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전쟁사(66)] ‘저격능선 및 상감령 전투’ 승리의 진실은?(하-2)

김희철 칼럼니스트 입력 : 2020.11.12 16:28 ㅣ 수정 : 2020.12.07 10:25

저격능선의 불멸 투혼 기억은 당당하고, 상감령의 위세는 그 앞에서 주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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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저격능선의 삼각고지 전투에서 미 9군단 예하 미 7사단은 고전했다. 갱도작전에 말려들었기 때문이다. 10월25일 미 7사단은 삼각고지 공략을 포기하고 그 임무를 한국군에 넘겼다. 그 직후 부임한 2사단장은 강문봉 장군은 고지의 가치는 낮은데 비해 희생이 많았기에 11월5일 삼각고지 작전을 중단했다. 

한편 1952년 10월14일 시작된 저격능선 전투에서 갑종장교 5기생인 백낙수 소위(예비역 대위)는 2사단 32연대 1대대 중화기 중대 박격포(81밀리) 소대장으로 쉴 새없이 포를 쐈다.

▲ 삼각고지전투에서 중공군 동굴진지를 단독으로 폭파시킨 이상욱 예비역중령의 수기와 저격능선전투에서 박격포(81밀리) 소대장으로 참전했던 백낙수 소위의 모습 [자료출처=갑종이여 영원하라]
 

판초우의에 쌓인 사체 조각들 속에서 “백 소위만 살았군!”

얼마나 박격포를 많이 쏘았는지 탄피가 동산을 이루고 포신이 열을 받아 포탄이 제대로 나가지 못하고 부근에 떨어질 정도여서 할 수 없이 물통을 옆에 놓고 물을 부어가며 포신을 냉각시켰다고 했다. 

포진지의 땅이 젖어 포판이 땅속으로 들어가 포를 옮겨가며 사격을 했는데, 결국 많은 사격으로 공이가 부러졌고 부속품이 바로 보충이 안 돼 나머지 4문으로만 사격해야 했다. 백 소위는 “많은 폭음과 섬광으로 고막이 터져 불러도 멍하니 서 있는 병사들이 늘어갔고 눈이 멀어버린 병사도 있었다”며 안타까워 했다.

적의 반격이 주춤하자 박격포 소대는 전투 임무가 아니라 보급품 수집이나 전사자를 후송하는 데 동원되기도 했다. 당시 판초우의에 쌓인 사체 조각들과 터진 군화 속의 발가락들이 처절한 참상을 말해주었다.

1952년 10월 29일에는 날아오는 적 포탄이 OP 부근이나 포진지 주위에 떨어졌는데 그는 “그때 1개 포반 4명이 포와 함께 공중으로 날아가면서 전사하여 슬픔과 분노가 교차되었다. 또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놓고 포사격을 위해 달려가던 병사가 적의 저격병에게 총탄을 맞아 ‘어~머~니~’를 외치며 쓰러지던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저격능선 전투의 마지막 날인 11월24일에도 백 소위의 32연대가 저격능선 A고지와 돌바위 능선을 확보하느라 큰 피해를 입었다. 물론 중공군도 피해가 컸다.

그는 “갑종 동기생 3명 중 1명(박완섭 소위)이 전사하고 1명(강순형 소위)은 부상으로 후송돼 나 혼자 남게 되었어요. 17연대 동기생 3명도 그날 함께 전사하고 말았어요”라며 슬픔을 달랬다. 

전투가 종결되고 9사단 28연대와 임무를 교대하여 집결지에 도착했을 때 부상으로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던 대대장이 다가와 “백 소위만 살았군!”하고 건넨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고 했다.

저격능선 전투를 마치고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던 백낙수씨는 “아직도 못 잊는 장면은 병사의 시신을 수습하러 가면 대개 옷이 깨끗한 것으로 보아 전사자의 80~90%는 신병이야. 인간의 이성으로 죽음을 대하면 감당 못 해. 당시 이성이 마비되었다고 할까. 죽음을 의식 안 하고… 죽으면 죽었나 보다 그러는 거지. 동료가 죽어도 슬픔을 발산할 겨를이 없었어요”라고 쓸쓸히 덧붙였다.

 

2사단의 저격능선 공략은 미완성, 상감령 신화도 절반의 진실

1952년 10월, 미 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오성산을 점령하기보다는 전초진지 전반에 걸쳐 아군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소규모 공격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쇼다운(Show Down) 작전’이라고 칭한 대대규모의 병력으로 제한된 목표를 탈취하는 작전을 전개했다

이에 따른 저격능선 전투는 개시 42일만인 11월24일에 끝났다. 엄청난 희생을 치루며 공격한 미9군단 예하 국군 2사단은 저격능선의 고지 셋(A·Y·돌바위) 중 두 곳(80%)을 확보했고, 중공군은 삼각고지를 방어했지만 저격능선에서 패퇴했다. 

故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 ‘나를 쏴라’에서 “저격능선에서 중공군은 패배했고 희생도 아군의 2배로 막대했다. 중국이 최고 승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체 선전일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1957년 7월 김종오 5군단장이 철원 쉬리공원 옆 동산에 ‘저격능선 전투 전적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오만한 적 중공군과 용감히 싸운 불멸의 투혼’이라고  단호하게 새겨져 있다. 참전했던 한 노병은 "중공군은 국군의 전투력을 깔보았고 저격능선에서 오만함이 드디어 분쇄됐다”고 말했지만 그의 낯빛이 씁쓸해진다.

국방부 정책기획관을 역임한 김국헌 장군(육사28기)도 ‘다시쓰는 6·25’에서 미9군단의 저격능선 전투는 무모한 공격으로 실패로 끝났으며, 국군 9사단의 백마고지전투가 필사의 방어로 성공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고 평가했다. 

중국의 승전 기록은 미군 격퇴, 오성산 방어에 맞추었다. 지하갱도의 고난은 신화의 소재로 “동굴진지는 물이 적어 겨와 풀을 먹으며 버텼고, 그 정신으로 미군을 제압했다”며 ‘상감령 전투’는 최대 승리라고 주장한다.

한편 중앙일보 박보균 대기자는 ‘화웨이 사태가 점화한 '상감령' 역사기억의 전쟁··· 승자는?’라는 칼럼에서 “중국은 한국군 전과를 깔아뭉갠다. 2사단의 저격능선 공략은 미완성이다. 하지만 중국의 상감령 신화도 절반의 진실이다”라고 분석했다.   

또한 “한반도는 기억의 전쟁터이지만 한국은 그런 문화전투에서 부실하다. 보수우파의 그런 기량은 미흡하다. 그 전투에서 밀리면 치명적이다. 가짜 평화론이 득세한다. ‘정의로운 평화’의 요소는 군사력과 안보 의지이다. 그것 없는 평화는 비굴하고 수세적이다”라고 언급했다. 

‘상감령’은 역사의 시위이고 북·중 결속의 원동력이다. 한·미동맹의 기억은 소홀해졌고 그로 인한 손실은 결정적이다. 중국은 한국을 얕잡아보며 북한도 한국을 무시한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의 시대는 혼돈이 됐고, 조 바이든이 미대통령에 당선된 지금은 새로운 선택의 전환점이다. 

결론적으로 박 대기자는 “역사 기억은 리더십에 지혜와 투지를 넣는다. 국민적 단합을 투사한다. 저격능선의 기억은 당당하고 상감령의 위세는 그 앞에서 주춤한다”라고 강조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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