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입력 : 2021.05.20 14:55 ㅣ 수정 : 2021.05.20 14:55
미 8군사령관 워커 장군, 낙동강 대안의 적 주력부대를 제압하기 융단폭격을 단행……
[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서울 점령후 남하를 계속했던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을 추격해 1950년 8월1일 진주∼김천∼점촌∼안동∼영덕을 연결하는 선까지 진출했다.
이때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수안보에, 1군단은 김천에 2군단은 안동에 각각 사령부를 두고 있었고, 7월20일에는 김일성이 수안보까지 내려와 “8월15일까지는 반드시 부산을 점령하라.”고 독촉했던 직후였다. 따라서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매우 초조한 상태였다.
7월 말 국군과 유엔군의 낙동강방어선을 공격하는 북한군의 작전개념은 중앙의 주력으로 경부도로를 따라 대구를 공격하고 동측은 동해안 도로를 따라 포항∼경주 방향으로, 서측은 창녕 서쪽의 낙동강 돌출부를 공격해 유엔군의 병참선을 차단함과 동시에 남해안을 따라 마산∼부산 방향으로의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는 4개의 공격 축선에서 동시 공격으로 낙동강방어선을 돌파하고 부산을 점령하려는 의도였다.
1950년 8월 초 낙동강방어선을 공격하는 북한군은 가용부대의 절반에 해당하는 주력 5개 사단을 대구 북방에 배치해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따라서 8월 공방전의 승패는 대구 북방의 전투결과에 따라 결정될 정도였고 만약 유엔군이 패배할 때는 인천상륙작전도 어려운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대구에 있던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장군의 마음은 급했다. 실제로 맥아더 총사령관이 "낙동강 전선에서 아군이 북상하지 못하면 인천상륙작전은 그만둔다"고 했기 때문이다.
반면 북한군 중앙의 주력이 지향한 지역에 아군 방어병력은 총 3개 사단(국군 1·6사단, 미 1기병사단) 뿐이었으며, 그나마 인접 사단들이 서로 연결되지 못한 상태였다.
적의 주접근로를 담당한 국군 1사단은 낙동리 부근으로 도하하는 적을 몇 차례 격퇴시켰으나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6사단은 북한군과 공방전을 반복하다가 결국 용기동에서 위천으로 물러났다. 왜관일대의 미 1기병사단은 역습을 전개해 낙동강을 도하하려는 적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무렵인 8월11일 육군본부는 위의 상황도와 같이 국군의 방어선을 303고지(작오산, 왜관 북쪽) ∼다부동 ∼군위 ∼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축소 조정했다. 이에 따라 국군 1, 6사단은 다부동∼군위 선에서 대구를 방어하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미 극동공군사령부는 8월 16일 낙동강변 왜관부근에 이른바 융단폭격을 단행했다. 이는 대구 정면이 위태롭다고 판단한 워커 장군의 미 8군사령부가 낙동강 대안의 적 주력부대를 제압하기 위해 유엔군사령부에 건의해 실시된 폭격이었다.
융단폭격의 성과는 명백하게 확인되지 않았으나, 북한군 지휘관들에게 대단히 큰 심리적 충격을 준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18일 가산에 침투한 적이 사격한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지자 대구의 위기가 고조되었다. 그 충격으로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하고 피난령이 하달되는 등 대구일대가 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 백선엽 장군의 1사단, 북한군 3개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끝까지 저지 격퇴하며 승리
한편 미 1기병사단 정면의 적은 강을 건너오는 동안 많은 손실을 입고 접촉을 단절함으로써 소강상태가 유지되었고, 국군 6사단 지역에서도 유엔 전폭기의 지원을 받아 이를 격퇴함으로써 적의 대구 공격은 국군 1사단 방어지역인 다부동 축선에 집중되었다.
유학산∼다부동∼가산선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은 약 2만1500명 병력과 T-34전차 약 20대(후에 14대 증원) 및 각종 화기 약 670문으로 필사적인 공격을 해왔다.
백선엽 장군의 1사단은 집요한 공격을 끝까지 저지 격퇴함으로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또한 다부동 방어전투를 승리하게 된 배경에는 미 8군의 적절한 예비대 투입도 큰 기여를 했다.
마침내 8월 20일 정면공격을 시도했던 적은 더 이상 다부동 전선을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유학산 정면을 공격했던 북한군 15사단은 영천 방면으로 전환했다. 이로써 8월의 다부동 축선의 위기는 해소되었다.
55일간이나 계속되었던 다부동지구 전투에서 북한군 2만여 명과 국군 1만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인명 피해가 있었다. 그 결과 당시 투입된 북한군 3개 사단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 주어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장맛비가 내리던 9월이 되자, 드디어 김일성 군대의 낙동강 전선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김점곤 중령의 국군 1사단 12연대가 최초로 다부동 혈로를 뚫고 12㎞를 북상했기 때문이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