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전쟁사
(36) 한국전쟁 영웅 ‘백선엽’과 유격전 귀신 ‘이현상’의 진검승부(하)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손자병법에 수록된 ‘피실격허(避實擊虛)'와 '공기무비 출기불의(攻其無備 出其不意)’는 "강한 곳은 피하고 약한 곳은 공격하며, 상대가 준비하지 않으면 공격하고 상대가 예상치 못한 곳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유격전의 귀신인 이현상의 남부군이 즐겨 활용한 병법이었다. 준비가 미흡했던 후방지역에서 유엔군을 타격하고 지역 사회의 치안을 위협했던 남부군은 준비가 잘되고 강한 백야전 전투사령부의 주력을 회피하여 교묘히 포위망을 벗어나 상대가 예상치 못한 지리산 외곽의 회문산, 덕유산, 운장산 등으로 회피하여 잠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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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전 전투사령부의 제 2~4기 작전(1951.12.19~’52.3.14)으로 잔당 소탕/승기잡은 국군에 주민들 적극 협조
12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남부군이 주축이었던 공비들은 대부분 병력을 상실한 데다가 근거지 마저 잃게 되자 교묘히 포위망을 벗어나 지리산 외곽의 회문산, 장군봉, 백아산, 덕유산, 운장산, 삼도봉 등으로 숨어들었다.
백야전 전투사령부는 분산되어 달아나는 공비들을 근거지별로 각개격파하기로 결정하고 제2기 작전(1951.12.19~’52.1.4)을 시행하였다. 공비들의 은거 거점을 포위 공격하는 전반기작전(12.19~28)과 공비 잔당을 수색 섬멸하는 후반기 작전(51.12.30~’52.1.5)으로 구분하여 수도 및 8사단과 서남지구 전투사령부가 지역별로 독자적인 작전을 전개하였다.
2기 작전기간 중에 백야전 전투사령부는 전단 살포 570만매, 연 49시간의 선무방송을 실시한 결과 공비 370명이 귀순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이와 같은 백야전 전투사령부의 대대적인 소탕작전으로 이현상을 정점으로 한 공비 집단의 지휘체제가 와해되고 대부분의 근거지가 파괴되자 공비 잔당들은 유격활동에 유리한 지리산 지구로 재집결을 기도하였다. 따라서 백야전 전투사령부는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에 전투부대를 동시에 투입하여 공비 잔당들을 격멸하는 제 3기 작전(’52.1.4~1.31)을 수행하였다.
수도사단을 주축으로 지리산을 재차 포위공격하는 작전이 시작됐으나 오랜 토벌작전으로 아군은 심신이 몹시 지쳐있었다. 그러나 송요찬 사단장의 엄격한 지휘통제하에 추격과 매복 작전을 통해 잔존 공비들을 소탕하여 전과는 나날이 더해갔다.
이렇게 성과가 나타나자 주민들의 태도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백야전 전투사령부는 공비 토벌작전이 민심을 얻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작전부대는 절대로 침식 등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하였으며 험한 세파를 겪은 주민들의 생존 지혜는 강한 자의 편에 서는 것이므로 국군을 도와주어도 공비에게 보복당할 위험이 사라짐으로써 주민들의 협력에 비례해 전과도 늘어갔다.
그리하여 소부대로 분산된 공비들은 주민들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지리산을 버리고 김제, 양산, 청도 등지로 다시 숨어들었다.
백야전 전투사령관 백선엽 중장(’52.1.12부로 진급)은 'Rat Killer'라는 별칭이 붙은 제 4기 작전(’52.2.4~3.14)을 개시했으나 2월6일 지휘권을 수도사단장에게 인계하고 전선으로 복귀했고 이어 7월23일부로 7대 육군참모총장으로 취임했다. 수도사단은 남원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백아산, 모후산, 조계산에서, 서남지구 전투사령부는 운장산, 고산에서, 태백산지구 경찰 전투사령부는 덕유산, 장안산, 천황산에서 공비 잔당 섬멸작전을 계속하였다.
4기 작전이 종료되자 수도사단도 지휘권을 서남지구 전투사령부에 인계한 후 전선으로 복귀하였다. 백야전 전투사령부의 공비 토벌작전을 통해 공비가 완전히 근절된 것은 아니지만 정부의 행정력이 전혀 미치지 못할 정도로 위세를 떨치던 지리산 남부군을 비롯한 공비의 주력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위축일로를 치닫게 되었다.
