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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위기관리

대한민국을 구한 6·25남침전쟁 영웅 워커 대장의 72주기 추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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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입력 : 2022.12.23 16:11 ㅣ 수정 : 2022.12.24 19:55

미 8군사령관으로 부임해 한국을 구하고 전사한 워커 장군 추모행사가 영하 21도 혹한 속에 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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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튼 워커 장군과 그의 전사지(도봉역 부근) 비석 앞에서 열린 추모행사 시 통일한국국방포럼 대표 송재익(육사35기) 박사가 추모사를 낭독하는 모습. [사진=김희철]

 

[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 23일 오전 11시 도봉역 2번출구 앞에서 6·25남침전쟁 발발 후 美 8군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풍전등화의 국가위기시 대한민국을 구한 워커 장군의 72주기 추모행사가 열렸다.

 

시베리아의 매서운 삭풍이 몰아치던 체감온도 영하 21도의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이날 행사에는 6·25전쟁연구회, 통일한국국방포럼과 한국안보협업연구소가 공동 주관하고 방통대 황재윤(육사35기) 교수, 중앙대 김성근(육사44기) 교수 등이 참가했다.

 

이날 11시부터 워커 장군의 전사지인 도봉역 2번출구 건너편에서 현지추모식으로 시작된 추모행사는 이후 워커 장군의 추모기념비가 있는 워커힐 호텔로 이동해 14시부터는 추모비 주변 청소와 크리스마스 트리 설치 및 헌화 등으로 진행됐다.

 

통일한국국방포럼 대표 송재익(육사35기) 박사는 “61세의 나이로 6·25남침전쟁에 참전한 워커 대장은 최후 방어선이자 생명선인 낙동강 전선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헌신의 리더십과 뛰어난 기동전으로 북한군의 공세를 격퇴하여 인천상륙작전의 발판을 제공하고 대한민국이 건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세상을 떠신지 72주년이 되는 오늘, 워커 장군님도 먼 하늘나라에서 대한민국을 지켜봐주시며 하늘나라에서나마 즐거운 성탄절 보내시기를 기원드리고, 현재도 불철주야로 근무하는 주한미군 장병들에게 감사드린다”며 추모사를 낭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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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튼 장군과 ‘유령군단’이라는 별명을 얻은 미 20군단장 워커 장군(오른쪽) 모습. [사진=전쟁기념관]

 

 워커의 20군단은 공격 시 빠른 진격 속도로 선봉 역할해 ‘유령군단’ 별명 얻어

 

1889년 12월 텍사스주 벨턴에서 태어난 워커는 1912년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한 뒤, 프레드릭 펀스턴 준장 아래에서 멕시코 베라크루스 원정에 참여했고, 멕시코 국경 순찰 임무를 수행하면서 육사 3년 후배인 아이젠하워와 긴밀한 우정을 쌓기도 했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제5보병사단 기관총대대 중대장으로 참전했으며, 2개의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종전 이후에는 1923년부터 웨스트포인트(육사) 교관을 하다가 지휘참모학교를 수료했으며, 중국 주둔군 대대장을 역임한 후인 1936년에는 조지 마셜이 이끄는 5보병 여단 부여단장으로 근무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워커 소장은 제3기갑사단장으로서 유럽 전선에 참전했다. 그는 조지 패튼 장군 휘하에서 제20군단장으로 임명돼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여했고, 공격 시에는 당시 상상할 수도 없는 빠른 진격 속도로 선봉 역할을 수행해 ‘유령군단’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또한 워커 장군은 당시 메츠, 벌지전투 그리고 독일 본토 침공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십자무공훈장’도 수훈하고 중장으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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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남침전쟁에 급파된 워커 장군 모습. [사진=전쟁기념사업회]

 

종전 후, 시카고의 제5군 사령관직을 거쳐 1948년부터 주일 미 제8군 사령관으로 재직중이던 1950년 6월 북한에 의한 남침전쟁이 발발하자,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명령을 받아 미 24보병사단을 한국으로 이동(1950년 6월30일)시켰고 이어 워커 중장도 7월8일 한반도로 파견됐다.

 

대한민국에 부임 당시 미숙했던 장병들만으로 극도로 불리했던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면서 미 8군사령관 워커중장의 각오와 의지는 "낙동강 방어선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무조건 방어한다(Stand or Die)"였다. 

 

그는 "우리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고,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후퇴란 있을 수 없다"며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라고 부하들에게게 명령하면서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고 예하 미군들을 독려했다.

     

또한 그는 낙동강 전선 시찰 도중 차출돼 함께 전투를 하던 국군들에게는 “여기서 더 후퇴하면 내가 장례식을 치러주지 !!”라고 독설을 퍼부으며 전투의지를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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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지난 2010년부터 워커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던 용산 주한미군의 제8군 사령부 영내의 기념비 앞에서 촬영한 백선엽 장군 / (오른쪽) 6·25남침전쟁시에 대구지역 전선을 방문한 맥아더와 제8군 사령관 워커 장군 모습. [사진=연합뉴스 / 전쟁기념사업회]

 

워커가 전장에서 인상적이고 무자비한 명령을 하여 미군 장병의 희생을 강요한다는 반대여론이 미국 의회에서 일어나자 7월26일 대구를 방문해 현장을 확인했던 미 극동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 맥아더가 "군대에는 민주주의가 없다"라는 말로 워커 중장을 옹호하기도 했다.

 

고령으로 전역을 앞둔 장성이지만 명예를 위해서 ‘오기로라도 버틴다’식의 블도저이자 불독인 워커 장군의 성공적인 낙동강 방어선 전투로 북한군의 전투력은 바닥이 났고, 때를 맞추어 시도된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수도 서울을 수복하고 전세를 역전시켜 북진하게 됐다. (하편 계속)

 

 


◀김희철 프로필▶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소장(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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