(The China White Paper)’에는 “국민당 정부의 패배는 국민당 정부의 부패 때문이지 미국의 정책이 적당하지 않았거나 원조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라고 기술했다.
이처럼 미국은 국공내전 패전의 책임을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에 돌렸다. 백서에서 지적한 것처럼 미국이 국공내전에서 장제스의 국민당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국민당의 무능과 부패 때문에 스스로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2편에 계속)
◀ 임방순 프로필 ▶ ‘어느 육군장교의 중국 체험 보고서’ 저자. 前 국립인천대 비전임교수, 前 주중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前 국방정보본부 중국담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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