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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92)

직업군인의 유별난 지휘책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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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입력 : 2021.03.03 10:36 ㅣ 수정 : 2021.03.03 15:57

강원도 최전방 GOP 및 해안 경계 임무를 맡는 22사단은 ‘별들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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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17일 오후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의원 질의를 듣고 있는 서욱 국방부 장관과 귀순상황 요도 [사진=연합뉴스/국방부]

 

[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 2월 16일 오전 4시 20분경 강원도 고성으로 ‘오리발 헤엄 귀순’한 북한 남성 A 씨를 GOP민간인통제선 감시 폐쇄회로(CCTV)로 최초 인지했다. 하지만 이후 8km씩이나 남쪽으로 더 내려오도록 허용해 경계작전은 실패했고, 이번 사건으로 경계시스템 뿐만 아니라 군 지휘보고 체계에도 허점이 드러났다. 

 

강원도 고성지역 일대의 최전방 및 해안 경계 임무를 맡는 22사단은 ‘별들의 무덤’으로 불릴 정도로 바람 잘 날이 없는 부대이다.

 

지난 1984년 병사가 GP에 수류탄을 투척해 20명 가까운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월북한 사건을 비롯하여 2005년 황만호 월북, 2009년엔 민간인이 철책을 절단하고 월북하는 사건 등으로 당시 사단장이 문책을 당했다. 2012년에도 ‘노크 귀순’사건이 있었고, 2014년엔 임 모 병장 총기 난사 사건으로 사단장과 참모들이 줄줄이 지휘 및 참모 책임을 지고 보직 해임됐다.

 

지난해 11월엔 이 지역에서 북한 민간인이 철책을 뛰어 넘어 귀순하기도 했다. 경계가 뚫릴 때마다 문책과 대책 발표가 있었지만 개선이 되지 않자 22사단에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됐다. 

 

국방부는 22사단에 대해 이르면 이달 초부터 현재 병력 및 부대구조와 작전 책임구역 범위의 적정성, 과학화 경계·감시장비 성능 등의 진단 작업에 착수할 계획이라고 정부 관계자가 3월1일 밝혔다. 군 일각에선 22사단을 ‘재창설’ 수준으로 완전히 개조하는 작업이 본격화 될 예정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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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부터 6·25 남침전쟁 기간중 유엔군 총사령관을 역임한 맥아더 원수(~1951년 4월), 리지웨이(∼1951년 12월), 밴플리트(~1952년 5월), 클라크(~1953년 10월)대장 모습 [사진=전사편찬연구소]

 

 6·25 남침전쟁 기간 중에도 지휘책임은 예외가 없어...

 

6·25 남침전쟁 기간 중에 유엔군 총사령관(미군 사령관)에게도 지휘책임은 예외가 아니었다. 최초 사령관인 맥아더(~1951년 4월) 원수는 1.4후퇴의 책임과 만주 폭격 등 워싱턴과 반대되는 공세적인 견해를 내놓았으며 이에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의 지휘책임을 물어 해임했다. 

 

그 후임이었던 리지웨이(1951년 4~12월)와 밴플리트(1951년 12월~1952년 5월) 대장은 지휘책임과 무관하게 6~8개월 동안 단기간 지휘했고, 4번째인 클라크(1952년 5월 ~1953년 10월) 대장이 가장 장기간인 17개월 동안 중공군 공세와 맞서 유엔군을 지휘하다가 정전협정에 조인했다.

 

이때 밴플리트 대장은 소타격 작전계획(Plan Cudgel), 대타격 작전계획(Plan Wrangler), 해시계작전(Operation Sundial) 등을 기획하여 전선을 북으로 더 밀어붙이려 하였다. 그러자 미군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중공군과 북한군은 한반도 상공에 세균에 감염된 곤충을 대량 살포했다고 비난하는 심리전을 전개하며 유엔군 지휘부를 흔들어 군사작전과 정전협상에 영향을 주었다.

 

아울러 미 8군사령관 직책도 계속 교체 되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의 여건을 만들며 용전했던 워커 중장이 교통사고로 순직하자 후임으로 리지웨이, 밴플리트 등이 부임했다. 하지만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영전 및 겸직하는 등의 사유로 5번씩이나 교체됐다.

 

반면에 북한 인민군은 김일성이 1950년 7월4일 최고사령관으로 취임해서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을 체결할 때까지 계속했고,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북진하여 한반도 통일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항미원조(抗米援朝)를 외치며 불법 침범한 중공군의 최고사령관 펑더화이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사실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인 6·25 남침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소련의 T-34, 야크기 등을 지원받아 북한군 7개 사단으로 남침했는데, 이 중 4개 사단은 모택동 팔로군에서 훈련받은 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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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또한 33개월의 전쟁기간 동안에 북한 인민군이 주축이 된 전투는 개전 초기부터 유엔군이 압록강으로 북진할 때인 3~4개월이었고 상단의 북진 상황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중공군과 북한군의 배치와 같이 나머지 약 30개월은 대부분이 중공군과의 전투였다. 

 

따라서 6·25 남침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내전이 아니다. 소련과 중공이 주도한 공산주의·전체주의·제국주의 세력의 일방적인 침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하편 계속)

 

◀김희철 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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