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전쟁사(52)] 손자병법이 말한 정보의 중요성을 입증한 949 고지 전투

김희철 칼럼니스트 입력 : 2020.08.27 15:14 ㅣ 수정 : 2020.08.27 15:14

중동부 전선 주 저항선의 돌출부 문제 해결하고 전선의 균형 유지 위한 북한강 도하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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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손자병법 모공(謀攻)편의 ‘지피지기자, 백전불태(知彼知己者, 百戰不殆)’는 적군을 알고 아군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의미이다.

또한 ‘부지피이지기, 일승일부(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는 적군을 알지 못하고 아군을 알면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진다는 뜻이고, ‘부지피부지기, 매전필태(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는 적군도 아군도 알지 못하면 싸울 때마다 위태롭다며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국군 6사단이 공격한 949고지를 포함한 Gary선 진격 상황도 [자료출처=육군종합행정학교]
 

 ■ 정보 중요성이 강조된 ‘지피지기자, 백전불태(知彼知己者, 百戰不殆)’를 실천한 수색정찰

1951년 8월18일부터 최종 10월28일까지 국군 7사단과 8사단은 피의 능선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와 연계해 강원도 양구군 백석산에서 치열한 고지 쟁탈전으로 북한군 32사단, 12사단을 격퇴시켰다. ([김희철의 전쟁사(39)] ‘70주년 맞은 6.25 최후의 승부 백석산 전투서 휴전선 결정’ 참조) 

그러나 서측의 미 9군단에 배속된 미 24사단 및 국군 6사단이 이미 더 앞선 금성 부근으로 진출한 반면, 그 동측의 미 10군단은 백석산까지 점령하여 서측에 비해 진출이 지연됨으로써 미9, 10군단 사이에 돌출부가 형성되었다.

또한 10월 25일부터 재개된 휴전회담에서 현재의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자는 논의가 진행되면서 유엔군은 전선의 취약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중동부 전선에 집중하게 되었다.

미 8군은 이와 같은 돌출부를 제거하고 전선을 완만한 곡선으로 조정하기 위하여 미 9군단의 전투지경선을 동으로 확대했다. 국군 6사단으로 하여금 동측 인접에서 백석산 전투에 참가했던 국군 8사단 21연대를 배속받아 Gary선(1220고지-석화동-903고지-949고지-용호리-교암산을 연하는 선)을 공격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1951년10월, 6사단의 북한강 동안쪽으로 북상이 불가피해졌는데 이때 목표가 북한강 건너쪽의 임남면 지역에 위치한 949 고지였다. 그곳은 북한강과 금성천이 만나는 부근이라 도하 작전을 감행해야 한다는 위험 부담을 안고 있었다.

한편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적군의 정보였다. 적군의 진지 상태와 지형을 알게 되면 전투에서 유리할 수 밖에 없었는데, 6.25남침전쟁 당시에도 이를 정찰하기 위한 수색조들의 활약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공격 하루 전인 11월 16일 밤,  949 고지 확보를 위한 적의 정보를 수집하려고 6사단장은 자원한 도대철(1928년 2월 대구 출생, 1951년 9월1일 임관, 6사단 7연대 소대장 보직)중위와 수색조 5~6명에게 수색정찰 임무를 부여했다. 

수색조가 중부 전선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 정찰한 결과, 적의 진지는 강둑을 따라 치밀하게 편성되어 있었고, 자동화기 진지만도 4~5개나 되어 이러한 정보없이 도하작전을 감행했다가는 아군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수색조장 도대철 중위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정찰하는 도중 2차례에 걸쳐 그때까지 파악한 정보를 대원에게 전달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그는 더욱 더 자세한 정보를 위해 대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홀로 적진 깊숙이 침투했으나 약 30분 뒤, 강둑 너머 적진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고 끝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도대철 중위가 목숨을 걸고 이미 2차례에 걸쳐 보내진 정찰 보고서는 아군에게 도착해 있었다.

