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 칼럼니스트 입력 : 2020.11.04 19:49 ㅣ 수정 : 2020.11.21 16:46
저격능선과 삼각고지(Jane Russell Hill) 전투를 중공군들은 ‘상감령’전투라 불러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1952년 10월14일 김종오 장군의 9사단은 중공군 38군(江擁輝)을 격퇴시키고 395(백마)고지 정상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백마고지(White Horse hill)’란 집중포격 때문에 민둥산으로 벗겨진 고지의 형태가 마치 백마처럼 보였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밖에 집중포화로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는 ‘아이스크림 고지(철원)’, 대머리처럼 벗겨졌다는 ‘불모고지(Old Baldyㆍ연천)’, 저격 당하기 십상인 지형이라는 ‘저격능선(Sniper Ridgeㆍ김화)’, 당대 미국의 유명한 육체파 배우인 제인 러셀의 가슴을 연상시킨다는 ‘제인러셀 고지(Jane Russellㆍ김화 오성산 기슭의 삼각고지)’ 등의 치열했던 6·25남침전쟁을 통해 이름이 붙여진 고지들이 있다.
■ 밴플리트 사령관은 주도권 장악 위해 제한된 목표 탈취하는 ‘쇼다운(Show Down) 작전’ 개시
오성산(五聖山, 1062m) 남쪽 기슭에 있는 저격능선(Sniper ridge)과 삼각고지(Triangle or Jane Russell Hill)는 상감령(上甘嶺) 고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어서, 저격능선 전투와 삼각고지 전투를 중공군들은 ‘상감령 전투(上甘嶺戰鬪)’라고 통틀어 부른다. 중국은 미군을 격퇴하고 오성산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신화를 만들며 승리한 전투라고 영화까지 만들었다.
이곳에서 1952년에 중부전선의 김화(현재의 철원군 김화읍 주변) 지역에 배치되어 정일권 장군(훗날 국무총리, 국회의장 역임)이 지휘한 국군 2사단과 미 7사단이 중공군 15군에 맞서, 1952년 10월14일부터 6주간에 걸쳐 주저항선 전방의 전초진지를 빼앗기 위한 치열한 공방전이 치루어졌다.
저격능선이라는 명칭은 1951년 10월, 노매드(Nomad)선을 목표로 진격작전을 전개한 미 25사단이 김화지역으로 진출하여 중공군 26군과 대치하게 되었을 때, 이 능선에 배치된 중공군이 538고지로 진출한 미군을 저격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히게 되었다. 그러자 미군 병사들은 이 무명능선을 가리켜 ‘저격능선(Sniper Ridge)’ 또는 ‘저격병 능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952년 10월, 중공군이 전초진지에 대해 대대적으로 공격을 시작하자, 미 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전초진지 전반에 걸쳐 아군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소규모 공격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쇼다운(Show Down) 작전’이라고 칭한 대대규모의 병력으로 제한된 목표를 탈취하는 작전을 개시했다.
전투가 시작하기 전, 중공군 15군은 오성산을 중심으로 예하 3개 사단을 배치했는데, 그 중 45사단은 저격능선에 전초진지를 설치하여 경계부대를 배치했다. 아군 진지에서 200m정도 거리에 배치된 중공군 부대 규모는 중대에 불과했지만, 사단 및 군단급 병력 지원이 가능한 상태였다.
이른바 저격능선 전투는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단계는 미7사단이 삼각고지(Jane Russell Hill)를 공격하기 시작한 1952년 10월 14일부터 미 7사단이 삼각고지에서 철수하게 된 10월 25일까지다. 이 때 국군 2사단도 17, 31, 32연대와 추가로 증원된 30, 37연대 및 16개 포병대대로 10월 14일부터 저격능선을 공격했다.
2단계는 2사단이 미 7사단으로부터 삼각고지를 인수하여 양 고지에서 전투를 수행한 10월 25일부터 11월 5일까지, 3단계는 저격능선 전투가 종료되는 11월 24일까지다.
이 42일간 고지 주인이 28차례나 바뀌었던 치열한 고지쟁탈전은 결국 어느 편에도 일방적인 승리를 안겨주지 못했지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5전쟁사(총 11권)’의 제 10권(휴전협상 고착과 고지쟁탈전 격화)에 이 전투를 한국군의 승리로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4일까지 진행된 저격능선 전투에서 국군 제2사단이 승리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유리한 전초진지를 확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산군의 기세를 꺾음으로써 전 전선에 걸쳐 작전의 주도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전투는 유엔군 측이 휴전회담을 정치적으로 유리하게 이끌어 나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사살 3772명, 추정사살 1만1023명, 포로 72명의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유엔군의 우세한 화력에도 아군 역시 국군 2사단이 그동안의 반격작전에서 전사 1096명, 부상 3496명, 실종 97명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반면 중국은 1953년 7월 27일 휴전까지 삼각고지와 저격능선에서의 모든 전투를 ‘상감령 전투’라고 칭하며 ‘한국전쟁에서 거둔 최대의 승리’라고 미화하고 있다.
■ 중국, ‘상감령전투’가 6·25남침(항미원조)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투라고 자화자찬
미국과 무역전쟁 중인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지난 10월23일 ‘항미원조 전쟁 7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한국전쟁을 '미국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전쟁'이라고 6·25남침전쟁을 언급하며 미국과의 항쟁의지를 다지고 있다.
또한 중국 정부는 국영방송 CCTV를 통해 6·25남침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를 미화한 다큐멘터리 ‘빙혈(冰血) 장진호’, 철의 삼각지 저격능선 전투를 다룬 영화 ‘상감령(上甘嶺)’ 등을 방영했다.
중국 정부는 특히 ‘상감령 전투’가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 즉 6·25 남침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투라고 자화자찬해왔다. 미국 제재를 받고 있는 중국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의 런정페이(任正非) 회장은 “내년에 우수한 인재들이 배출되면 그들을 이끌고 상감령으로 진격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중 간 화웨이 분쟁에 상감령이 소환되는 게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불쾌했다. 또 얼마 전 중국은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의미가 담긴 강원도 화천군에 위치한 호수 ‘파로호(破虜湖)’의 명칭 변경을 요구해 논란이 일고 있다. 파로호는 6·25 남침전쟁 당시 중공군에 승전한 것을 기념해 이승만 대통령이 지은 이름이다.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도 주중대사 시절 이 요구를 받았다고 했다.
파로호 외에도 영화 ‘안시성’을 두고 중국 측이 “우리 영웅(당 태종)을 비하한다”고 항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고구려 장군 양만춘이 당 태종을 물리친 전투를 담은 영화가 불편했던 것이다.
중국은 저격능선(상감령) 전투와 파로호, 영화 ‘안시성’에 이르기까지 자기 입맛대로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 동북공정으로 우리 민족의 승전기록까지 바꾸겠다고 달려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중국도 ‘한국전쟁에서 거둔 최대의 승리’라고 미화하고 있는 치열한 고지쟁탈전인 저격능선(상감령) 전투 승리의 진실을 살펴보았다.(중편 계속).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