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빗장 푸는 은행들···‘총량 규제’ 폐지 나설까
[뉴스투데이=유한일 기자] 지난해 하반기부터 대출을 조여왔던 시중은행들이 최근 빗장을 속속 풀고 있다. 정부의 고강도 규제에 따라 가계대출이 감소세를 이어가면서 대출 여력이 살아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선 시중은행들이 새 정부의 ‘규제 완화’ 기조를 선제적으로 반영한 것이란 의견도 나온다. 특히 후진적이란 지적을 받았던 대출 총량 규제가 폐지 등 금융 정책에 변화가 찾아올지 관심이 쏠린다.
25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은 한도 확대 등 대출 문턱을 일제히 낮추고 있다.
먼저 우리은행은 지난 21일부터 전세대출 한도를 기존 ‘임차보증금 증액분 내’에서 ‘갱신 계약서상 임차보증금 80% 이내’로 상향했다.
예로 전세보증금 4억원을 가진 세입자가 갱신 계약 시 보증금이 5억원으로 올랐다면 지금까진 인상분인 1억원만 대출이 가능했지만, 앞으로는 5억원의 80%인 4억원까지 빌릴 수 있다.
또 전세대출 신청 기간도 잔금 지급일 또는 전입일 중 빠른 날로부터 3개월 이내까지 신청할 수 있도록 했다. 그동안 제한해 온 1주택자 비대면 전세대출도 재개한다.
우리은행에 이어 신한은행과 하나은행, 농협은행도 이날부터 같은 조건을 반영하기로 했고, 국민은행은 30일부터 적용한다. 5대 시중은행 모두 대출 문턱을 낮춘 셈이다.
시중은행들의 이 같은 태세 전환은 대출 여력 확보 및 수익성 제고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정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와 저금리 기조 속 폭증한 가계부채를 억제하기 위해 지난해 10월 대출 총량 규제 카드를 꺼냈다. 은행들이 취급하는 가계대출 증가율을 전년 5~6%에서 4~5%로 조여 관리하겠단 것이다.
금융당국은 실수요자 보호를 위해 총량 규제에서 전세대출을 제외하면서도, 급격한 대출 증가세를 막기 위해 취급 기준을 강화하라고 권고했고, 은행들은 협의를 통해 이를 이행했다.
하지만 최근 시중은행들이 높였던 전세대출 기준을 재조정하고 있는 건 그간 이어진 규제 영향으로 가계대출이 감소세로 접어든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은행들이 전세대출 한도를 지난해 수준으로 되돌릴 만큼 대출 여력에 여유가 생겼단 얘기다.
실제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말 가계대출 잔액은 1060조1000억원으로 지난해 12월부터 3개월 연속 줄었다. 가계대출이 3개월 연속 감소세를 보인 건 2004년 한국은행 통계 작성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실수요자 피해 방지를 위해 대출 취급 확대 결정을 내렸다”며 “금리 인상과 정부 규제로 가계대출이 감소하고 있기 때문에 총량 범위 안에서 실행할 수 있는 여력도 늘어났다. 대출 확대를 통한 수익성 제고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오는 5월 들어설 윤석열 정부의 규제 완화 기조를 시중은행들이 선반영했다는 분석도 있다. 현 정부의 금융 규제에 대해 윤 대통령 당선자가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취임 후 대대적 손질이 이뤄질 것이란 관측이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은행권에선 차기 정부가 총량 규제 자체를 폐지할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이미 가계대출이 감소 전환한 상황에 일률적 총량 규제가 오히려 혼란을 부추겼단 비판이 제기돼 왔기 때문이다. 굳이 총량을 묶는 충격 요법이 아닌 시장에 맡기는 구조가 형성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자유 시장 경제 체제 내에서는 개인들이 알아서 대출을 받고 상환을 하는 건데, 총량 규제나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등으로 정부가 인위적으로 통제하는 건 시장 경제 원칙에 맞지 않다”고 말했다.
다만 급격한 규제 완화가 자칫 억눌렸던 가계부채 재증가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도 잔존한다. 차기 정부는 주택담보대출비율(LTV) 80% 상향을 예고하고, 총량 규제·DSR 조정도 검토 중이다. 은행들이 대출 문턱을 계속 낮추면 대출 가수요가 몰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시중은행들도 차기 정부 출범 이후 변할 금융 정책을 예의주시하는 분위기다. 정부와 금융당국이 앞으로의 경기 상황 등에 대한 논의 후 규제 완화 정도를 결정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지금으로써는 총량 규제가 폐지 등 정책 변화를 예단하긴 어려운 상황”이라며 “정부는 물론 한국은행이나 금융위원회 등 여러 기관 수장들의 성향도 반영된 금융 정책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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