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티고지(Betty) 전투는 이승만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이후 휴전회담이 결렬되면서 전개된 1953년도 중서부전선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 이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을 목전에 두고 전 전선에서는 중공군의 최종공세에 의해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베티고지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북쪽에 위치한 고지로서 그 주위에는 임진강이 허리띠처럼 둘러 흐르고 있는 서부전선 작전상의 요충지였다.
만일 베티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휴전이 성립될 경우, 주 저항선에서 남쪽으로 2㎞ 이상이 비무장지대로 결정되기 때문에 실제로 국군은 그만큼 임진강 남쪽으로 물러나야만 되었다. 베티고지 전투는 이러한 지리적 위치 및 정치적 중요성으로 인해 국군과 중공군간에는 이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함이 극도에 달았다.
결국 베티고지는 소대장 김만술 소위와 2소대원의 임전무퇴의 감투정신에 의해 10배 넘는 중공군의 공격을 끝까지 방어하며 기적적으로 격퇴시키고 사수하였다
6ㆍ25전쟁영웅 故 김만술 대위는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일본 오사카 공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그는 18세의 어린 나이인 1947년 6월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였다.
이후 부산에 주둔하던 5연대에 소속으로 1948년 ‘여순 10ㆍ19사건’ 진압작전과 태백산맥 등지에서 준동하던 공비토벌작전에 기관총 사수로 참전하는 등 약 6년여의 기간을 부사관으로 복무했다
6ㆍ25남침전쟁이 발발한 후 평양 탈환작전을 비롯한 주요 전투에 참전하여 탁월한 지휘 및 전투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953년 7월15일 특무상사에서 육군 소위로 현지 임관되어 1사단 11연대 2대대 6중대 2소대장으로 부임하였다.
■ 베티고지는 중공군의 발악적인 최종공세에 의해 전개된 처절한 혈전의 현장
당시 베티고지는 임진강 지류가 남북으로 흐르는 가운데 표고 120~150m의 봉우리 3개로 형성된 국군 1사단 11연대 2대대의 전초진지였다. 대대에서는 중공군의 발악적인 공격을 저지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한국전쟁 막바지인 7월15일은 휴전을 앞두고 중공군이 벌인 막바지 공세인 이른바 7·13공세의 사흘째가 되는 날이었다.
7·13공세는 중공군이 휴전을 앞두고 중부전선의 금성 돌출부의 만곡부를 없애기 위해 퍼 붓은 최후의 공세였으나, 이러한 불길은 서부전선 임진강 대안의 고양대 일대와 노리고지를 감제하는 중심부인 베티고지까지 불어 닥쳤다.
그동안 베티고지 사수를 위해 대대에서는 계속해서 3개 소대를 축차적으로 투입했으나, 배치된 소대들은 하룻밤만 지나고 나면 중공군의 공격에 반수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매번 교대시켜야 했다. 그날도 날이 새기도 전에 새로운 소대를 다시 투입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만술 소위는 이날 2대대 6중대 2소대장으로 부임하자마자 베티고지 사수임무를 4번째로 부여 받았다. 앞서 방어를 담당하던 7중대 1소대는 그래도 3일 동안 버티었으나, 이어진 적의 공격으로 전투력이 절반 이하로 감소되어 더 이상의 전투력을 발휘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베티고지는 세 개의 봉우리 중 중앙봉과 동봉은 아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나, 중앙봉에서 직선거리로 10m도 안되는 서봉은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1953년 7월 15일 14:00, 김만술 소위는 아직 얼굴조차 익히지 못한 35명의 소대원들과 함께 베티고지 사수를 위해 중앙봉과 동봉에 투입했다.(하편 계속)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