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희의 심호흡
최태원 회장이 SK CEO들에게 내린 명령, 'GAFA 뛰어넘기'
[뉴스투데이=이태희 편집인]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에게 딥체인지(근본적 변화)를 실천하기 위한 화두로 ‘스토리텔링’을 제시하고 CEO들이 주체가 되라고 주문했다. ‘GAFA 뛰어넘기’를 명령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들의 성공비결은 신기술과 매혹적인 스토리의 결합에 있기 때문이다. GAFA는 미국의 공룡 IT기업인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애플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단어이다.
최 회장은 지난 23일 열린 '2020 SK 확대경영회의'에서 “기업의 토털 밸류(총체적 가치)를 높이려면 CEO가 자신만의 스토리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새로운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을 접목시켜 성공한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들을 사례로 들기도 했다.
최 회장은 지난 2015년부터 매년 인문사회과학적 성찰을 담아낸 경영 화두를 제안해왔다. 이윤 극대화라는 시장경제 논리를 뛰어넘는 딥체인지, 사회적 가치, 행복경영 등이 그것이다. 이번에 나온 스토리텔링은 가장 최 회장다운 명제로 느껴진다. 시장과 인간의 변화에 대한 깊은 통찰의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스토리가 4차산업혁명 시대에 글로벌 기업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은 ‘가정법’이 아니라 냉엄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재무적 성과의 훌륭함만이 승부처가 아니다. 매혹적인 스토리가 있는 기업이 소비자의 ‘팬덤’을 형성하고 투자자들의 ‘믿음’을 얻어내고 있다.
스콧 갤러웨이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 교수의 저서 ‘플랫폼 제국의 미래’에 따르면 GAFA는 21세기 글로벌 시장을 지배하는 4개의 거인기업이다. 투자자와 소비자를 끌어들이는 이들 기업의 차별적 매력은 날카로운 기술력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시장의 니즈를 창조해내는 상상력과 그 상상력을 융화시킨 ‘스토리텔링’에 있다는 게 갤러웨이의 분석이다.
예를 들면,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초창기 제품을 만들어낸 천재가 아니다. 애플1의 창조자는 공동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이었다. 오히려 잡스는 뛰어난 이야기꾼에 가깝다. 그의 천재성은 판매방식에 있었다.
동종업계 CEO들은 전자상거래 시대에 오프라인 매장은 용도 폐기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잡스는 화려한 조명 아래 애플 제품을 전시하는 유리벽 매장을 마련함으로써 사치품에 대한 인간의 본원적 욕망을 겨냥했다. 검은색 티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운동화 차림으로 애플의 신제품에 담긴 철학을 포장해내는 잡스의 ‘원맨쇼’가 애플의 가치를 규정했다.
애플 제품을 사용하는 소비자는 ‘문화적 취향’을 가진 인텔리로 등극하게 된다. 아이팟 열풍이 불었던 21세기 초반에 미국의 명문 대학생들은 “I POD, THEREFORE I AM(나는 아이팟을 듣는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할 정도로 빠져 들었다. 아이팟이나 아이폰은 지식과 경제적 여유를 가진 계층의 사치품으로 각인됐다.
하지만 애플의 생산단가는 낮다. 그 결과 애플은 도요타를 대량생산해서 명품 페라리로 팔아먹는 회사가 됐다. 사실은 도요타인데 소비자들은 페라리로 인정했다. 이는 스토리텔링이 만들어낸 위대한 사기극이다.
애플은 IT기기로 ‘팬덤’을 구축한 유일한 공룡기업이다. 애플이 살인범의 아이폰 비밀번호를 풀어달라는 미 연방법원의 요구를 거부해도, 아이폰 매니아들은 애플을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생활보호’라는 애플의 철학에 동조한다. 이 때 애플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기업이 아니라 자유주의 철학자다.
