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입력 : 2020.10.10 15:40 ㅣ 수정 : 2021.05.28 09:46
김종오 장군, 죽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은 ‘사전불퇴(死戰不退)’ 정신으로 백마고지 사수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백마고지는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 보급로로 요충지였다. 그 특유한 위치적인 특징 때문에 아군이 백마고지를 점령하더라도 북쪽에서는 백마고지를 굽어보는 더 높은 고지들이 많아 전술상 크게 유리한 면이 없지만, 만약 적군이 백마고지를 차지한다면 철원평야 일대의 전선을 모두 적에게 내주고 아군은 15km를 후퇴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김종오 장군은 배수진을 치고 죽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은 ‘사전불퇴(死戰不退)’의 정신으로 9사단 장병들과 함께 중공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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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2개 사단의 축차 공격을 막아낸 백마부대 9사단
10월8일 새벽 고지 일대에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자 적은 제5차 공세를 재개하였다. 전날까지의 공격이 여의치 못하자 중공군은 최초 투입된 38군 114사단에 이어 예비인 112사단 334연대를 추가로 투입하였다.
국군 28연대 장병들은 사력을 다하여 이에 맞섰으나 짙은 안개로 포병 및 항공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 가운데 08:10 주봉을 적에게 피탈당하고 말았다.
사단은 17:00시 28연대 3대대를 투입 또다시 반격을 개시하였다. 대대는 적의 거센 저항에 부딪쳐 장장 8시간여의 격전을 거듭한 끝에 23:05 마침내 주봉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5차에 걸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에서 28, 30 양연대는 거의 재편성이 불가피할 정도로 많은 병력 손실을 보았다. 사단은 적포로의 진술을 기초로 적의 공격이 당분간 계속되리라 판단하고, 동측 평야지대를 방어하던 29연대를 백마고지에 운용할 복안으로 사단 예비로 전환했다.
9일밤 자정이 지나면서 중공군은 또다시 집요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근 3시간에 걸친 파상 공격으로 밀어닥친 적은 새벽 03:00 고지 주봉과 그 우측 능선의 일부를 다시 수중에 넣는데 성공하였다.
날이 밝자 사단은 적이 점령한 고지 정상에 17,700발의 포탄과 항공기에 의한 화력을 집중 투하했고, 이 날밤 29연대로 하여금 역습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연대는 적의 완강한 저항을 물리치고 자정 무렵 고지 주봉을 점령하고 적을 격퇴하였다.
중공군도 결코 이 고지만을 양보할 수 없다는 기세였다. 10일 새벽 적은 정상을 향하여 개미떼처럼 기어오르고 있었으며 04:00 무렵부터 피아간에는 수류탄 투척전과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처절한 전투가 전개되었으나 국군 29연대 1대대가 주봉에서 9부 능선으로 철수한 후 2대대의 증원을 받은 후 역습을 감행, 이날 06:30 다시 정상을 탈환하였다. 그러나…
■ 29연대 1대대 박격포 소대장 최현호 중위가 목격한 처절하고 참혹한 전장
최초 29연대는 사단 동쪽 연대로서 철원 평야의 동측방을 담당하고 있었고, 최현호 중위가 소속된 1대대는 연대 예비였다. 전방에서는 중공군 114사단이 공격을 개시한지 3시간만에 백마고지의 일부 방어선이 돌파되었고 사단 예비인 28연대 1대대가 역습에 투입되어 일시 주저항선을 회복하였으나 10월 7일 23:00 적의 계속적인 압력으로 395고지 정상이 최초로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10월 8일 00:40 사단 예비인 28연대 2대대가 역습 개시 2시간만인 02:40에 395고지와 주저항선 탈환했으나, 추가 투입된 중공군 112사단에 의해 다시 08:10에 395고지를 피탈 당했고 28연대 3대대가 23:05에 탈환했으나 또 10월 9일 03:30에 395고지 및 주저항선을 피탈 당하는 등 고지 쟁탈전이 반복되었다..
이같이 전황이 급박해지자 사단은 10월 9일 07:00시 예비로 전환된 29연대에 역습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연대는 사단 동측 방어임무를 사단에 배속되어 있던 신편 51연대에 인계하고 14:05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공격개시선을 통과하였다.
