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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위기관리

전후 위기극복의 숨은 공로자 벽안의 한국인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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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입력 : 2022.02.04 14:29 ㅣ 수정 : 2022.02.05 22:23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 시키기 위해 화기·장비 지원 등 전력 보강에 매진한 위트컴 제2군수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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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2월 한국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와 이승만 대통령이 함께 전선을 시찰하고 경무대에서 대담을 나누는 모습. [사진=국방부]

 

[뉴스투데이=김희철 소장] 6·25남침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던 1952년 유혈만을 강요하는 진지 고착전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유엔군의 지원없이 우리 자체의 병력과 화력만으로는 155마일에 달하는 전선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이자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밴플리트는 “미군이 장기적으로 한국에 머무를 수는 없으니 앞으로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해 독자적인 방어에 나서야 할 것”이라며 한국군 잔력증강의 필요성을 최초로 언급했다. 

 

1952년 말, 밴플리트는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에게 “곧 미국의 새 대통령 당선자이자 자신과 육사 동기였던 아이젠하워가 한국을 방문할 수 있으니 그 때 당신이 한국군 전력증강의 필요성과 세부 계획을 브리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당시 미 8군의 게스트하우스였던 지금의 서울 필동 ‘한국의 집’을 백선엽 장군에게 2주 동안 제공하면서 라이언 미 군사고문단장 등 자신의 참모들과 함께 한국군 전력증강의 밑그림을 작성할 수 있도록 지원도 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 경선 때 ‘6·25남침전쟁의 휴전 필요성’을 선거공약으로 강조하고 다녔던 아이젠하워가 그해 12월3일 한국을 방문하자 밴플리트가 계획한 대로 백선엽 장군의 브리핑이 있었다. 

 

백 장군은 “현재 한국군은 10개 사단으로 이뤄져 있는데, 추가로 화력과 장비를 제대로 갖춘 한국군 20개 사단으로 증강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등이 맡고 있는 지역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보고 말미에 “미군 1개 사단이 주둔하는 비용으로 한국군 2~3개 사단을 창설할 수 있으며 미국이 협조하면 2년 안에 증강을 완료할 수 있다”고 한 마디를 더 보태며 강하게 설득했다.

 

브리핑을 경청한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는 “원칙적으로는 동의한다”며 표정이 좋아졌다. 한국에서의 전쟁을 하루빨리 끝내고 미군을 철수시키고자 했던 그가 한국군을 증강해 휴전선의 대부분을 한국군에게 맡기고자 하는 계획 자체에 반대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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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과 밴플리트 8군 사령관이 강원도 양양 FTC를 통해 철저한 훈련을 마치고 창설된 부대원에게 화기를 수여하는 장면(왼쪽)과 2014년10월, 6.25남침전쟁을 전후해 양양 지역에서 창설된 12개 부대의 창설기념행사 모습 [사진=국방부/양양군청]

 

위트컴 장군, 밴플리트 장군 도와 한국군 전력증강에 매진한 숨은 공로자

 

현리전투에서 국군 2군단이 대패하자 밴플리트가 국군 전투력 강화를 위해 ‘야전훈련사령부(FTC)’ 운용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이에 힘입어 양양에서는 총 12개 부대가 창설됐다. 

 

그 중 8·12·15사단은 아이젠하워에게 한국군 20개 사단 증강계획을 브리핑하기 이전에 창설됐다. 이후 20·21·22·25사단이 각각 창설됐으며 정전협정 이후에도 27사단(1953년 9월) 등의 부대들이 양양 송암리 등지에서 창설됐다. 

 

결과적으로 양양을 비롯한 각지에서의 한국군 재건은 밴플리트 장군과 그가 만든 ‘야전훈련사령부(FTC)’에서 시작되었으며, 이에 따라 밴플리트 장군은 일명 '한국군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전투력 강화는 ‘야전훈련사령부(FTC)’에서의 교육훈련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전력을 증강할 수 있는 장비와 화기가 갖춰져야 했다. 

 

6·25남침전쟁 막바지인 1953년 미군 제 2군수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한 위트컴 장군은 마치 한국군 재건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밴플리트 장군을 내조하듯이 한국군 전력증강과 유엔군의 군수물자 확보및 정확한 수송을 위해 많은 역할을 했다

 

3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은 한국군을 위해 탄약 70만 발, 소화기 50만 정, 화포 1500여 문, 차량 2만여 대 등 200만t 규모의 장비와 군수물자를 최전방으로 실어 날랐고, 후방지역 치안 유지는 물론 전쟁포로와 피난민 관리 임무도 수행했다. 

 

이로써 6·25남침전쟁 중반에 10개 사단 규모였던 한국군이 1953년 정전협정 무렵에는 20개 사단 56만 8994명의 대군으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대군이 된 것은 일명 '한국군의 아버지'라 불리던 밴플리트 장군의 ‘야전훈련사령부(FTC)’ 운용 등의 한국군 재건 노력부터였지만, 숨은 공로자였던 제 2군수사령부 사령관 위트컴 장군의 한국군 전력증강에 매진한 공도 컸던 것으로 평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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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11월27일 밤에 발생한 부산역전 대화재 극복을 위해 긴급 출동한 미군들 모습 [사진=연합뉴스]

 

과중한 업무로 피로한 상태였던 위트컴 장군에게 다가온 또 하나의 위기

 

정전협정 체결로 치열한 전투는 일단 마무리됐지만 제 2군수사령부 사령관 위트컴 장군은 책상 위에 있는 서류들을 결재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특히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유엔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전했던 미군들의 복귀와 한국군 재건을 위해 한국군에게 인계할 장비와 화기 및 추가적인 지원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쟁복구 사업을 담당하는 ‘AFAK(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미군대한원조)’ 프로그램 업무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 복구 및 한국군 전력증강을 위해 연일 계속된 후속조치로 피로한 상태였던 어느날 밤에 위트컴 장군 방의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1953년 11월27일 밤 8시30분경에 부산 영주동 판자촌에서 시작된 불은 갑자기 불어온 강풍으로 지역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며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번져 동광동을 지나 중앙동 부산역까지 번지며 일대가 거의 전소되는 비극이 일어났다는 보고였다. 

 

불길은 이튿날 새벽 6시경 잡혔으나, 29명의 사상자와 6천여 세대 3만 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주택 3,132채 및 일제강점기 조선과 일본을 잇는 관문 역할을 했던 옛 경부선 부산역사와 부산우체국이 전소돼 버렸다.

 

게다가 당시 광활한 지역의 일제 건축물과 6·25남침전쟁을 지원했던 미군 막사 같은 주요 건축물이 모두 전소되며 큰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에 위트컴 장군은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음편 계속)

 

 


◀ 김희철 프로필 ▶ 현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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