3개월 반에 걸친 호남지역 공비 토벌작전으로 사살 5009명, 생포3968명, 귀순 370명, 화기노획 682정/문, 아지트 파괴 341개소의 전과를 올렸으며 아군은 105명의 전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토벌작전을 통해 군경이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해주겠다는 의지와 능력을 실제로 입증하여 작전지역 주민들이 정부를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드는 성과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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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에게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한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의 비참한 최후
이후 1사단이 경기도 전곡에서 전북 남원으로 이동하여 ‘52년 7월부터 지리산에서 준동하는 잔존 공비들을 소탕했고, ‘53년 휴전 이후에도 양민을 학살하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공비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해 서남지구 전투사령부에 5사단을 투입하였다.
5사단장 박병권 장군의 성을 붙인 ‘박전투사령부’는 ‘54년 5월까지 공비 소탕임무를 수행하였으며, ‘54년 10월 창설된 2군사령부 예하의 ‘남부지구 경비사령부’에 의해 ‘56년 말까지 잔당 소탕작전을 지속했다.
한편 6,25남침전쟁의 원흉인 김일성이 정적인 남로당 숙청을 시작함에 따라 ‘53년 8월6일자로 북한에서 남로당 최고 간부 12명을 일제히 숙청하고 그 중 이승엽 등 10명은 사형에 처했다.
이에 5지구당 위원장으로 남로당 고위간부이자 산하에 남부군, 전북도당, 전남도당, 경남도당을 두고 이끌던 이현상 역시, ‘53년 9월 6일자로 김일성 절대지지파인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 등에 의해 모든 직위를 박탈 당하고 평당원으로 강등 되었으며, 무장 해제당하고 반감금 되었다.
같은 날에 이현상의 개인 경호원 7명 중에서 2명인 김은석과 김진영이 체포됐다. 그 둘은 5지구당에서 이현상을 숙청한 것에 큰 불만을 갖고 있는 상태라 모든 상황 정보를 제공했다. 즉 제 5지구당은 해체되었고 이현상은 개인 경호대 역시 해체된 상태로, 홀로 감금되어 경남도당으로 이송 대기중이라는 초특급 정보였다.
이 둘은 경찰 2연대 수색대(사찰유격대)로 편입되었다. 수색대는 대장인 김용식 경사 등 31명 중 한 사람을 빼고는 전원이 빨치산 출신이었다. 김용식은 유일한 정식 경찰이었는데, 조선대학 출신으로 덕유산지구 적상산에서 부하 15명을 이끌고 귀순하였다. 이현상의 호위병이 제공한 귀중한 정보를 바탕으로 ‘53년 9월 13일자로 ‘작전명령 9호’ 즉 이현상 체포작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현상에 대한 정보를 숨기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군부대가 지리산 빗점골에서 철수하는 ‘53년 9월 17일까지 작전을 연기하였다. 그리고 군부대가 철수하는 17일부터 체포작전을 개시하였다. 이현상 호위병까지 포함하여 33명이 된 경찰 2연대 수색대는 당일 23시부터 매복을 시작했는데, 다음날 18일 매복조 중 하나가 산에서 내려오는 빨치산 3명을 포착하여 그중 1명을 사살하였다. 나머지 2명은 도주하였는데, 사살한 1명이 바로 이현상이었다.
수색대장인 김용식경사는 증언을 통해 18일 새벽 매복중 공비 3명과 교전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도주하였고 날이 밝으면서 늙은 공비의 시신을 찾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정확히 등뒤에서 가슴을 관통한 총상 한발만 있었을 뿐이었고, 확인 사격을 몇 발 가했다. 그때가 11시경이였다. 이후 이현상의 개인 경호원이었던 김은석 등이 이현상의 시체임을 확인하고 '선생님'하고 흐느끼며 거수경례를 했다고 한다.
이로서 당시 이승만 대통령 조차 "이현상의 토벌 없이 지리산의 안정 없고 지리산의 안정 없이 대한민국의 안정 없다"라고 말했던 이현상과 남부군은 비참한 최후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졌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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