역습 목표는 물론 395(백마)고지이며 대형은 1대대가 서, 3대대가 동, 2대대가 예비가 되고 전방 각 대대는 395 고지의 좌우 양 능선을 따라 진출하게 되었다.
당시 1대대 중화기중대장 김인창 대위는 중기관총은 전방 소총중대로 배속시키고 81mm 박격포소대만 395고지 동남쪽 하단부에 진지를 점령하여 대대 일반 지원으로 운용하였다. 주사격목표는 395고지 정상과 그 정상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적의 주접근로인 능선이었다.
그러나 역습이 개시된지 3시간 이상이 경과하였으나 전방 공격부대는 적의 완강한 저항에 진출이 지연되어 사상자는 점차 증가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16:00 경 395고지 중턱의 대대OP(관측소)에서 역습부대를 지휘하던 대대장으로부터 81mm 박격포 진지에 있던 중화기중대장에게 무전으로 "중화기중대장은 즉시 대대 OP 부근으로 추진하여 적을 직접 관측하면서 적 증원부대를 화력으로 차단함과 동시에 우리 역습부대의 전진을 엄호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1대대장은 일본 군대를 거친 함경도 출신의 강한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육사 8기 특별반 출신의 이대철 소령이었다. 그는 싸움에는 제일인자로 불려졌고 급하면 공격부대의 최선두에 서서 나를 따르라는 식이었다. 그러니 그의 가슴은 많은 훈장으로 덮여져 있었고 무인으로서 그의 위용은 당당하였다.
종합학교 2기생 출신인 중화기중대장 김인창대위는 가늘고 큰 키에 뛰어난 두뇌를 가진 합리적 성품으로 부하들의 신망이 두터웠고 보병학교 초등군사반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중대장으로 부임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기철 1대대장으로부터 대대 OP로 올라오라는 지시를 받은 김인창 중대장의 얼굴은 갑자기 굳어지면서 약간 당황하고 공포감이 감도는 인상을 지었다.
허겁지겁 지도판, 쌍안경, 나침반, 후래쉬 등을 챙겨 연락병과 함께 관측소에 도착한 중대장은 무전으로 81mm 박격포 진지에 있던 소대장 최현호 중위와 교신하며 사격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좌로 00미리, 우로 00미리 효력사! 명중! 명중! 계속 발사!"하며 신나게 지휘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김 중대장은 떼를 지어 몰려오는 적을 무수하게 날려 버리는데 정신을 빼았겨 모든 것을 잊은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바로 이 순간 무전기에서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무전이 두절되었다. 계속 호출해도 응답은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중대장 전사! 즉시 시신을 후송해 가고 최중위가 중대장 대리 근무를 하라. 내일 일찍 관측소로 올라와 사격임무를 중단 없이 수행하라"는 이대철 대대장의 지시가 무전으로 왔다.
중화기중대장 대리명령을 받은 최현호 중위는 충격과 당황으로 잠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얼마 후 중대원이 중대장의 시신을 운구해 왔다.
최 중위는 이미 어둠이 깔린지라 후래쉬를 비쳐 중대장의 전신을 훑어 보았다. 중대장의 머리 부분은 없어지고 온 몸은 피투성이었다. 조금전 무전으로 서로 통하던 중대장이 이렇게 처참하게 전사한 모습을 확인한 최 중위는 순간적인 강한 충격과 공포로 아연실색하고 온 몸에 경련을 느꼈다.
그는 잠시 후 정신을 차려 그 처절한 사유를 확인했더니 중대장이 유개 관측호에서 쌍안경으로 몰려오는 적에게 명중탄을 퍼붓는 순간 구경 미상의 적 직사포탄이 날아들어 김인창 중대장의 머리 부분을 때려 즉사케 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이윽고 밤은 깊어만 갔다. 적의 증원부대는 야음을 이용하여 계속 투입되었고 저항은 완강하였으나 1대대는 최후 일각까지 돌격과 백병전을 되풀이 한 결과 10월10일 06:30 드디어 21시간 30분의 교전 끝에 395고지를 또 탈환하며 역습에 성공하였다. (하편 계속)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