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 칼럼니스트 입력 : 2020.11.06 17:59 ㅣ 수정 : 2020.11.21 16:46
펑더화이, “오성산을 잃으면 조선 역사에 책임을 져야 한다”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중국의 승전 기록은 미군 격퇴와 오성산 방어 성공에 맞추어 있고 지하 갱도의 고난은 신화의 소재다. 중국 선양 항미원조열사능원에 “동굴진지는 물이 적다. 겨와 풀을 먹으며 버텼다(吃糠咽菜·흘강인채). 그 정신으로 미군을 제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저격능선(상감령) 전투 당시 “오성산을 잃으면 조선 역사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휴전후 마오쩌둥의 지시로 1956년에 상감령은 영화로도 제작됐다.
2011년 중국 주석 후진타오의 미국 백악관 방문 때, 피아니스트 랑랑(郞朗)의 연주곡은 ‘나의 조국(我的祖國)’으로 영화 ‘상감령’ 주제가 였다. 연주곡에는 “승냥이와 이리가 오면 엽총으로 맞이하겠다”라는 가사가 들어 있다. 승냥이는 미국이었고 당시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속절없이 당한 꼴이 되었다.
■ 저격능선의 A고지와 돌바위 능선은 국군이, Y고지는 중공군이 점령
저격능선 전투 1단계는 정일권 장군(훗날 국무총리, 국회의장 역임)이 지휘하는 2사단의 공격으로 시작됐다. 10월 14일 05시, 9개 포병대대의 지원을 받는 32연대 3대대가 1차 공격을 했지만 최초는 실패했으며 추가로 1개 중대를 지원받아 13시 40분에 다시 공격했다.
이번에는 미군 전폭기 6개 편대와 국군 2사단의 9개 포병대대의 집중 포격을 지원받아 공격을 했다. 그 결과 중공군 진지를 완전히 파괴하고 32연대 3대대는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저격능선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점령한 후, 3대대는 Y고지와 돌바위 고지에 각각 1개 중대를, A고지에는 3개 중대를 배치하여 중공군 역습에 대비하였다.
중공군 133연대는 이날 야간에 강력한 포병 화력과 파상적 돌격 공격으로 Y고지와 A고지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중공군과 치열한 백병전 끝에 3대대 전술지휘소는 함락되었고 3대대는 돌바위 고지를 남겨두고 퇴각했다.
이때 32연대는 예비연대인 17연대 2대대를 투입하여 돌바위 고지를 엄호하면서 전폭기 폭격 지원으로 10월15일 14시 30분, A고지를 재탈환했다. 이에 중공군은 이날 밤과 10월16일 새벽, 133연대의 2개 대대로 고지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어진 중공군 134연대의 역습도 잘 막아냈다.
그 이후로 중공군은 135연대를 투입하여 새로운 방법으로 공격했다. 우선 Y고지를 점령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A고지와 돌바위 고지를 공격했다. 결국, 국군 2사단 32연대는 중공군 135연대와 치열한 백병전을 하면서 1대대가 역습을 하였으나 결국 A고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10월20일 08시, 정일권 2사단장은 17연대가 32연대와 임무를 교대하여, A고지를 탈환하도록 했다. 17연대 1대대는 세 차례 공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국군은 그 이후에도 76회의 항공 지원을 받아 11시에 다시 공격을 개시하여 A고지를 탈환했다.
그 이후, 국군은 중공군의 역습으로 A고지를 피탈당하고, 17연대 3대대 역습과 중공군의 재역습과 다시 국군의 A고지 재확보로 고지 쟁탈전이 이어졌다.
이처럼 저격능선에선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나는 가운데 군단 계획에 의해, 국군 2사단은 미 7사단의 작전지역인 삼각고지를 인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군 2사단은 A고지를 집중적으로 방어하는 저격능선 전투 2단계 작전에 들어갔다.
31연대를 삼각고지로 배치하고, 저격능선에 다시 32연대를 투입하면서 방어하던 17연대를 예비 임무로 변경하였다.
