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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137)

부대이전사업을 통해 얻은 보람과 애환(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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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입력 : 2021.12.28 13:30 ㅣ 수정 : 2022.01.04 09:03

필동은 우리 현대사에서 100년 가까이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권력의 숨겨진 중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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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현재 필동에 조성된 ‘남산골 한옥마을’ 지역은 시내 중심부에 있음에도 우리 현대사에서 100년 가까이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숨겨진 권력의 핵심 중심지였다. 

 

1904년 일제의 ‘한국주차군사령부’가 차지했다가 4년 뒤 일본군은 용산으로 이전하고, 이곳에는 ‘조선헌병대’를 주둔시켰던 곳이었고 해방 뒤에도 ‘한국군 헌병대’가 사용했다. 

 

그러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쿠데타 이후 수도경비사령부(1984년 수도방위사령부로 개칭)를 설립해 이곳을 사용하게 하였다. 

 

이처럼 남산을 관통하는 삼일대로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중구 필동과 예장동에 각각 수방사와 국가안전기획부라는 군부정권 속에서 최고의 권력기관이 남산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독재정권 시절 ‘남산’은 우리에게 공포의 상징이었던 곳이다. 

 

1991년 수방사가 현재의 남태령으로 이전한 뒤 1998년 한옥마을이 조성되고 일반에게 처음으로 공개됐다. 

 

또한 1995년 예장동에 있던 안기부가 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이제 남산 북측 사면은 온전히 일반인에게 돌아왔다. 더불어 용산 미군기지가 완전히 빠져나간 뒤 남산의 남측 사면까지 온전히 우리 시민에게 돌아왔을 때의 자유롭고 평화로운 모습을 상상하며 기대해본다.

 

이렇게 떠난 수방사의 터는 1998년 이곳에 옮겨놓은 한옥 5채 등으로 한옥마을이 조성돼 일반에게 공개된 뒤 최근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주요 관광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한편 한옥마을 위로는 조선시대 이성계의 한양 천도가 이루어진 지 600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여 1994년 ‘서울 천년 타임캡슐'을 매설했다. 

 

이것은 한양 천도 1천년이 되는 2394년에 개봉하기로 하였으며, 보신각종을 본떠서 만든 여기에는 우리 시대 모습을 후대에 알리기 위해 아기 기저귀, 담배, 팬티스타킹, 공무원 급여명세서 등 600여 점의 물품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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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수방사 자리에 조성된 필동의 ’’남산골 한옥마을‘과 ‘서울 천년 타임캡슐' 모습 (사진=김희철)

 

박래호 소령의 창의적이고 기민한 협업 능력과 故 이영대 장군의 근면과 철저함으로 현재의 모습을 창출

 

1961년 수도경비사령부로 창설하여 1984년 11대 사령관 이종구 장군 때부터 수도방위사령부로 개칭되었다.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권력의 숨겨진 중심지인 부대를 필동에서 남태령으로 이전하는 사업은 만만하지 않았다.

 

전임 사령관 구창회 중장(육사18기)이 대통령에게 수방사 이전 계획을 별도로 보고하고 재가를 받아 유명한 지관이 풍수지리를 고려하여 본청 위치를 확정한 후, 신임 김진선(육사 19기) 사령관이 부임한지 얼마 않되어 직할대 건물까지도 거의 완성되었다.

 

특히 부대 환경조성을 위한 조경 예산이 부족하여 문제가 있었는데 그때 통신단 정작과장 박래호 소령(육사 36기)의 현명하고 적시적인 협업 능력이 돋보였다.

 

숨은 공로자 박 소령은 주변 도로 및 빌딩 건축 공사장과 협조하여 그곳에서 폐기시키거나 이전해야 할 좋은 나무들을 부대이전 지역으로 옮겨와 본청과 직할대 및 도로 주변에 조경을 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박 소령의 창의적이고 기민한 협업 능력 덕택에 신축한 남태령 수방사 영내의 도로와 부대 조경이 현재의 모습으로 아름답게 꾸며지게 되었다. 이러한 개인의 노력은 당시나 현재까지도 그곳에 근무하는 많은 장병들이 몰랐고 잊혀졌던 사실이었다.

 

또한 당시의 참모장 故 이영대 준장(Ro4기)은 부대이전 당시에 많은 업적을 남기고 영전하여 28사단장을 역임한 뒤 육본 감찰감 근무시에 과로와 지병으로 순직하여 동작동 현충원에 묻혀 지금은 이웃 남태령 수방사의 발전을 지켜보고 있음을 기억하며 추모해야 한다.  

 

그는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소탈하게 모든 현장을 뛰어다녔고, 일일이 확인하며 지도했던 그의 근면과 철저함 덕분에 남태령 수방사는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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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 수방사 통신단 정작과장을 역임한 박래호 장군의 국군통신사령관 재직 시절 모습과 우측 동작동 현충원에 안장되어있는 이영대 장군의 묘비 (사진=김희철)

 

故 김영주 소령, 치밀하고 섬세하며 탁월한 필력으로 부대이전 계획을 수립

 

해가 바뀌어 1991년이 열리자 남태령 부대이전 사업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우선 직할대별로 선발대들이 먼저 이동하여 부대 주둔지 주변과 막사를 정리하며 본대가 이동할 준비를 했다.  

 

공병부대와 건설회사에서 남태령 이전지역의 시설 공사를 하고 군수참모부에서 점검하며 확인했지만 사령부 전체가 이동하는 계획은 작전과에서 작성하여 사령관에게 보고하고 시행했다.

 

이때 작전과 차선임 장교인 김영주 소령(육사36기)의 치밀하고 섬세하며 탁월한 필력이 돋보였다.

 

그는 부대이동 계획을 작성하여 필자가 그렇게도 힘들고 어렵게 검토를 받아야 했던 00과장의 결재를 단번에 통과하여 사령관의 승인 결재까지 완료하고 예하부대 및 참모부에 통보했다.

 

참고로 故 김영주 소령은 중령 진급하여 3사단 수색대대장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주요 보직에서 탁월하게 참모활동을 하다가 대령으로 선발되었지만 62사단 참모장 근무시에 과로로 순직하여 우리 군은 아까운 인재를 잃었다.

 

반면에 필자는 울타리와 사무실 및 상황실 주변 경계진지 구축을 담당하고 있어 수시로 남태령으로 이동하여 각 곳을 다니며 진지 위치를 선정하고 공사를 하는 업체가 계획대로 시행하는지 설계도를 들고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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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식 화단진지 (사진=김희철)

 

사무실과 상황실 앞에 구축하는 진지는 도로 등 환경을 고려하여 융통성있게 옮길 수도 있는 가각진지와 화단진지로 설치했다.

 

하지만 00과장이 대령으로 선발되어 진급 예정자로 상황실장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작전과의 주업무인 진지 구축에 관여하면서 또다시 질타의 화살이 필자에게 날아오며 어렵고 힘든 애환이 또 시작됐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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