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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50)

대한민국을 구한 ‘대한해협해전’과 전초전인 ‘옥계해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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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입력 : 2020.08.16 11:18 ㅣ 수정 : 2021.01.08 10:09

대한해협 해전의 영웅,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한민국…”라면서 숨을 거뒀다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승리했다는 느낌도 잠시, 침몰하던 적함에서도 포탄을 쏴댔다. 김창학과 전병익이 파편을 맞은 것이 이때였다.

 

백두산함 조타실에서 키를 잡았던 김창학 삼등병조(현재의 하사)는 복부에 파편을 맞았고, 주포 갑판에 있던 전병익 삼등병조는 가슴에 파편을 맞았다. 1950년 6월 26일 이른 새벽. 6·25남침전쟁은 막 시작됐지만 그들의 전쟁은 그때 끝났다.

 

▲ 국가보훈처가 대한해협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2019년 12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한 백두산함 포 장전수 전병익 해군중사와 우측, 2016년 6월 부산 중앙공원에 만들어진 백두산함 최용남 함장 흉상 제막식에 참석한 이기식(오른쪽) 해군작전사령관과 오른쪽에서 세번째 대한해협 전투참전용사인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현 최재형 감사원장의 부친) 및 유족들 모습 [사진자료=국방부]
 

대한해협 해전의 영웅 고( 故) 김창학 하사와 전병익 중사

 

적함과의 교전 막바지에 중상을 입은 김창학과 전병익은 응급수술을 받기 위해 사병식당으로 옮겨졌다.

 

먼저 김창학의 윗옷을 벗기니 복부 여러 곳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업혀 들어온 전병익은 왼쪽 가슴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회백색 폐부가 보일 정도로 부상이 심했다. 피를 많이 흘린 이들은 연신 물을 찾았다. 주계장 조경규가 물컵을 입에 가져다줬으나 힘이 없어 마시지 못했다. 솜에 물을 적셔 입에 떨어뜨렸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두 사람은 숨을 헐떡이면서 “적함은 요…?”라고 물었다. 항해사 최영섭 소위는 “격침했다. 살아야 해. 정신 차려”라고 외쳤다. 이 말에 이들의 눈빛이 환해졌다. 두 사람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한민국…”이라고 하면서 숨을 거뒀다. 지켜보던 대원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강원 평강 출신으로 스무 살이 되던 1947년 가족들과 함께 월남해 해군 장교(해사 3기)가 된 갑판사관 겸 항해사 최영섭 소위(예비역 해군 대령, 현 최재형 감사원장의 부친) 는 평소 병사들에게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죽자”고 말해 왔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 그 모습을 본 순간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고 회고록 ‘6·25 바다의 전우들’을 통해 증언했다.

 

이렇게 국민의 힘으로 탄생시킨  백두산함은 안타까운 희생도 있었지만 큰일을 해냈다. 백두산함이 수평선 끝에 걸쳐 있던 ‘검은 연기’를 확인하지 않고 동해로 갔다면 부산은 위태로웠을지 모른다. 당시 부산에는 우리 군부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600여 명이 기습 침투상륙하면 그대로 점령됐을 수도 있었다. 

 

▲ 6·25남침전쟁 발발후 우리군 최초의 승리인 ‘대한해협해전’을 기록한 해군본부의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과 부산 국립해양박물관에 전시된 450톤급 ‘백두산함’ 모형 [사진자료=해군본부/국립해양박물관]

 

6·25남침전쟁의 분수령이 된 백두산함의 ‘대한해협해전’ 평가

 

백두산함은 3일정도 훈련을 한 뒤인 6월26일, ‘옥계해전’ 전개에 따라 동해안 작전지원을 위해 이동하던 중, 우리 군의 헛점을 찔러 부산 앞바다로 우회하여 기습 침투하려는 북한 함정을 발견하여 대한해협에서 격침시킴으로써 6.25남침전쟁의 첫 승전보를 알렸다.

 

해군본부에서 발행한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에 의하면 ‘대한해협해전’은 6·25남침전쟁 발발후 우리군 최초의 승리였으며, 이로써 부산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북한은 ‘대한해협해전’에서의 패전 이후 해상작전을 바꿔야 했다. 따라서 “북한군은 지상군 작전과 연계해 무장 게릴라 병력을 해안에 상륙시킨다는 작전을 철회하고 서해안 도서지역 침투로 선회했다”고 분석했다.

 

미국 군사연구자들도 대한해협해전을 높이 평가했다. 6·25남침전쟁 때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첩보 임무를 수행했던 노만 존슨 박사는 1991년 출간한 책 ‘한국전쟁’에서 “북한군 특수요원 600~700명이 해로를 통해 부산을 점령하려고 투입됐다. 다행히 부산 인근 해상에서 이 위장선이 한국 해군에 의해 격침됐다. 이 사건이 6·25전쟁의 분수령이 됐다”고 적었다.

 

2007년 미 해군연구소가 발간한 ‘한국전쟁과 미 해군’에는 “600여 명의 북한군이 탑승한 무장 수송선이 거의 무방비 생태였던 부산항을 향하고 있었다. 백두산함이 적 위장함을 침몰시킨 이후 부산은 한반도에서 연합군의 최후 보루가 됐고, 증원 병력과 물자의 주요 도입항이 됐다. 백두산함의 승리는 그만큼 중요했다.’”라고 기록되어 대한해협해전 승전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담아 놓았다.

 

또한 이 책은 “백두산함의 적함 격침은 중요한 항구를 한순간에 잃어버리는 아찔한 국가적 위기를 막았고,  이후 모든 지원이 가능해져  유엔군이 한국에서 생존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우리 국민의 성금을 모아 무기를 장착한 눈물어린 애국의 결정판이자 해군의 최초 전투함인 백두산함이 6·25남침전쟁 초기에 큰 위기에 빠질 뻔했던 대한민국을 구한 것이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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