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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70)

언어 장벽을 넘은 연합작전과 불사신의 곡예를 보여준 노리고지 전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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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 칼럼니스트
입력 : 2020.12.10 19:08 ㅣ 수정 : 2020.12.10 19:08

쌓인 적 시체가 썩어 구더기 득실득실한 가운데 중공군의 기습적인 두더지 작전 감행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혈전과 격전이 거듭된 노리고지의 산병호 속에는 쌓인 시체가 썩어 구더기들이 득실득실하여 발목까지 빠졌으며, 교통호 속에서 육박전을 벌이던 아군 병사가 포격에 메워져 버린 흙더미에 치여 중공군을 껴안은 채 그대로 죽어 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지들은 피 흘린 보람도 없이 휴전 직전 중공군의 최종공세에 의한 발악적인 맹공격을 받고 빼앗겨 지금은 대부분이 군사분계선(MDL) 이북에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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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1사단장이었던 좌측  박림항 장군(3공 시절 건설부장관)과 우측 2월 현충인물로 선정된 김동빈 장군 모습 [자료출처=국가보훈처] 

 

■  4개월 동안의 노리고지 두더지 생활로 ‘털보’라는 별명 얻은 도상보 소위

  

12연대 3중대 1소대장 도상보 소위는 11연대의 격전이 끝난 후인 ‘52년 12월13일, 노리고지 방어에 투입됐다. 11월14일에는 한국 전선을 시찰중인 닉슨 미 부통령이 1사단 12연대를 방문하여 격려도 했다. 

 

노리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는 미군 포와 탱크의 지원이 큰 힘이 됐다. 당시 우리 한국군과 미군은 화력지원 협조본부(FSCC)를 설치해 놓고 보전포 협동 작전을 긴밀히 조정했다. 

 

당시 유엔 공군은 피아식별을 위해 대공포판이 있는 곳은 회피하여 폭격을 가했다. 그래서 12연대가 확보하고 있던 소노리 고지에는 밤이 되면 대노리 고지의 중공군들이 내려와 호 속에서 손목에 끈으로 잡아매고 있던 국군 병사들의 대공포판을 뺏으려고 해 서로 끌어 잡아당기며 승강이를 벌이기도 했다.

 

이 두 고지는 이렇게 인접해 있어 강 이남에 주력을 둔 아군으로서는 적의 야간 공격 때면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래서 미군 측에서는 이곳을 포기하고 강 남쪽으로 철수하자고 주장도 했다. 

 

그러나 박림항 1사단장은 이 같은 의견이 제기되자 소노리 고지는 우리가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사수하겠다면서 적극 반대했다. 1사단 좌우에는 영 연방군과 미 7사단이 배치돼 있었다.

 

12월 중순 즈음에 도상보 소위는 12연대장 정영흥 대령의 “도 소위 소대가 투입해 소노리 고지를 방어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때부터 4개월 동안을 이 소노리 고지에서 두더지 생활을 했다. 고지에 도착해보니 호들이 거의 다 포격에 무너져 버린 상태였다.

 

막힌 교통호를 파다가 육박전을 벌이던 아군 병사가 중공군을 끌어안은 채 그대로 죽어 있는 시체를 몇 구 발견했고, 간혹 남아 있는 호 속에는 구더기들이 꽉 차 있어 발을 넣을 수도 없었다. 

 

밤중에 순찰을 나가 졸고 있는 듯한 동초병을 깨워 보면 어느 사이에 적 총탄을 맞고 죽어 있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번은 공격해오는 적들이 아군 진지에 달라붙어서 진내 사격을 요청하고 호 속으로 들어갔다 나와 보니 위생병이 없어졌다.

 

그때 건너편 골짜기에서 그 위생병이 중공군한테 끌려가면서 “소대장님. 소대장님…”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는데 정말 못 견딜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무차별 사격을 시켰다. 

 

사격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봤더니 부르는 소리가 들릴 듯 말듯 하더니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도 그 위생병은 휴전협정후에 포로 교환 때 송환돼 왔다.

 

도상보 소위가 ‘53년3월 하순에 이 소노리 고지에서의 임무를 교대하고 철수했는데, 수염이 둘째 단추까지 내려와 ‘털보’라는 별명이 붙었다. 수염을 깎고 나니까 소대원들도 전혀 몰라보았다고 한다. 그는 소노리 고지 방어의 전공으로 화랑 무공훈장을 받았다.

 

■ 15연대 전초였던 171과 퀸 고지 피탈은 휴전 앞두고 긴장 풀린 것이 헛점

  

노리고지 쟁탈전 후에도 1사단은 317·199·박·백두산 고지 등 피아의 전초진지와 주요 감제 고지들을 둘러싼 중공군과의 공방전을 계속했다.

 

특히 적은 ‘53년6월 하순 서울에서 한창 벌어지고 있는 휴전 반대 데모와 들끓는 국민 여론의 기를 꺾어 보자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국군 1사단 지역 내의 171·박·퀸 고지 등에 격렬한 포격을 앞세운 공격을 가해 왔다.

 

1953년5월3일, 1사단장으로 부임한 김동빈 준장이 전선을 돌아봤더니 171·퀸 고지 등을 맡은 15연대의 방어선이 약간 허술한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미8군 정보에 의하면 적의 공격 방향이 이들 고지 쪽을 향하고 있다고 했다. 김 사단장은 미1군에서 트럭 40 대를 지원 받고 사단 본부 요원들까지 동원시켜 50m 폭의 철조망을 치는 등 15연대의 방어 진지를 재 강화시켰다.

