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뉴스] 이건희 삼성회장 장례식의 3가지 정치사회학
오세은 기자
입력 : 2020.10.26 15:47
ㅣ 수정 : 2020.10.27 21:04
두자녀와 팰리세이드 운전해서 온 이재용 부회장, 천붕(天崩)의 심정을 표현
[뉴스투데이=오세은 기자] 지난 25일 별세한 고(故) 이건희(78) 삼성그룹 회장에 대한 각계의 조문과 조의 표명 그리고 상을 치르는 이재용 부회장의 방식에는 의미심장한 정치사회학이 내포돼 있다.
우선 이건희 회장의 외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임종을 지킨 후 빈소가 차려지기 전인 이날 오후 4시 57분께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두 자녀와 함께 도착했다. 모두 흰색 마스크를 쓰고 검정 정장을 착용했다.
이 부회장은 현대자동차 스포츠유틸리티차(SUV) 팰리세이드를 직접 운전해서 왔다. 이는 부친을 여읜 자식으로서 최대한 몸을 낮춘다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하늘이 무너지는 천붕(天崩)의 심정을 표현하기 위함이라는 해석이다.
이 부회장은 아들을 먼저 들여보내고 딸과 함께 장례식장에 들어갔다. 굳은 표정을 한 채 아무 말 없이 수많은 취재진 앞을 지났고, 취재진도 특별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기자들이 질문을 하지 않은 것도 천붕의 슬픔을 안고 있는 ‘상주’의 심정을 헤아리는 동양식 예법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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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장에 몰린 조문행렬은 겸양지덕(謙讓之德)의 정치사회학
‘가족장’으로 치러지는 이건희 회장의 장례식에 정계 및 재계인사들의 25, 26일 이틀 간 조문행렬이 이어지는 것도 다분히 동양적 예법이다.
삼성전자 측은 25일 “장례는 고인과 유가족의 뜻에 따라 간소하게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다”며 “조화와 조문은 정중히 사양하오니 양해해주시기 바란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계 인사는 물론이고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를 비롯한 정치권 인사들이 직접 조문을 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유족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하지만 조문을 하는 인사들은 인식이 다르다. ‘가족장’이라는 공식적 장례절차를 유족 측의 ‘겸양지덕(謙讓之德)’으로 이해하고 조문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유족 측은 고인의 뜻을 따른 것이지만 그렇다고 조문을 시도하지 않는 것은 ‘결례’이기 때문이다. 설령 장례식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는 한이 있더라도 직접 조문을 시도하는 것이 한국인의 정서에 부합한다.
25일 오후 7시 25분께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호승 청와대 경제수석이 장례식장에 도착해 문재인 대통령의 위로 메시지를 유족들에게 전했다.
이인용 삼성전자 사장이 노 실장과 이 수석을 맞이하고 배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26일 오전 10시55분쯤 빈소를 찾아 약 15분 간 조문하며 유가족을 위로했다. 이 대표를 맞이 한 것도 이인용 사장이다.
이 대표는 조문 후 취재진과 만나 “고인께서는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탁월한 혁신의 리더십으로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키웠다”며 “국가 위상과 국민의 자존심·자신감까지 높여주신 데 대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개인적으로 이 회장을 가까운 거리에서 뵌 적은 없다”면서 “이제까지 고인께서 해오신 것처럼 삼성이 한국 경제를 더 높게 고양하고 발전시키면서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기업으로 더욱 도약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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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실장 아닌 비서실장 보낸 문 대통령, 최대한 예우했지만 '대기업과 거리두기' 메시지
문재인 대통령이 노영민 실장을 통해 조화와 함께 애도 메시지를 보낸 것은 이례적인 태도이다. 문 대통령이 경제인 장례식에 비서실장을 보내 조문한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그동안 거물급 재계 인사 별세 때마다 정책실장을 대신 보내 조문했다.
2018년 5월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별세했을 때는 당시 장하성 정책실장이 조문을 했다. 2019년 12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빈소였던 경기도 수원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는 김상조 정책실장을 보내 조문했다. 지난 1월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별세 때도 김 정책실장이 조문했다.
정책실장은 청와대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자리이다. 이에 비해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업무를 총괄적으로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문 대통령이 노영민 실장을 보낸 것은 이건희 회장에 대해서는 기존보다 한 단계 격상된 조문 방식을 택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문 대통령은 애도 메시지를 통해 ”한국 재계의 상징이신 고(故) 이건희 회장의 별세를 깊이 애도하며 유가족분들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며 ”이건희 회장은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리더십으로 반도체 산업을 한국의 대표 산업으로 성장시켰으며, 세계 스마트폰 시장을 석권하는 등 삼성을 세계기업으로 키워냈고, 한국의 대표기업으로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깊은 추모의 마음을 전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이 직접 조문을 하지 않음으로써 ‘대기업과의 거리두기’라는 기존 방침을 유지했다는 해석도 만만치 않다. 기업의 국가적 역할에 대한 긍정적 평가보다는 기업에 대한 부정적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는 평가이다.
시장경제국가에서 큰 업적을 남긴 기업인에 대한 현직 대통령의 조문이 금기사항처럼 인식되는 것은 글로벌 트랜드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국내의 경우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11년 12월 14일 오후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의 빈소를 방문해 청조 근정훈장을 서훈했다. 직접 조문을 통해 한국의 산업화를 주도한 기업인으로서의 박태준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예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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