32연대의 투입 이후 무리한 전투가 계속 이어졌다. 국군이 주간 작전에서 막강한 화력으로 중공군을 제압하면, 중공군은 야간 역습으로 대응했다. 32연대 2대대는 병력을 종심으로 깊게 배치하여 중공군의 역습을 막아냈다.
중공군은 45사단에서 29사단으로 교대해서 공격을 실시했지만, 국군 2사단은 11월 25일까지 중공군을 재격퇴하는 등 고지 주인이 28차례나 바뀌었던 진지를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결국 국군 2사단 장병들의 투혼이 서린 저격능선의 A고지와 돌바위 능선은 우리 군이 점령하고, Y고지는 중공군이 점령한 상태에서 전투가 일단 종결됐다.
그 후 김점곤 준장이 지휘하는 9사단이 저격능선 방어 임무를 인수했다. 저격능선 전투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하던 2사단은 군단 예비로 전환하여 부대 정비 후에 9사단이 성공적으로 방어한 백마고지로 재배치되었다.
그러다가 1953년 7월에 전개된 이른바 중공군의 마지막 ‘7·13공세’로 저격능선은 휴전선 북방의 비무장지대로 들어가고 말았다.
■ 체코식 기관총 사수의 다리에 쇠사슬이 묶여 있었던 처절한 아비규환
당시 32연대 11중대에서 참전했던 문관혁 소위(예비역 대령, 갑종장교 25기)는 “저격능선 전투가 1952년 10월 14일 새벽 5시에 시작됐지만, 공격 명령은 일주일 전에 내려왔어요”라며 “연대 작전과장(변일현 대위), 대대 정보장교와 같이 저격능선과 유사한 지형을 선정했죠. 거기다 적 진지를 그대로 만들라고 하더군요. 비슷한 지형을 찾아 닷새간 공격 연습을 했습니다”고 체험담을 말했다.
당시 첫 작전은 32연대 9중대가 저격능선 오른쪽, 10중대가 왼쪽, 문관혁 소위가 있던 11중대는 예비로 하는 대형으로 공격했다. 2시간쯤 지나니 9중대와 10중대가 전멸한 상황이 됐는데 적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싸우니까 아군 쪽 피해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자 예비였던 11중대에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문관혁 소위도 소대원을 이끌고 고지로 공격했다. 자동화기 사격과 수류탄에 의한 저항이 산발적으로 있었지만 7부 능선까진 무난히 올라갔다.
전진 중에 중공군의 방망이 수류탄이 폭풍 퍼붓듯이 날아오며 자동화기에 피해가 늘어나고 3.5인치 로켓포 사수마저 총에 맞아 쓰러지자, 문소위는 직접 로켓포를 메고 적 화기진지를 조준해 발사했고 자동화기 사격이 가격을 멈췄을 때 세 차례에 걸쳐 돌격을 감행한 후 그날 오후 5시쯤 점령했다.
문소위가 A고지에 올라가니, 앞서 공격했던 10중대장인 홍경태 대위가 중대원들은 모두 죽고 혼자 살아남아 무전기로 계속 대대장을 호출하고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였던 그는 “야! 이 고지는 내가 점령했어”라고 몇 번이고 말하며 제정신이 아니였다.
문 소위가 A고지 위쪽의 Y고지 방향으로 전진하는데 바로 10m 전방 땅굴에서 적의 자동화기 사격이 다시 작열했다. 그곳에 2.5파운드(1.1kg)짜리 폭약에 뇌관을 꽂아 도폭선에 불을 붙여 던졌고 폭약이 터진 땅굴에 가보니 체코식 기관총 사수의 다리에 쇠사슬이 묶여 있었던 처절한 아비규환이었다.
그날 문 소위의 2소대는 30명을 데리고 공격했는데 8명만 살아남았고, 그들이 위치한 곳은 A고지 인근 돌바위 능선과 Y고지가 갈라지는 지점의 작은 돌출부였다.