 

6월25일 하오 4시께 작전 회의를 열고 있는데 갑자기 적 포탄 2발이 사단 본부 후방에 떨어졌다. 그때부터 적의 본격적인 포격이 시작됐는 데 김 사단장이 6·25 남침전쟁 동안 당한 포격 중에서 가장 심한 거였다고 회상했다.

 

중공군의 포격은 국군 1사단 쪽만 집중적으로 가해졌는데, 이것은 휴전을 반대하는 한국군의 사기를 꺾고 협정 조인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는 공산군 측의 속셈이었다. 이 일대 다른 유엔군 지역엔 전혀 적의 포격이 없었다.

 

당시 1사단 참모장 장춘권 대령(·예비역 육군 소장)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우리는 적이 강 건너의 노리와 베티 고지를 공격해 올 것으로 추정하고 모든 포문을 그쪽으로 돌린 채 퀸 고지 쪽의 경계는 소홀히 했지요. 그러나 적은 이날 밤 임진강을 도하하여 퀸 고지로 달러 붙었어요. 완전히 적의 기습을 당한 셈이었지요” 

 

어처구니없이 고지를 적에게 빼앗기고 말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반성할 점이 많았다는 설명이다. 

 

사실 당시 우리 지휘관들이나 사병들은 서울이 너무 가깝고 충분한 보급을 받고 있으니까 긴장감이 약간 풀려 있었다. 그래서 이 같은 적의 공격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으면서도 방어 태세를 제대로 못 갖췄다.

 

장 참모장이 얼마 전부터 일선 경계를 철저히 하고 철조망을 5중으로 쳐 놓으라고 독려를 했는데, 중공군이 공격한지 1시간만에 퀸 고지가 피탈됐다는 보고를 받고 지프로 달려나가 보니 연대 저항선의 철조망은 겨우 한 겹 뿐이었다. 

 

물론 진지 구축에는 시간도 필요했고 또 당시 휴전 기운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겠지만 방어준비가 미비한 것이 사실이었다. 화가 치민 장 참모장은 대대장을 군법 회의에 돌리라고 고함을 질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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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1사단 참모장이었던 장춘권 대령(예비역 육군 소장)과 태풍전망대에서 본 좌측부터 베티고지와 노리고지, 임진강 모습 [자료출처=국가보훈처/김희철] 

 

■  중공군은 두더지 작전으로 기습, 이후 기만작전으로 공격방향 전환시켜

 

당시 1사단 12연대 3대대 작전관 한효석 중위는 “원래 퀸 고지는 미7사단 1개 중대가 방어를 하고 있다가 중공군에 빼앗겼던 것을 우리 한국군이 다시 탈환해서 2개 중대 병력이 방어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중공군은 한동안 잠잠하더니 그 사이에 고지 밑으로 땅굴을 파고 들어와 대대 병력을 은폐시켰다가 ‘53년 6월25일 기습을 감행했다. 고지의 아군들은 밤에 중공군이 땅속을 파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지만 대단하게 여기질 않았다. 

 

기습을 당한 아군은 상당수가 포로가 됐고 중대장도 한 명만 살아 남았다. 199고지의 3대대 관측소(OP)로 올라온 그 중대장은 온몸이 피투성인 채 김자열 대대장을 붙들고 울면서 기습을 받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그는 중대 관측소(OP) 참호 속에 있다가 중공군이 올라 오길래 입구를 연락병과 함께 막아 버리고 이틀 동안 숨어 지내다가 다시 옆으로 굴을 뚫고 빠져 나왔다고 했다. 새벽에 호 속에서 뛰어 나와 고지 밑으로 마구 뒹굴어 내려오는데 적의 집중 사격을 받아 연락병은 전사하고 자기만 살았다며 울먹였다. 

 

이후부터 1사단은 중공군의 ‘두더지 작전’을 막기 위해 수색을 고지 밑까지 철저히 했다. 

 

한편 15연대 전초진지였던 171과 퀸 고지를 중공군에게 뺏긴 뒤에 테일러 미8군사령관이 독전하기 위해 사단사령부로 달려왔다. 테일러 장군은 “퀸 고지를 탈환할 생각은 말고 현 방어선을 지키기만 하라”고 명령했다. 

 

따라서 1사단은 탈환전을 단념하고 방어선을 구축해 주 저항선을 지키는데 힘을 기울였다.

 

김동빈 사단장은 중공군들을 기만하기 위해 우선 첫째로 퀸 고지에서 주 저항선에 이어지는 산허리를 잘라 도랑을 깊게 파 지뢰를 매설해 놓았고, 두번째로 야간에는 지프 25대를 동원하여 올라갈 때는 라이트를 켜고 내려 올 때는 끄게 하면서 1백m 간격으로 계속 돌게 하여 우리 방어 진지에 대한 대량 보급을 하는 것처럼 위장했다.

 

마지막으로는 고지마다 1개 분대씩의 병력을 올려 보내 작업을 시켜 후방 진지 공사가 활발한 것처럼 기만해서 감히 적들이 달려들지 못하도록 겁을 줬다.

 

철통 방어준비를 한 것처럼 활동한 위장 및 기만전술에 속아 넘어간 중공군은 공격 방향을 서쪽 11연대 정면으로 바꾸었고, 이때 10배 넘는 적의 공격을 끝까지 방어하며 기적적으로 격퇴시켜 6·25남침전쟁사에 찬란히 기록된 베티고지 영웅 김만술 소위의 무용담이 탄생했다. 

 

하지만 퀸 고지를 빼앗기고 얼마 안돼 노리고지도 적의 수중으로 넘어가 버린 채 아쉽게도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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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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