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 서울 탈환작전의 영웅들(하) 중앙청에 태극기 게양한 영웅 박정모 해병소위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서울 서측방에서 미 5해병연대가 고전하자 뒤늦게 합류한 미 7해병연대를 미 5해병연대 좌측방에 배치하였다. 25일에는 미 7사단 32연대와 국군 17연대를 서빙고 쪽으로 도하시켜 서울 북서쪽과 남동쪽에서 포위하는 형태를 갖추고 일거에 서울 시내 돌입작전을 전개했다.
서울 탈환작전은 주공인 미 5해병연대와 국군 1해병대대는 중앙에서 치열한 전투로 연희 고지와 와우산을 점령했고 일부부대는 서울시내로 진입한 상태였다. 북쪽은 미 7해병연대와 국군 5해병대대가, 남쪽은 미1해병연대와 국군 2해병대대가 배치된 반원 모양의 궁형(弓形)태세를 형성하였다.
■ 북한군 점령 89일 만에 다시 중앙청에 태극기가 새벽의 포연 속에서 휘날리다
9월25일 밤, 서빙고 쪽으로 도하했던 미 7사단 32연대와 국군 17연대가 남산을 점령하였을 때 서울 탈환의 막바지 전투가 개시됐다. 주요 공격목표는 중앙청과 서울시청을 연결하는 선이었다.
중앙에 위치한 주공 미 5해병연대와 국군 1해병대대는 며칠동안 서울 연희 고지 전투 등 격렬한 전투로 병력 손실도 많고, 인원도 부족해서 서대문 방면과 마포 일대에서 공세를 취했으나 북한군의 최후 발악적인 저항으로 이를 격파하는 동안 전진이 불가해 26일 새벽까지 고착되었다.
다만 서울 남쪽을 담당한 국군 2해병대대가 국부적인 적의 저항을 물리치고 원효로와 삼각지 일대를 확보했을 뿐이었다.
26일 서울 진입 전투는 철수를 위해 시간을 얻기 위한 북한군의 지연 전술을 분쇄하는 것으로 ‘바리게이트 전투’로도 불린다.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 직후부터 서울 시민을 동원해 주요 도로 요충지에 200~300m 간격으로 전진을 방해하는 바리게이트 장애물을 설치했고 북한군 병사들은 빌딩의 지붕이나 창문마다 득실거렸다. 그들은 전진하는 유엔군 부대원들을 저격하거나 휘발유로 만든 사제 폭탄을 던졌다.
바리게이트 장애물 극복은 매우 느리고 위험했지만 보병들이 바리게이트 주변의 저격수나 기관총수들을 사살하거나 패주시키면, 공병들이 뛰어들어 지뢰를 제거하고, 그후에 전차가 바리게이트를 깔아 뭉개면서 진격로를 열었다. 바리게이트 한 개를 돌파하는데 약 1시간 정도 걸려 속도가 매우 느렸다.
다음날 조선호텔까지 진출해 대대본부를 배치시킨 미 1해병연대에 소속된 국군 2해병대대장 김종기 소령은 중소대장들에게 작전계획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박성환 종군 기자가 “중앙청은 미 5해병연대의 목표이나, 우리 동포의 손으로 태극기를 올려야한다고 이승만대통령께서 말씀하셨고, 상금 3000만원이 걸려있다”는 것을 귀띔해줬다.
이 말을 들은 6중대 1소대장 박정모 소위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상금이 아니라, 태극기를 꽂을 사람은 결국 나 밖에 없다는 집념이었다.”
박소위는 곧바로 대대장에게 자기의 뜻을 전하고 중앙청 돌진 허가를 상신했다. 허락을 받은 박소위는 9월 27일 새벽 3시경 대형 태극기를 몸에 감고 소대를 진두지휘하며 중앙청 장소로 접근했다.
세종로 일대에서 북한군이 구축한 마대 진지로부터 간헐적으로 총탄이 날아왔다. 그는 수류탄 공격으로 수개의 진지를 격파하고 2시간 만에 연기가 자욱한 중앙청에 도착했다.
우선 청내의 잔적을 제압한 후에, 2개 분대를 중앙동 입구에 배치하고 1개 분대로 근접에서 방호하도록 운용하며 2미터 길이의 깃봉을 든 최국방 견습수병과 양병수 이등병을 대동하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철제 사다리는 폭격고로 절단되었고 끊어진 와이어 로프 일부를 사용해 꼭대기로 기어오르다 떨어져 부상을 당할 뻔 했다. 천신만고 끝에 동창문까지 접근한 다음 태극기를 봉에 달아 창밖으로 비스듬히 내걸고 고정시켰다.
이때가 1950년 9월 27일 새벽 6시 10분,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한지 꼭 89일 만에 다시 중앙청에 태극기가 새벽의 포연 속에서 휘날리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유엔군의 서울 공격이 시작되자 북한군은 9사단과 18사단 등 2만여명 병력을 추가 동원해 서울을 끝까지 방어하려 했다.
그들은 서울 시가지 교차로 마다 장애물을 설치해 시가지 전투를 전개할 준비를 갖추면서 연희 고지와 안산을 고수해 아군의 서울 진입을 저지하려 했으나, 용감한 한미 해병대에 의해 무산됐고, 이어서 9월28일 유엔군들은 북한군을 서울 시내에서 쓸어내 듯 소탕하며 의정부 방면으로 공격을 계속했고 서울은 완전히 수복됐다.
3개월 동안 적의 치하에서 신음하던 서울 시민들이 다시 찾은 자유는 더욱 가치 있는 것이었다. 아울러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번 기회에 분단된 조국이 통일된 정부를 수립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기에 충분했다.
■ 안중근 장군의 말을 실천한 6·25남침전쟁 당시 전쟁영웅들
한편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한 시점에서 퇴로를 차단당한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은 산악지대의 소로를 통해 북쪽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그때 패잔병이 되어 38선을 넘어간 북한군 병력은 10여만명 중 2~3만명으로 추정됐다. 국군과 UN군은 이들을 추격하며 다음 단계인 반격작전으로 전환했다.
훗날 박정모 소위는 금곡전투, 원산상륙작전, 화천댐 탈환작전 등에서 큰 공을 세워 을지무공훈장 등을 수여 받았고 해병 대령으로 전역한 뒤 2010년 숙환으로 별세했으며, 양병수 이등병도 미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
2014년 ‘9월의 현충인물’에 6·25남침전쟁간 서울 탈환작전시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영웅 박정모 대령이 선정되어 그 소중한 정신과 실천을 가슴 깊이 기리고 있다.
최근 박성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위국헌신 군인본분, 爲國獻身 軍人本分)이라는 안중근 장군의 말을 몸소 실천한 것이 무릎수술에도 불구하고 군생활을 한 추장관의 아들 서일병이다”라는 구두 논평을 냈다가 논란이 커지자 유감을 표명했다.
대다수 국민들은 박 의원 주장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며, 안중근 장군의 말을 제대로 실천한 진짜 군인은 추장관의 아들 서일병이 아니라 6·25남침전쟁시 태극기를 게양한 박정모 해병소위, 연희고지 전투의 고길훈 해병소령, 영등포 전투의 탱크킬러 모네건 일병, 백선엽 장군 등과 같은 전쟁영웅들임을 명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