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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65)

‘저격능선 및 상감령 전투’ 승리의 진실은?(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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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 칼럼니스트
입력 : 2020.11.11 15:52 ㅣ 수정 : 2020.11.21 16:45

저격능선 전투 전적비, ‘오만한 적 중공군과 용감히 싸운 불멸의 투혼’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6·25전쟁사’에는 저격능선 전투는 승리했으나, 1953년 7월 휴전 직전에 상황이 재역전되어 “중공군의 최후 공세에 국군은 저격능선에서 전술적으로 후퇴, 싸워보지도 않은 채 적에게 넘겨줬다”고 기록되어 있다.

저격능선에서 아군과 대치하던 중공군 15군단의 45사단은 엄청난 지하갱도를 구축하고 있었다. 중공군과 북한 인민군은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250여km에 걸쳐 땅굴 진지를 구축했다. 하나의 진지는 20~30km의 종심을 가진 거대한 거미집 같았다고 한다. 

 
▲ 6․25남침전쟁 당시 저격능선 전투에서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위령제 모습 [자료출처=연합뉴스]
 

삼각고지 전투에서 동굴진지 폭파시킨 부하의 공을 가로채려는 상관들의 추악한 모습 

국군 2사단 31연대 5중대 2소대장으로 저격능선의 삼각고지 전투에 참전했던 이상옥 예비역 중령은 “갑종장교 25기 동기 12명이 교육을 마치고 신임 소위로  부임했는데…”라며, “당시 2사단장 정일권 장군은 신임 소위들에게 낮에는 국군 진지를 둘러보라고 시켰고 복귀했을 때 소감을 물었는데, 우리는 보병학교 전술학 시간에 배운 대로 이야기하자 정 장군은 ‘내일 너희가 가서 고쳐주고 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전투상황이 급해서 바로 배치됐다”고 회고하며 말문을 열었다.

당시 철원 평야 삼각 고지의 제인러셀 고지에 미 7사단 소속 2개 소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낮에는 공격하고 밤에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쉬었는데, 어느 날 심야에 중공군이 기습해 2개 소대 미군 80명이 모두 전사했다. 

삼각(제인러셀) 고지는 철원 평야를 감제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요지였다. 저격능선 전투 2단계가 시작된 10월25일, 국군 2사단은 미군이 전멸했던 삼각 고지를 인수하게 되었고, 철수하는 흑인 병사 2명이 기관총과 실탄, 엄청난 양의 수류탄을 인계해주어 든든했다. 또 가슴 높이의 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하여 적 포격에 대비했다.

아침 안개를 이용해 삼각 고지 꼭대기에 자리 잡은 우리 진지에서 밑으로 150m쯤 내려가 적의 움직임을 정찰했을 때, 중공군 셋이 식수를 들고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제일 앞선 자를 향해 ‘추항(투항)!’이라 외쳤는데 중공군 병사 둘이 도망치기에 사살했고 군관 1명을 생포했다. 

그를 통해 알아낸 삼각 고지 8부 능선의 땅굴 속에 1개 중대(100여 명)가 있다는 정보를 바탕으로 연대본부에서 장교 1명과 사병 9명으로 편성된 특공부대를 투입하였으나 땅굴 속에서 전원 몰살당하고 말았다.

 

2소대장 이상옥 소위는 “그때 우리 소대가 위치한 곳에 땅굴이 있으니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보병학교에서 배운 대로 땅굴 폭파에 필요한 TNT를 계산해서 5~7kg 정도를 연대에 요청했는데 무려 15kg을 보내왔어. 그 무거운 것을 나 혼자 들고 갈 수 없어서 소대원 한 명과 7kg씩 나눠 짊어지고 우리 진지에서 내려와 중공군 땅굴 입구로 갔어”라며 전투담을 시작했다.

삼각 고지 8부 능선의 땅굴 입구는 적 기관총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소위는 먼저 중공군을 속이려고 진지 구축을 위한 호 파기 공사를 많이 해서 중공군 땅굴 쪽으로 토사와 바위 등을 많이 흘려보냈고 그때마다 중공군이 기관총 사격을 해왔다. 그러나 호 파기 공사 때문인 것을 알고 이후 토사가 내려와도 기관총을 쏘지 않았다. 그는 중공군이 기관총 사격을 안 하는 틈을 이용해 땅굴 입구까지 접근하였다.

막상 입구에 도착하니 중공군 보초병이 곤히 자고 있었다. 동행한 소대원에게 대검을 주며 “지키고 있다가, 만약 깨면 총은 절대 쏘지 마라”고 지시하고 혼자서 TNT 15kg을 지고 땅굴 속으로 들어갔다. 

중공군들은 동굴속에서 똥과 오줌도 싸고, 송장도 동굴 안에 있어 썩는 악취 냄새가 심하게 진동해 호흡이 곤란할 정도였다. 그때 갑종 동기생인 진찬호 소위가 동굴 작전을 한다니까 어렵게 구해줬던 방독면이 도움이 되었다. 

땅굴 높이는 120cm, 좌우폭은 60cm 정도였고 한 5~6m 안으로 들어가니 땅굴이 좌우 두 갈래로 갈라졌다. TNT 두 뭉치에 기폭 장치를 한 후 쏜살같이 뛰어나왔다. 자고있던 중공군 보초병을 그냥 두고 진지로 되돌아오는데, 꽝 하는 소리가 났다. 이 폭발로 산 정상의 지형이 조금 바뀔 정도로 온 땅이 흔들리고 큰 폭발음과 함께 흙먼지가 하늘을 가렸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공격로에 적의 사체가 엄청나게 쌓여 있어 땅굴 폭파로 최소 100명에서 최대 150명 이상이 죽었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날 저녁 화가 난 중공군은 엄청난 병력으로 2소대를 공격해왔다. 하지만 적의 공격로는 급경사로 방어에 유리했다.

저녁 8시부터 다음 날까지 네 차례에 걸쳐 엄청난 양의 포탄이 날아왔으나 호를 깊게 파서 엄폐가 되었다. 낮에는 아군이 공중 폭격을 하니까 못 오지만 밤이 되면 중공군이 수를 세지 못할 정도로 올라왔는데, 미군에게서 인수한 기관총과 충분한 실탄 및 수류탄이 유용했다. 

그날 이 소위는 전투에 임하며 부대원에게 “다쳐도, 죽어도 보고하지 말라”고 했다. 왜냐면 후송하려면 최소 3명은 있어야 하는데 싸울 병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새벽 생존자를 확인하니 43명의 대원 중 7명이 생존했고, 나머지 병사는 모두 전사했다. 이 전투로 이 소위는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이상옥 예비역중령은 “이 작전은 상급부대의 계획이나 지침도 없었어요. 오직 나 혼자 생각과 소대원들의 생사를 같이한 용전분투가 만들어낸 결과야. 그런데 전투후에 많은 사람이 앞다투어 마치 자신이 계획입안자, 작전지휘자, 작전유공자인 양 자처하고 수훈 신청을 했어요. 부하들의 공을 가로채는 상관의 추악한 모습을 보게 된 것이지”라며 분노를 삼켰다.(하-2편 계속)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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