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공군 500회 폭격으로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단 14회로 폭파시킨 한국공군(하)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전쟁중이던 1951년 어느 날, 공군창설 7인 이었던 김영환 대령은 그의 형 김정렬(당시 공군참모총장) 장군의 집을 방문했었다. 형수 이희재 여사가 입은 붉은 치마를 보고 형수에게 붉은색 천으로 머플러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해, 목에 두르기 시작한 것이 ‘빨간 마후라’의 유래가 되었다.
육군 예비사관학교를 수료했으나 1948년 공군에 입대한 김영환은 전쟁 초기에 T-6 훈련기를 조종하며 폭탄과 수류탄을 직접 던져 적의 남하를 저지했다. 이후 김 대령은 1951년 9월28일에 강릉전진기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한국 공군 최초의 단독출격작전을 지휘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했다.
또한 그는 미 군사고문단으로부터 무장공비가 잠입한 합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기총소사로만 공격하여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일화도 있으며, 이뜻을 기리고자 문화재청에서 금관문화훈장(1등급)을 추서했다. 휴전후인 1954년 3월5일, 김 공군장군은 10전투비행단 창설행사 참석차 비행기를 몰고 가던 중 악천후로 동해시 인근 상공에서 추락하면서 애석하게 순직했다.
■ 공군창설 7인의 백의종군에도 불구하고 전투가 불가능한 극심한 공군전력 불균형 상태
전쟁에 대한 아무런 대비 없이 6·25남침전쟁을 맞이한 것은 국군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공군은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전투장비, 즉 전투기도 없이 적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비극적인 상황이었다.
이는 한국 육군과 해군이 1948년 8월15일 한국정부 수립과 함께 정식으로 출범했지만 공군의 창설은 지연됐기 때문이었다.
8·15광복때 한국에는 공군이 필요 없다는 인식을 가진 미 군정청과 한국군 내부의 반대로 공군창설은 한국전이 발발하기 약 9개월 전인 1949년 10월1일이 돼서야 공군창설 7인을 포함한 항공인들의 노력으로 이뤄졌다.
초기에 중국공군 상교(육군중장 급) 겸 지휘부 참모장, 기지사령관 등을 역임하고 한국 광복군 참모처장이었던 최용덕 장군을 위시한 장덕창, 이영무, 박범집, 김정렬, 이근석, 김영환 등 공군창설 7인은 미국식 훈련을 다시 받고 육군 참위로 시작하라는 등 미 군정의 홀대를 받았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을 본받자는 최용덕 장군의 설득으로 홀대에도 불구하고 모두 육군 참위로 임관 후 육군 항공대를 창설, 대한민국 공군의 기틀을 닦았다.
당시 장덕창은 일본 민항기 베테랑 파일럿으로 9800시간 비행기록 보유, 이영무는 중국공군 항공대 부대장 소교출신, 박범집은 일본군 육사출신 항공인 중에서 가장 선임자였고, 김정렬은 일본군 항공대 중대장(대위), 이근석은 일본 항공대 소년병 배경의 화려한 독파이터 경력 등의 무시못할 배경이었다. 빨간 마후라의 창시자인 김영환의 경우에는 다른 6명과는 달리 통위부 시절부터 군에 들어가 있었기에 공군창설을 위한 소통의 창구로써 포함되었다.
이전 육군 항공사령부로부터 독립한 공군의 규모는 병력 1616명과 항공기 20대(L-4/5 각 10대)였다. 독립하여 창설된 공군은 북한 공군력 확대에 자극받아 미국에 수차례에 걸친 공군력 증강을 요청했지만 좌절됐다. 그러나 국민성금으로 구입한 캐나다산 T-6기 10대만을 추가 도입한 상태에서 공군은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비극적인 전쟁을 맨몸으로 맞게 됐다.
반면에 북한 공군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전투기 및 폭격기 197대와 지원기 29대 등 총 226대의 항공기와 병력 약 2800여 명을 보유하고 있어 한국 공군이 전투가 불가능한 극심한 전력 불균형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 한국 공군의 전투작전 능력은 6·25남침전쟁 발발이후 4단계를 거쳐 발전
개전 초기에 전투가 불가능한 극심한 전력 불균형 상태에도 불구하고 한국공군은 연락 및 정찰용 항공기에서 손으로 일반 폭탄을 투하하는 항공전 사상 유례가 없는 작전형태를 보였으나 공군의 전투작전 능력은 이후 4단계를 거쳐 발전하게 된다.
