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입력 : 2022.04.19 10:00 ㅣ 수정 : 2022.04.19 10:00
갓쓰고 도포자락 날리며 메리놀병원 신축 경비 모금한 파란 눈의 장군 할아버지
[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위트컴 장군은 피난민들의 어려운 생활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면서 판자촌을 자주 둘러보았다. 그는 어느 날 영도를 시찰하던 중 보리밭에서 고통스럽게 출산하는 산모를 보면서 조산원과 병원 건립 지원을 결심한다.
때마침 6.25남침전쟁 발발 두 달 전인 1950년 4월15일, 메리놀수녀회는 부산시 중구 대청동 4가 현 부산가톨릭센터 자리에 진료소를 열고 무료 진료를 시작했다. 부산 최초의 가톨릭 의료기관인 '메리놀수녀의원'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가난한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하지만 열악한 진료소의 입원 시설과 전문의료 인력 부족으로 휴전 이후 밀려오는 부상자와 피난민 환자들을 감당해낼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병원 측은 위트컴 장군과 AFAK의 지원을 받아 현재의 위치에 지상 3층, 160병상 규모의 종합병원을 증축하기로 결정했다.
1954년 7월29일 기공식과 함께 공사에 들어갔으나 신축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위트컴 장군은 사령관의 체면을 버리고 본인은 파란 눈의 갓을 쓴 노인으로, 메리놀 수녀회와 부대원들은 한복 서양인으로 단장하여 거리 가장행렬을 하며 모금 활동을 펼쳤고, 예하 미군 장병들도 월급의 1%를 기부하며 모금에 참여했다.
당시 메리놀수녀회의 요한나 수녀는 "1953년 10월 부산에 와서 간호사로 근무했는데 피란민 대다수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고 집도 없어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며 "부산역전 대화재 직후 하루에 화상 환자를 포함해 2000여 명의 환자가 몰려 병원이 미어터졌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병원 신축이 절실했는데 자금난을 겪자 위트컴 장군이 휘하 미군 장병에게 월급의 1%를 공사비로 내게 해 공사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위트컴 장군이 메리놀병원 신축뿐 아니라 침례병원, 복음병원, 성분도병원을 짓는 데도 재정적인 지원을 했다"고 증언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메리놀 종합병원’은 거리 가장행렬을 하며 모금 활동을 펼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착공한지 8년 만인 1962년 11월 지금의 자리에 준공할 수 있었다.
■ 위트컴 장군이 창작한 종합예술 작품을 관람하는 것 같은 부산의 재건 과정
현대적인 교통망을 구축하고 소방 장비의 진입로를 확보하는 중요한 도로 및 교량 건설사업도 추진했다. 국제시장을 통과하는 부민동로가 개통되었고, 메리놀 길을 완공함으로써 혼잡한 도심의 교통량을 줄이고, 메리놀 병원의 진입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위트컴 장군과 AFAK의 병원 건립 사업은 메리놀병원을 포함하여 7개의 병원을 목표로 진행됐다. 특히 메리놀병원은 총 160개 병상을 보유한 당시 한국 최고의 병원으로 건립됐는데, 병원 건립을 위한 미군들의 모금 캠페인으로 약 6만 달러가 모금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산의 대화재 재건 프로젝트는 위트컴 장군의 지휘 아래 체계적으로 진행됐다. 장군은 재건활동을 전담하기 위한 별도의 조직인 PMP(Pusan Military Post)를 신속히 구성했고, 관련 기관과의 협력을 위한 기구도 별도로 만들어 노력의 통합에 만전을 기했다.
주택 건설 사업은 도시 재건의 가장 중요한 분야로서 동래에 111가구의 주택단지와 영도에 109가구의 주택단지를 8월에 완공했다. 또한 UNKRA와 협력하여 공동 프로젝트로 1,100채의 주택을 추가로 짓도록 함으로써 부산의 주택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도록 했다.
또한 17개 학교에 대한 신축 및 수리 사업도 진행됐고, AFAK 프로그램은 특히 고아원 지원 사업에 역점을 두었다. 5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위트컴 장군은 군부대가 53개의 고아원을 직접 지원하게 했으며, 기술을 가르치고 취직까지도 지원했다.
이를 종합하면 1953년 11월부터 1958년 11월까지 총 6백여만 달러의 AFAK 예산이 투입됐는데, 1954년 6월까지 이미 3백여만 달러가 부산에 집중됐다.
예산사용을 살펴볼 때 동래, 송도, 영도 등 화재와 관련 없는 지역에서의 공사가 더 많았다는 것은 단순히 화재 피해지역에 대한 긴급공사가 아니라 부산 도시계획 전반을 염두에 두고 진행된 인류애적인 도시 재건 차원의 프로잭트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전후 복구를 위한 UN의 원조 방법으로서 1959년까지 1억2천2백만 달러를 지원했으며, 한미 상호안전보장법(MSA, Mutual Security Act)에 의해 미국정부가 직접 지원하는 방식으로 1961년까지 총 17억4천4백만 달러를 지원받게 만들었다.
위트컴 장군은 AFAK 기금은 물론 추가적인 예산 확보를 위해 UNKRA와 미국 정부에 의한 지원 방법인 FOA(Foreign Operation Administration)를 균형 있게 활용함으로써 부산 재건을 위한 최적의 지원 환경을 조성했다.
미국 정부 및 미군, UN, 한국 정부 및 한국군, 민간기업 및 부산 시민 등 다양한 조직과 관련된데다, 조직별 복잡한 예산체계로 효과적 지원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각 조직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냈고, 이들의 인류애적인 노력을 통합해 빠른 시간내에 놀라운 전후 위기극복의 성과를 올렸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 시행한 부산의 재건 과정에서 발휘된 위트컴 장군의 추진력은 마치 하나의 종합예술 작품을 관람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했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