그들은 저녁을 먹고 밤 8시쯤 되어 무전기로 중대본부를 불렀는데 응답이 없어 확인해보니 그 사이에 적이 역습해 아군 중대는 벌써 철수했고 낙오된 상태였는데 중공군에게 포위돼 있었다. 다행히 캄캄한 밤이라 그들의 존재를 중공군이 모르고 있었다.
이튿날(15일) 새벽 2시가 되니까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문소위는 전투 중 명령 없이 철수하면 총살이었지만 통신이 두절돼 철수 명령을 못 받았고, 명령 불복종으로 총살당하는 한이 있어도 소대원은 살려야 한다는 판단에 분대장 2명을 조용히 불러 ‘총소리가 나면 각자 무기를 들고 어제 아침 우리가 공격하기 위해 대기하던 골짜기로 철수해서 집결한다’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생존한 소대원 8명이 기습적으로 진지를 박차고 초인적인 힘으로 경사가 70~80도의 산비탈 500~600m를 뛰어 내려가자 포위했던 중공군들도 당황해 아무 조치도 못했고 낙오자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 중공군, 오성산 피탈시 평강까지 위태하다는 판단에 상감령(저격능선) 사수
문 소위는 이후 저격능선 전투가 끝나는 42일 동안 고지공격과 방어전에 10여 차례 투입되었다.
문 소위는 저격능선 전투 중 11월 24일 전투를 잊을 수 없는데, 당시엔 그 전투가 마지막 전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그날 저녁에 대대장이 ‘오늘 저녁은 죽더라도 A고지를 빼앗기지 마라’는 지시를 받고 소대원 30여 명을 인솔해서 A고지로 올라갔다.
자정이 되자 중공군 2개 중대가 70~80도 되는 가파른 비탈을 올라오며 공격했고 낮에 조준해 놓은 듯 포격을 쏟아내 진지에서 고개를 내밀고 소총을 쏘기 어려워 수류탄을 계속 던졌다. 임무를 교대할 때 가져온 수류탄 80발을 차례로 던졌고 7부 능선까지 올라오던 중공군들은 끝내 A고지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날이 훤히 밝자 중공군이 철수했고, 오전 9시쯤 되어 한 소대가 교대하러 오는데 2사단이 아닌 9사단 병력이었다. 문소위의 갑종 동기생인 9사단 28연대 백성기 소위가 보여 반가웠는데, 그때 대대장이 왜 그날만은 A고지를 반드시 사수하라고 했는지를 깨달았다.
문 소위는 A고지 사수 전공으로 화랑무공훈장을 수훈했다. 그리고 11월 25일 저격능선 전투는 완전히 종결되었다. 그해 12월 중순께 전개된 일부 탐색전을 제외하고 양측의 접촉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문관혁 소위는 훗날 저격능선 전투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국군(유엔군)은 백마고지를 빼앗길 것 같으니까 중공군 전투력을 분산시키면서 저격능선을 확보할 생각에서 전투를 시작한 것이에요. 그러나 적은 유엔군이 오성산을 빼앗으려 공격하는 것으로 오해했어요. 오성산은 1069m 고지입니다. 김일성이 왔다고 해서 ‘김일성 고지’로 불렀을 정도예요”라며
“중공군은 오성산을 잃으면 중공군이 평강 평원에서 버티기 힘들다고 생각해 오성산 앞 상감령(저격능선)을 사수하려 죽기 살기로 싸웠던 겁니다. 사실 그렇게 희생할 가치가 없는 전투였는데…. 국군(유엔군)이 적 1명을 사상시키는데 실탄이 33만 발이 소모되었다고 합니다. 전쟁을 효율성만으로 따질 수 없지만 너무나 비효율적이고 그만큼 치열했어요. 그러나 이 전투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것은 휴전할 때 우리 땅으로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안타까워 했다. (하편 계속)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