그 첫 번째 단계는 1950년 6월25일부터 1951년 3월31일까지 미군 조종사의 요기(僚機)로서 전투에 참여한 제1작전기다. 이때 전쟁 발발 약 일주일이 지난 시점인 1951년 7월2일 F-51기 10대를 도입, 보유하게 됨으로써 한국 공군 사상 최초로 공중 전투력을 보유하게 됐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F-51 전투기 보유량을 확대했다. 참고로 항공기 보유량 추이를 살펴보면 1950년 12월에 F-51기 8대를 추가해 총 19대, 1951년 12월에는 총 44대, 1952년 12월에는 총 75대, 휴전이 성립된 1953년 7월에는 총 118대로 증가하게 된다.
두 번째 단계는 1951년 4월 1일부터 9월 18일까지 제주기지로 이동해 F-51에 대한 본격적인 훈련을 받은 이후 백구부대작전과 1차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을 통해 단독출격 능력을 배양하고 미 공군에 능력을 검증받아 단독출격 능력을 인정받는 제2작전기에 이른다.
김영환 대령이 강릉전진기지로 부임했던 1951년 9월28일부터 1952년 10월 27일까지 제3작전기에는 단독출격을 위해 강릉기지로 10전투비행전대를 전개해 동부 및 중ㆍ서부지역에 대한 항공차단작전에 치중해 실시했으며, 이때 승호리철교와 송림제철소 폭파와 평양 대폭격 작전 등의 쾌거를 달성했다.
1952년 10월 28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제4작전기에는 한국 공군과 육군 간 공지합동작전에 주력하면서 후방차단작전과 351고지전투 항공지원작전 등을 성공적으로 실시했다.
이로써 한국 공군은 MIG-15 요격임무와 같은 제공 임무를 제외한 모든 대지공격 작전이 가능한 면모를 갖추게 됐다.
병력면에서 살펴 보면 창군 당시에는 장교 143명, 항공병 1376명, 항공사관학교 사관후보생 97명을 포함 총 1616명이었으며, 개전 시 병력은 장교 242명을 포함 총 1897명이었다. 그러나 1953년 7월 정전 시에는 1만1461명으로 증가했다.
■ 승호리철교 폭파작전의 쾌거를 달성한 김신ㆍ유치곤 공군장군의 호국정신
승호리철교 폭파ㆍ차단작전을 지휘했던 김신 공군장군은 공군창설, F-51 무스탕전투기 인수 및 공군의 최초 출격 등의 성공적 신화를 만들며 6·25남침전쟁에 참전했다. 휴전 이후에는 공군 행정참모부장, 참모차장, 6대 공군참모총장(1960∼1962년)을 역임하며 공군 발전에 기여했다.
그가 공군총장 재임시에 발생한 5.16은 육군 및 해병대 주도로 이루어졌고, 해군과 공군은 제외되어 있었다. 그러나 쿠데타를 지지해서 계속 공군참모총장 직위를 유지하였고, 국가재건최고회의에도 참여하였다.
전역 후에는 중화민국 대사를 거쳐 교통부 장관, 유신정우회 국회의원과 5공화국 말기에는 독립기념관 초대 이사장도 역임하여 힘든 역경의 길을 걸어온 아버지 백범 김구와는 달리 군과 정·관계의 원로로서 비교적 순탄하게 활동했다.
1988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뒤, 2000년부터는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장으로 일했다. 덕분에 백범일지 간행 등 아버지와 관련된 각종 사업들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고, 오늘날 김구가 가장 대표적인 민족지도자겸 독립운동가로 기억되는데 크게 영향을 끼쳤다.
정부는 그에게 ‘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고 향년 94세였던 2016년 5월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또한 영화 ‘빨간 마후라’의 실제 주인공인 유치곤 공군장군(1927.7.17 ~ 1965.1.1)은 모든 출격조종사의 표상이 되었다. 평양 근교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그의 1,500피트 초저공 비행은 지금도 공군에서 전설이 된 신화로 내려오고 있다. 휴전후에는 공군의 전력증강ㆍ발전에 기여하다가 공군 제107기지 단장으로 재직 중이던 ‘65년 1월, 38세 나이에 안타깝게도 과로로 순직했다.
게다가 유 장군의 아들인 故 유용석 소령(공사 26기)도 ‘82년 제주도에서 훈련도중 순직하여 부자가 대를 이어 ‘빨간 마후라’의 순국영웅이 되었다. 한편 그의 고향인 경북 달성군의 '유치곤장군 호국기념관'에는 지금도 많은 추모객들이 유 장군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찾고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