제프 베조스는 잡스보다 더 위대한 스토리텔러이다. 갤러웨이 교수에 따르면, 1990년대에 벤처캐피탈의 지원으로 성공한 기술기업들은 최소한 5000만 달러를 투자받은 시점에 투자자에게 수익금을 돌려주기 시작했다. 이에 비교하면, 아마존은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21억달러를 투자받은 다음에야 가까스로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냉철한 투자자들이 아마존에 대해서 유독 관대하고 끈기를 보였던 것은 베조스의 거대한 이야기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투자금이 10억달러를 넘겼을 때 투자자들이 발을 뺐다고 가정해보자. 오늘날의 아마존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투자자들을 무장해제 시킨 베조스의 스토리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매장’이었다. 타깃, 시어스, 베스트바이 등 오프라인 유통강자들이 미국 전역에 대형 매장을 두고 있었지만, 아마존에 피하면 새발의 피라는 것이다. 베조스는 원대하지만 약간은 미친듯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풀어내면서 투자자들을 매혹시키고 사업을 확장했다.
세상은 ‘뻥쟁이’ 베조스의 주장대로 흘러갔다. 오프라인 강자들은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아마존은 웃는 얼굴을 한 ‘최상위 포식자’로 등극했다.
■ 탈법 논란에 휩쓸린 GAFA 뛰어넘는 법
최 회장의 속마음은 알 수 없지만, SK계열사 CEO들이 스토리텔링에 성공한다면 GAFA를 뛰어넘게 된다. GAFA는 그 거대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역외탈세, 반독점 등의 부정적 이슈에 휩쓸려들어가고 있다.
다음 달로 예정된 미 하원의 반(反)독점 청문회에는 구글의 순다르 피차이, 페이스 북의 마크 저커버그, 아마존의 베조스 CEO등이 출석할 예정이다. 팀 쿡 애플 CEO는 아직 출석 여부를 밝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애플 앱스토어의 '30% 수수료'는 청문회에서 타깃이 될 수밖에 없다. 30% 수수료는 애플이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호사를 누리고, 다른 기업과 소비자를 착취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GAFA를 정조준해 디지털세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이들 4대 공룡기업들이 막대한 이윤을 즐기면서 아일랜드 등에 법인을 두는 방식으로 ‘역외탈세’ 행각을 그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GAFA가 화려한 성공 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토해내는 것과 달리, SK계열사들은 탈세나 독점문제로부터 자유롭다.세금은 꼬박꼬박내고 있고, 독점적 지위를 무기로 삼아 소비자들을 착취하지도 않는다. GAFA처럼 매력적인 스토리를 신기술에 접목하는 데 성공한다면, ‘GAFA보다 훌륭한 기업’이 될 수 있다.
■ 패러다임 전환중인 SK계열사들, 스토리텔링은 절박한 과제
더욱이 최 회장이 제시한 스토리텔링의 5가지 아이템은 도덕적이다. 그는 23일 회의에서 “SK가 키워가야 할 기업가치는 단순히 재무성과·배당정책 등에 그치는 게 아니라 지속가능성·ESG(환경, 사회, 지배구조)·고객 신뢰, 나아가 지적재산권·일하는 문화 등 유·무형자산까지 모두 포괄하는 토털밸류이다”고 정의했다. 5가지 아이템 중 어느 것을 선택해서 스토리텔링을 한다해도 GAFA류의 탈법논란에 휩쓸릴 가능성은 희박하다. 문제는 실천이다.
SK 계열사들은 새 먹거리를 개발하거나 이를 토대로 사명변경을 준비하고 있다. 새 먹거리가 당장에 수익을 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망해먹기 십상이다. 아마존도 투자금 21억달러를 탕진한 다음에야 사지에서 벗어났다. 매혹적인 스토리텔링으로 투자자와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최 회장의 주문은 패러다임 전환을 앞두고 있는 SK계열사 CEO들에겐 절박한 과제이다.
© 뉴스투데이 & m.news2day.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