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법’이 법사위 통과해 ‘보건인력 생태계’를 아름다운 순백으로 표백(漂白)하기를
[뉴스투데이=박시은 교수] 필자는 대학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인 동시에 국내에서 소수직군으로 30여 년을 살아온 ‘응급구조사’ 자격을 보유한 응급구조사다.
간호법이 국회 보건복지위 제1 법안소위를 통과한 시점에 영국의 저명한 자연·동물학자인 데이비드 애튼버러의 말이 떠오른다.
애튼버러는 “It is that range of biodiversity that we must care for - the whole thing - rather than just one or two stars”라고 했다.
직역하면 “우리가 돌봐야 하는 생물 다양성의 범위는 별 하나, 또는 두 개가 아닌 전체”라는 뜻이다.
국회와 대한간호협회(간호협회)에 우리 사회의 사회적 약자와 소수 전문 의료 직군의 ‘비명’을 대변하는 적확한 의미를 담고 있는 애튼버러의 말을 알리고 싶다.
먼저, 간호법이 법안 소위를 통과한 시점에서 투쟁적 수사나, 정치적 수사를 배제하고 이 법안이 가져올 다양하고도 ‘불행한 나비효과’에 대해 관련 법률의 현장 전문가로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 보고자 한다.
김민석 의원(더불어민주당·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이 대표 발의한 간호법안 검토보고서(수석전문위원 홍형선. 2021.4)를 보면 간호직역이 보건의료 취업생태계를 잠식하고 있다는 증거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간호사들은 무려 70~80여 곳의 업종으로 진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용은 그야말로 충격적이고 경악할 수준이다.
간호사는 △돌봄센터(아동복지법 제44조) △가정위탁지원센터의 상담원(아동복지법 시행령) △청소년복지시설의 종사자(청소년복지 지원법 시행규칙) △어린이집의 원장과 보육교사(영유아보육법 시행령) △입양기관의 종사자(입양특례법 시행규칙) △응급구조사 등의 탑승의무(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등에 의해 의료계 다양한 직군으로 진출할 수 있다.
‘이게 도대체 꼭 간호사가 해야 하는 일인가’라는 깊은 의구심을 넘어, 과연 법률 및 시행규칙 등의 입법 과정에서 국회와 행정기관의 역할에 대해 본질적 의구심이 든다. 입법권과 행정권이 정당한 절차(표면적 정당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과연 평균적 대한민국의 지성을 갖춘 국민과 환자 중 간호사가 병원을 뛰쳐나와, 어린이집 원장과 가정위탁지원센터, 돌봄센터의 원장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에 찬성하는 국민이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다시 말해 간호법의 입법 과정에서 인력 기준을 표 안으로 때려 박는 작업이 공정하게 반영됐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과연 해당 영역의 직군 대표 단체 및 시민들의 의견이 상식에 부합해 공정하게 반영됐다고 입법·행정 기관은 자신할 수 있을까.
일부 기업들의 골목상권 침해와 간호직군의 ‘보건의료업역’ 잠식 현상은 깊이 닮았다. 물론 간호사가 ‘간호(nursing) 스페셜리스트’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는 없다. 그들이 간호사답게 간호의 영역에서 본인들의 전문성과 업무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국민 또한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간호사가 모든 보건의료 영역의 스페셜리스트일까? 응급의료의 영역과 수난구호의 영역, 요양의 영역, 치과위생의 영역, 임상병리의 영역, 산업보건의 영역, 학교보건의 영역, 아동복지의 영역 등 그들은 단지 ‘제너럴리스트’에 불과하다.
간호는 ‘nursing’이다. 그러나 ‘nursing’이 emergency care(응급치료/처치)이며, medical(진료) 또 child welfare(아동복지)일 수 없다.
그곳에는 의사가 있고, 간호조무사가 있으며 요양보호사가 상주한다. 또 보육교사가 있고, 유아교사가 있고, 의료기사가 있으며 심리학을 전문으로 전공한 임상심리사와 응급구조사가 있다.
의사가 대한민국의 기득권 층이기 때문에 그간 일부 의사들의 태도가 싫어서, 그들이 미워서 이 간호법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일부 시민들의 감정적 주장과 그에 동조하는 정치권의 행태에 대해서는 면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보건의료종사자들은 간호사보다 더 열악하고 이직률이 높고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으면서 항상 기타로 치부돼 왔다. 또 간호사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국민은 잘 알지도 못하는 주관부서도 관심 두지 않아 그동안 보건의료종사자들에 대한 몰이해(沒理解)가 있어 왔다.
이 간호법은 보건의료종사자들에 대한 무관심에서 출발한 ‘폭력적 방임’의 결과다. 또한 간호법은 대한민국에서 소수보건의료종사자로 30년 50년을 살아온, 그 기타 직군인 보건의료종사자의 사다리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기계톱’이다.
응급구조사 직군은 삼풍백화점 참사 이후 적나라하게 노출된 대한민국 응급의료체계의 야만성과 후진성을 개선하기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탄생했다.