 

▲ 치열했던 949고지 전투의 자료가 전시 되어있는 양구 전쟁기념관 [사진자료=양구문화관광]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승리를 쟁취한 949 고지 전투 

수색조장 도대철 중위의 희생으로 적정을 파악한 국군 6사단장(준장 장도영)은 동남으로부터 국군 8사단 21연대, 사단예하 19연대, 7연대 및 2연대 등 4개 연대 병진으로 11월17일 새벽 5시에 도하작전을 개시했다.

6사단은 지대 내의 적(중공군 202사단 605연대, 204사단 612연대, 35사단 104연대)을 격파하고 공격 2일째인 11월18일 예하 전 연대가 목표인 949고지와 Gary선을 모두 장악하여 전투를 승리로 매듭지었다. 

이 전투에서 중앙의 19연대 1중대 소대장으로 참전했던 임병황 소위(종합 제17기, 예비역 소령)는 당시의 상황을 “우리 중대는 11월17일 이른 새벽에 구대 동쪽에서 공격단정으로 기습 도하하여 교두보 확보작전을 마친 다음, 이날 오후에 949 고지를 공격하였다. 그런데 이 고지는 횡격실을 이룬 난공지대로서 산이 너무 험했고 지도상으로도 각 능선들이 비슷하여 한참 전진하다 보니, 바로 적진 앞에 다가서게 되었다”라며 설명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어 불과 50미터의 거리를 두고 공방전이 벌어졌는데, 아무리 포로 때려도 적진은 끄떡하지 않지만, 57밀리 무반동총의 위력은 대단하였다. 57밀리 무반동총은 표적이 되기 쉬운 취약성은 있으나 공격선 직후방에서 자리를 옮겨가면서 직사포로 때리면 적진은 박살이 되고 이어서 기관총과 수류탄을 집중하면서 돌파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적의 저항도 집요하여 그 자리에서 날이 저물어 야간공격으로 전환되자 피아의 포격이 집중하고 지세가 험하여 고전을 치루었다.

임 소위는 “여기서 우리 소대도 2분의 1 정도의 병력 손실을 보았으나 결국 그날 밤에는 적진을 돌파하지 못하고, 그 다음날 BMNT를 기하여 공격한 끝에 중앙의 우리 대대가 949 고지의 주봉을 탈취하였다. 정상에 올라가 보니 전방의 산세가 한눈에 바라보이고 주요 도로를 감제할 수 있어 초급장교인 내가 판단하기에도 과연 요지인 것 같았다. 그 뒤로 큰 전투가 없는 소강상태로 방어하다가 다음해 1월에 소양강 부근으로 이동하여 부대교육에 들어갔다"고 증언했다.

 
▲ 국군 6사단이 도하공격한 북한강 남쪽에 건설된 평화의 댐 [사진자료=양구군청]
 

또한 강원도 화천 3사단 헌병대에 배속되어 23연대장 호위병으로 권총을 차고 동행했던 김방환씨는 “전장을 누비는 연대장을 따라다니며 전투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는데 가는 곳 마다 병사들이 삽과 괭이 만으로 힘들게 호를 구축하고 있었다. 또  박격포탄이 떨어져 교량에 거꾸로 박힌 사람 등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간도 어려운 시체들을 수없이 목격했다. 특히 강원도 김화군 임남면에 있는 949 고지는 6사단이 이틀 동안 전투하여 미9군단과 10군단의 균형을 유지시킨 전투였다”고 증언했다.

이틀간의 치열한 전투에서 적 사살 884명, 포로 124명 생포의 전과를 올렸으나 아군은 102명이 전사했다. 목숨을 걸고 949 고지 확보에 결정적 정보를 수집하여 제공한 고(故) 도대철 중위에게는 을지무공훈장이 추서됐다.

이로써 중공군은 어은산 북쪽으로 완전히 물러나게 됐으며, 지난 6월 중순 이래의 숙제였던 중동부 전선에서의 미 10군단 및 미 9군단 간의 돌출부 문제를 해결하고 주 저항선을 조정해 전선의 균형을 유지하게 됐으며 이는 현재의 휴전선이 되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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