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전쟁사](28) 현리전투 패배 씻어낸 밴 플리트 포격과 백선엽의 결단
‘전승불복 응형무궁(戰勝不復 應形無窮)과 줄탁동시(?啄同時)’는 전쟁승리의 지름길
유엔군은 중공군의 제 3차공세 이후 킬러, 리퍼, 러지드작전 등으로 캔사스(Kansas)선까지 반격하여 북진했고 이어진 제 4차공세까지 효과적으로 저지했다. 그러나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이 중공군의 제 5차 춘계공세가 서울을 향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오히려 중공군은 손자병법 허실편처럼 유엔군의 허를 찔러 국군이 배치된 동부전선을 공격했다.
워싱턴 정가, 5배 이상 포격 등 단호한 대응 보고 신조어 ‘밴 플리트 포격(Van Fleet Day of Fire)’ 만들어
한편, 중공군 공격이 주춤해졌던 5월19일 아침,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미 10군단 사령부에서 밴 플리트, 알몬드 장군과 함께 차후 작전을 논의했다. 이때 미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밴 플리트 장군에게 미 8군 예비로 있던 187공수연대와 미 3사단의 증원을 요구하였다. 그는 그날 저녁 187공수연대를 바로 증원하기로 하고, 알몬드에게 곧 미 3사단도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밴 플리트 사령관으로부터 경기도 광주에서 홍천 및 하진부리까지 약 200km를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미 3사단은 1만 7000명의 병력과 전차, 야포 및 전투지원 중장비 등을 이끌고 좁고도 험한 길을 따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 반 만에 그 거리를 주파하는 ‘기적의 행군’을 해냈다.
다행히도 미군 부대원 대부분은 운전을 할 수 있어 밤낮없이 교대로 약 1,000대의 트럭을 몰면서 재촉하여 돌파구 첨단이 붕괴되기 전에 도착했다. 그들은 두갈래로 부대를 나누었는 데, 한쪽은 홍천에 도착해 미 2사단을 증원했고 다른 한쪽은 하진부리에 도착해 무너진 3군단의 서부지역을 방어했다.
“육군 소장으로 만족할 겁니까? 아니면 명장으로 이름을 남길 겁니까?”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의 작전지시를 받은 1군단장 백선엽 장군은 대관령을 넘어오는 비행기 속에서 세부적인 작전 구상을 했다. 군단사령부에 도착하자 바로 참모회의를 소집하여 “송요찬 장군의 수도사단 1연대(연대장 한신 대령)를 먼저 대관령에 급파해 길목을 막고, 그 공백을 11사단과 1101공병단에 맡기는 것”으로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1연대가 대관령까지 이동하는 데 약 3시간이 소요되어 오후 3시즈음 확인해보았던 작전참모 공국진 대령이 흥분한 목소리로 “송요찬 장군이 1연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막고 있다”며 군단장에게 보고했다.
송 사단장은 자신의 정면도 인민군들이 압박을 해오는 위험에 처해 있어 1연대를 뺄 수 없다는 이유로 군단장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좁고 험준한 산악지형에서 단독으로만 전투해왔던 경험에 인접부대와 협조된 작전을 고려하는 인식이 부족했고, 또한 수도사단장 송 장군은 군단장 백선엽 장군과 나이도 비슷하며 최근까지 같은 계급이었고, 동부전선에서 전투를 잘하기로 용맹을 날리던 터라 어느 정도 라이벌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 장군은 한국군 내부 구성원끼리 사소한 감정에 휘말려 벌이는 싸움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다리기로 했으나, 작전참모 공대령은 “당장 부대를 보내야 하는 상황인데 이렇게 연약한 지휘 방식을 쓸 수 없다”며 “육군 소장으로 만족할 겁니까? 아니면 명장으로 이름을 남길 겁니까?”라고 극단적 언사로 다그쳤다.
이에 1군단장 백선엽 장군은 허리에 권총을 차고 로저스 1군단 수석 고문관을 대동하여 수도사단 사령부로 갔다. 백 장군은 엄숙한 목소리로 “귀관은 내 명령에 복종할 것이냐 아니면 불복할 것이냐?”고 질책했다. 송요찬 장군은 사태가 심각해진 것을 눈치 채고 벌떡 일어서서 “각하, 죄송합니다. 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라며 바로 전화기를 들어 출동 명령을 내렸다.
마침 한신 대령은 두 사람의 미묘한 갈등 관계를 알고 있으면서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이미 출동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그때 작전참모 공대령이 지휘소를 빠져나와 1연대의 기동을 확인했다. 그때 한신 대령의 연대는 모든 전투태세를 갖추고 이동을 위해 트럭에 올라탈 준비까지 끝낸 상태였다.
그날(5월21일) 오후 9시 즈음에 연대 수색중대가 먼저 대관령에 도착했는데 1시간 뒤부터 중공군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라도 출동이 늦었다면 중공군은 아군이 도착하기 전에 대관령고지를 선점하여 전체 작전에 어려운 상황이 될 뻔한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고, 연대장 한신 대령과 작전참모 공대령의 책임감과 용이주도함이 작전 성공에 기여하였다.
그때부터 1연대와 수도사단은 승리를 거듭했다. 그동안 무리한 공격을 계속해온 중공군은 장거리 이동으로 지쳐 있었고 화력과 보급도 소진한 상태였다. 1연대의 첫 전투에서 아군 12명 피해에 1,180명의 적을 사살했다. 이후 1군단은 계속 진격하여 23일에는 현재의 휴전선 일대까지 도달했다.
이미 중공군은 공격 능력도 의지도 모두 상실한 상태였고, 북진을 계속하던 수도사단은 현리전투에서 전의 상실로 패배해 퇴각했던 3군단 장병들도 대거 거둬들일 수 있었다.
이로서 유재흥 장군이 지휘하던 2군단은 덕천전투에서, 3군단은 현리전투에서 해체됐다. 또한 3군단 예하였던 3사단은 백 장군의 1군단으로 배속되었다. 그럼으로써 그 당시 우리 국군 중에 군단 규모로 남은 것은 오직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제 1군단 뿐이었다.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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