응급구조사들은 지난 1994년 관련 법 제정 이후 현재까지 30여 년 동안 응급의료체계의 현장에서 그야말로 근면한 노동자로서 응급환자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대한민국에 응급의학이 존재하고 그 손발 격인 응급구조사가 존재한 이후, 외상으로 인한 중증척추장애 환자의 비율은 급격하게 하락했다. 또 심정지환자의 생존율은 긍정적 개선 효과를 보여 재난대응의 전문성은 진보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30여 년의 세월 동안 응급이라는 스페셜리스트 한 영역에서 그야말로 ‘fit’(적절) 하게 응급구조사의 직군이 응급환자 필요에 부합하게 활용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한 ‘fit’한 순간마다 간호직군은 우리 응급구조사의 꿈을 번번이 좌절시켰다.
22년 전에는 응급구조사의 업무 범위 중 ‘응급의료에 종사한다’라는 업무규정이 삭제되고, 네 가지 정도(일반인도 행위가능한 2급 업무를 제외하면 네 가지에 불과하다)에 불과한 ‘시행규칙에 따른 업무범위’로 후퇴하게 된 불행한 역사의 순간에 간호협회가 있었다.
지난 2020년 ‘국민이 제안하고 개선하는 민생규제 혁신’공모전에서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한 ‘응급구조사 업무범위 적정화’를 반대하는 그 중심에도 역시 간호협회가 있었다.
예전에 간호사를 구하지 못해 문을 닫는 도서지역(취약지역) 응급실의 간호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토론회가 열린 적이 있다.
토론회는 간호사 또는 응급구조사로 그 인력 기준을 완화하자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는데 간호협회가 극렬하게 반대했다. 그 결과 도서지역의 응급실 인력 부족난은 더욱 심각해졌다. 실제 응급의료 취역지역의 응급실 중 많은 곳은 그 운영을 포기했다.
맛없는 떡이고, 먹지도 않을 떡을 다른 이에게 주는 것보다는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 낫다는 심보가 아니고 무엇인가? 반문치 아니할 수 없다.
또 ‘여초’사회인 병원에 적응하지 못하는 남자 간호사들이 지난 2005년 이후 쏟아져 나왔다. 당시 소방 119구급대원에 대한 사회적 존중과 대우가 좋아지는 현상과 맞물려 간호사들의 소방공무원 진출 현상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2011년 385명에 불과했던 소방공무원 간호사는 지난 2020년 3005명에 이르렀다. 연간 2만5000명씩 배출하는 간호사 영역에서 2000·3000의 숫자는 조족지혈(鳥足之血) 수준일 수 있으나, 연간 1500명 정도만을 배출하는 응급구조사 입장에서는 새우 등이 터지다 못해, 사형선고 수준이다.
응급구조학을 전공한 학생들은 어디로 가란 말인가. 4년 동안 응급 처치·구조만 공부해온 응급구조사보다 간호사가 구급대원에 더 적합하다는 말인가?
응급구조사와 간호사의 사회적 활동 영역이 중복되는 영역은 법률에 근거해 볼 때, 약 10곳에 이른다. 응급구조사 처지에서 거대한 간호직군이라는 공룡과 자리싸움을 해야 하는 곳이 10개나 된다는 말이다. 물론 그 10곳에는 지금도 법적·현실적 이전투구가 발생하고 있다.
간호사는 자리를 더 넓히기 위해 싸우고, 응급구조사는 생명을 연명하기 위해 싸운다. 그곳이 더 필요한 자들이 있다. 그리고 그곳이 아니면 살아가지 못하는 자들도 있다.
현행 의료법 체계 내에서 ‘보건복지부 내에, 간호사 단독직군 만을 위한 부서를 설립하게 하는 정도의 표현’으로 측정 가능한 간호협회의 그 무시무시한 힘 혹은 폭력적 결핍과 허기(虛飢)로 만들어낸, 영역을 가리지 않는 약 80곳이 넘는 진출 경로는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간호사 직군의 ‘무한한 허기’가 대한민국 소수 보건의료직역의 한 종사자로서 두렵다. 두려움을 넘어 공포 그 자체다.
대한민국 보건의료 인력구조를 ‘백의의 색깔’로 표백(漂白)하고자 하는 간호협회의 노력과 그 노력에 기름을 부어줄 이번 간호법의 표백(漂白)력은 두렵다.
백의의 색깔로 표백당하지 않기 위해 현장에서 20년을 싸워온 대한민국 보건의료인력 후발주자이며, 가장 사회적 소수인력인 응급구조사로서 이 두려움이 실재하는 힘으로 작동될 것이라는 그 넓은 우려는 더욱 공포스럽게 한다.
첨탑 위에서 완생(完全)을 누리는 의사의 그 ‘완고함’ 혹은, 그 ‘기득력’보다, 첨탑 아래 미생(未生)의 삶을 실제적으로 위협하는 간호사들의 폭넓은 표백력은 소수보건의료종사자들에게 더욱 치명적이다.
간호법이 부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해, 대한민국 보건의료 ‘인력생태계’를 백의의 그 아름다운 순백의 색깔로 표백(漂白)하기 바란다.
간호사가 간호와 멀어지고, 환자가 부르는 병원에서 멀어지는 이 기현상에 대한 대책은 간호법이 아니다. 확신컨대, 간호법은 간호사를 환자에게서 더 멀어지게 만들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국민을 대변하는 국회에 애튼버러의 “하나, 또는 두 개가 아닌 전체”라는 말을 전해본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고 <뉴스투데이>의 편집 방향과 무관합니다.
◀ 박시은 프로필 ▶ 전국응급구조학과 교수협의회 회장,대한응급구조사협회 등기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