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전쟁사(56)]70년 전 서울 탈환작전의 영웅들(상)미 5해병연대와 모네건 일병

김희철 칼럼니스트 입력 : 2020.09.16 14:16 ㅣ 수정 : 2020.09.16 14:42

김포공항을 우선 탈환한 미 5해병연대와 영등포 진격전의 영웅 모네건 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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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70년 전인 1950년 9월15일,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이라 칭한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 그리고 육군 17연대는 서울로 진격했다. 

부천과 영등포 등에서 전차를 동원한 북한군의 저항은 있었지만, 연합군은 모두 격파하고 행주나루, 마포나루, 동작나루 등 3개소에서 한강 도하를 시작했고 상륙한지 9일째인 9월 24일 마포나루로 도강한 해병1연대를 마지막으로 UN군은 서울 탈환 작전에 돌입했다.

 
▲ 서울 탈환작전 상황도 [사진자료=육사 한국전쟁사 부도]
 

신속히 진격한 미 5해병연대의  김포공항 탈환으로 공중보급로 확보

 

9월15일 미 해병상륙단이 인천 동쪽 외곽에 설정된 교두보로 진격하는 동안 한국 해병대는 인천시내의 잔적 섬멸작전을 담당했다. 교두보를 확보한 상륙군은 곧이어 미 1해병연대가 경인가도의 우측지역을, 5해병연대는 좌측지역을 담당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이어 16일 정오즈음 미1해병사단은 인천항 남동쪽에 지휘부를 설치했는데, 일본 코베에서 정비를 마친 미 7해병연대가 21일에는 인천에 도착한다는 희소식을 전달받았다. 

그 사이 공병대는 인천역에 있던 기차를 수리하여 부평까지 병력과 물자 수송에 투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기차가 지나갈 부평과 부천을 확보하고 영등포로 진격할 미1해병연대는 경인가도의 좌측지역을 담당한 미5해병연대보다는 휠씬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했다.

한편 미5해병연대는 진격로상에 있는 100m 남짓 되는 고지들을 연이어 장악하면서 김포공항을 향한 공격을 계속했다. 드디어 17일 오전 7시, 김포공항에 도달해서는 전차를 앞장세우면서 곧장 비행장 내부로 진입을 시작했다. 

그 중 전차 한 대는 격납고 문을 밀고 들어가 멀쩡한 야크 전투기 한 대를 노획하기도 했다. 급조된 북한군 1항공사단은 나름대로 방어에 최선을 다하며 18일 새벽 3시에는 야습까지 시도했지만 화력 부족과 미해병대의 분전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활주로 사이의 무성한 수풀 속에 숨어 저항하던 적들도 거의 사살되었다. 처절하게 대항했던 북한군 1항공사단의 지휘관 왕연(40세) 준장은 중국에서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탈환전에서 이름이 알려진 몇 안 되는 북한군 고위 간부였다.

결국 18일 오전 10시, 김포공항은 미 해병대는 김포공항을 완전히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해병대의 사상자는 얼마 되지 않았고 북한군은 100명 이상의 전사자와 10명의 포로를 남기고 퇴각했다. 

탈환 당일인 18일에는 주활주로를 쓸 수 없었지만, 14시 45분 첫 번째 C-54수송기가 지상요원들을 태우고 비행장에 내렸고 오후에만 무려 36대의 수송기가 착륙해 차량과 물자를 쏟아 내었다. 

오후 4시부터는 해병 항공기들이 착륙하기 시작했고, 다음 날, 미10군단이 김포공항에 전술항공사령부를 설치하면서, 코르세어기를 주력으로 하는 3개 항공대대가 일본에서 이곳으로 이동해 작전할 수 있게 되었다. 

지상부대들이 내륙 깊숙히 진격하면 원거리로 바다에 떠있는 해군 함포의 지원을 받을 수 없으므로 포병과 항모 항공대에게만 의지할 수밖에 없기에 3개의 활주로를 갖춘 김포공항의 가치는 매우 컸다. 

