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신화 만든 김성은 장군(상)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해병대 출신 최초로 국방장관을 지낸 고(故) 김성은 장군(1924년 3월14일~2007년 5월15일)은 19세의 나이로 만주 하얼빈 농대를 수료한 엘리트로 해방 이듬해인 1946년 4월 1일 해군병학교를 특임으로 졸업하고 해군 참위(소위)로 임관했다.
한편 해병대는 1948년 ‘여순 10.19사건’ 이후 상륙작전 부대의 필요성에 따라 창설됐다. 이는 여순사건 진압을 위해 해군 함대를 이끌고 출동한 신현준 중령의 “상륙군 없이 반란군을 완전 진압할 수 없다”는 보고를 받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의 지시에 의해 이뤄졌다.
그리하여 해병대는 1949년 4월15일 진해에서 380명의 규모로 창설되었고 초대사령관에 신현준 대령이 임명되었다.
해병대사령부 창설당시 중령으로 진급한 김성은은 참모장으로 보임되어 해병대의 육성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 공비토벌 지휘관에 임명된 그는 지리산에 근거한 진주 일대의 공비를 소탕했고, 진주에서 제주도로 이동해 한라산 일대의 공비를 토벌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6.25 남침전쟁이 발발하자 김 중령은 500여명의 해병대원으로 구성된 ‘김성은 부대’를 지휘해 전쟁 초반 남원·함양·진주지구에서 지연작전을 전개했다. 특히 마산 진동리 전투와 통영 상륙작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 남로당 좌익 계열의 준동과 경찰에 대한 적개심으로 ‘여순 10.19사건’ 발생
해병대 창설의 계기가 된 ‘여순 10.19사건’은 1948년 10월 19~27일 간 전라남도 여수·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국방경비대 14연대 소속 군인들의 반란과 여기에 호응한 좌익계열 시민들의 봉기가 유혈 진압된 사건이다.
1948년 10월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14연대는 1946년 2월15일 광주에서 편성된 4연대가 모체이며, 여기에는 여순사건의 주동자였던 김지회, 홍순석 같은 좌익 계열 장교 외에도 지창수 등 사건을 직접 주도하게 되는 부사관들도 포진하고 있었다
또한 14연대 구성원들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경찰에 대한 적대적 감정도 봉기의 원인이 되었다. 창군 이전 국군은 경찰의 보조전력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아 경찰의 조롱거리가 되기 일쑤였고, 이같은 인식은 국군 창설 이후에도 쉽게 변하지 않았다.
1947년부터 14연대의 관할 지역인 전라남도 동부지역에서는 군·경간의 물리적 충돌이 세 차례나 발생하였으며, 모두 경찰에 유리한 결과로 종결되었다. 이는 14연대 병사들 사이에서 경찰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4연대의 반란은 좌익 계열 숙군의 위협과 연대의 제주도 파병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지창수 상사를 비롯한 연대 내 남로당계 부사관들의 급조된 계획에서 시작되었다. 10월 19일 오전 7시 육군본부로부터 14연대에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한 출항 명령이 하달되자 이 날 저녁 장교들이 부재한 틈을 타 부대원들을 연병장에 소집시킨 지창수는 연단에서 “경찰을 타도하고,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하자”며 부대원들을 선동하였다.