이로써 공중 보급이 아주 유리해졌다. 다음 날에는 주활주로도 복구되었다. 이어 김포공항 확보에 성공한 미 5해병연대는 바로 한강 도하 준비에 착수하면서 1해병연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 유엔군의 항공 폭격과 시가전을 치루는 모습 [사진자료=전쟁기념관]
 

미 1해병연대의 영등포 진격시 영웅 모네건(Monegan)은 탱크 킬러

17일 오전, 경인가도의 우측지역을 담당하여 서울로 진격하던 미 1해병연대의 선봉 M26전차대는 지금의 송내 일대에서 민가를 은폐물로 삼아 포탑만 내놓고 있는 T-34 전차 한 대를 격파하면서 다음 목표인 영등포를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중간에 있는 부천 소사에서 낮은 언덕에 매복한 북한군 18사단 22연대가 공격을 시작하면서 격전이 벌어졌다. 이때 미 1해병연대 2대대의 월터 모네건(Walter Monegan, 19세)일병의 바추카포팀이 맹활약 하면서 전차대와 함께 T-34/85 전차 4대를 격파하여 진격로를 열었다.

하지만 대가는 치러야 했다. 아군 M26전차 2대가 대전차 지뢰를 밟아 파괴되었고, 공병대가 지뢰를 제거해야 했기에 진격은 지체되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19일에 연대는 영등포 입구인 안양천 부근까지 진입했다. 당시 영등포는 한강 남쪽에서는 서울의 유일한 구로서 당당한 서울의 일부였기에 많은 북한군이 결의를 가지고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다.

20일 새벽 4시 30분, T-34/85 전차 5대를 앞장세운 대대병력의 북한군이 자살폭탄 트럭까지 준비하여 미 해병대의 진지를 기습했다. 트럭이 폭발하면서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때 모네건 일병은 포복으로 굉음을 내며 달려드는 적 전차에 접근하여 물탱크 뒤에서 정확한 바추카포 사격으로 2대를 격파하고 3번째 전차를 조준하다가 다른 전차에서 쏜 기관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에게는 명예훈장이 추서되었고, 그의 이야기는 60년대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미 해병들은 치열한 백병전을 치르면서 북한군을 격퇴시켰다. 모네건 일병이 소속된 미 1해병연대의 선봉 M26전차대는 4대의 전차를 격파하고, 1대를 노획했으며, 300여 명을 사살했다. 치열한 전투로 시신과 파괴된 전차의 잔해가 도로를 메웠기에 이를 치운 다음 다시 공격을 시작하기도 했다.

미 1해병연대는 그 날 오전 알몬드 10군단장으로부터 영등포 시가지를 폭격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포병 사격과 항공 폭격을 시가에 퍼부었다. 21일 아침 영등포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80고지와 85고지를 격전 끝에 장악하고 눈앞에 한강과 서울 시내를 바라 볼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22일, 미 1해병연대는 영등포를 점령했고 끊어져 있는 한강 인도교까지 수색정찰대를 내보냈다. 포로 신문 결과 영등포를 치열하게 방어하던 북한군은 9사단 87연대로 김천에서 16일 기차로 출발하여 낮에는 터널 속에 숨고 밤에만 움직여 20일 영등포에 도착했는데 이 전투에서 80%의 전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 포병 사격과 항공 폭격으로 불타는 영등포 시가지와 끊어진 한강 인도교를 관찰하는 유엔군 모습 [사진자료=전쟁기념관]
 

미 7사단 추가 투입으로 북한군 차단 및 낙동강에서의 북진부대와 연결 시도 

인천항의 지형적 특성 때문에 뒤늦은 18일과 19일 상륙한 미 7사단도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들의 주 임무는 수원 쪽으로 남하하여 미 1해병사단의 남쪽 측면을 보호함과 동시에 서울로 후퇴할 북한군을 차단하고 낙동강에서 북진하는 미 8군 및 한국군과 연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 7사단의 32연대는 별도로 서울 탈환 작전에 참가했는데 이것은 해병대 뿐만 아니라 미 육군과 한국 육군(17연대)도 서울 탈환 작전에 참가시키려는 ‘정치적 배려’ 때문이었다.

한편, 낙동강 전선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김일성 역시 사태가 심각해지자 서울 방어를 위해 병력을 끌어모아 전환 배치시키기 시작했다. 철원지역에서 편성 중이던 북한군 25여단 70, 78연대와 9사단 87연대 등 2만 여명을 투입했는데, 상당수는 정예 부대였다.

 

이렇게 된 이상, 최초 5일 이내의 서울 탈환 계획은 물 건너 간 일이 되었지만, 맥아더 사령관과 알몬드 미 10군단장은 9월 25일 즉 전쟁 발발 3개월을 맞춘 서울 탈환을 ‘목표’로 언론 플레이와 군사작전을 병행하고 있었기에 미 1해병사단 등 작전부대들은 작전기간 단축을 위해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중편 계속)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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