대부분의 사병들이 여기에 찬동하였고, 반대파는 즉각 사살되었다. 지창수를 신임 연대장으로 추대한 반란군은 즉시 여수로 진격하였다. 이때 반란에 참여한 인원의 수효에 대해서는 1,000~2,0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사실상 무방비 상태와 다름없던 여수는 쉽게 함락되었고, 반란군은 다시 병력의 대다수를 열차로 이동시켜 20일 오후에는 순천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순천에 파견 나와 있던 홍순석의 2개 중대와, 광주 4연대 소속 진압군도 반란군에 합류하였다. 사기가 높아진 반란군은 주변 지역으로 공격을 속행하였으며, 그 결과 22일에는 전남 동부 지역의 6개 군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때 경찰에 의한 고문 등의 폭력을 경험하기도 했던 좌익 청년들은 지역의 우익 인사·경찰관 및 그 가족을 보복심에 살해하기도 하였으며, 인민위원회에 의해 경찰서장 등의 우익 인사들이 처형되기도 하였다. 우익 인사들에 대한 보복·숙청 외에도 인민위원회는 토지개혁, 식량배급 등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20일에 개최된 미 군사고문단 수뇌부 회의에서는 광주에 ‘반란군 토벌 전투사령부’를 조직할 것을 결정하였다. 진압군 지휘는 육군총사령관(육군총참모장) 송호성 준장이 맡았고, 총 11개 대대가 진압작전에 나서게 되었다.
반란군과 진압군 간의 첫 교전이 순천시 서면 학구리에서 벌어졌고, 초전에 승리한 진압군은 그대로 진격하여 23일에는 순천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란군의 주력은 순천에서 도주하였으며, 진압군에 대항한 것은 잔여 병력과 무장한 시민들이었다. 이후 진압군은 기세를 몰아 인근 광양과 보성까지 수복하였다.
10월 24일, 반란군 토벌사령부의 송호성 준장이 이끄는 여수 공략부대는 여수시 미평동 일대에서 반란군의 기습을 받고 잠시 후퇴하였다. 여수 공략전이 잠시 소강 상태에 빠진 사이 지창수가 이끄는 반란군은 백운산과 벌교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작전 속행을 요구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진압군은 10월 25일부터 재차 탈환 작전에 나섰다. 장갑차, 박격포의 지원을 받은 4개 대대 가량의 병력과 항공기, 경비정이 동원된 포위전이 시작되었다. 이때 신현준 중령이 이끄는 해군 함대도 출동했다.
결국 10월27일 진압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 여수를 포기하고 지리산으로 입산한 반란군은 11월경부터 진압군과 간헐적인 교전을 벌이는 등 게릴라(빨치산)로서 활동하였다.
이에 국군은 이듬해까지 토벌 작전을 전개하여 여순사건의 주모자인 김지회, 홍순석, 지창수 등을 사살하였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게릴라 활동은 1950년 초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의 인명 피해도 끊이지 않았다.
1948년 10월 19일부터 27일까지 이어졌던 여순사건은 막대한 인명·재산 피해를 남겼다. 대략 2,000~5,00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됐고 재산 피해는 약 100억 원, 가옥 소실은 2천 호 가량으로 집계되었다.
■ 반란군 토벌 전투사령관의 비참한 말로와 '귀신 잡는 해병대' 창설
한편 반란군 토벌 전투사령관으로 진압군을 지휘했던 송호성 준장은 해방전에는 중국군에서 기병대대장, 연대장, 사단장 등을 역임했고, 1942년 한국 광복군에 들어가 5지대장을 지냈으며 1948년 8월15일부터 11월20일까지 대한민국 육군총사령관직을 수행했었다.
그러나 고령이었던 송 준장은 6.25 남침전쟁 발발 당시에 사령관직을 내려놓고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으며 갓 조직된 청년방위대 고문단장이라는 아무 실권도 없는 자리에 있었다. 그는 곧 서울에 입성한 북한군에게 잡혔고, 그들의 강요에 의해 국군의 북침설을 KBS에서 방송했으며, 이후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패주할 때, 송 장군은 북한으로 납북되었다.
그후 북한 정권에 이용만 당하다가 1958년에는 반혁명분자로 규정되어 평안남도 양덕의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1년 뒤인 1959년 70세의 나이로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아울러 여순사건에 따른 이승만 정부의 위기감은 군내의 좌파 세력을 색출하고자 하는 숙군사업의 강화로 이어졌고, 그 결과 5% 가량의 장병들이 군을 떠났으며, 이듬해인 1949년에는 '귀신 잡는 해병대'가 창설되었다. (중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