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병력은 111만명, 유엔군의 1.6배
제 1선에서 9개군으로 공격, 제2선에는 동서해안에 분산 배치 후 상륙작전 대비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유엔군의 재반격 작전으로 38도선까지 후퇴한 중공군사령관 펑더하이는 마오쩌둥의 대규모 지원을 받아 전력을 보충한 뒤 제 5차 4월공세(’51.4.22~4.30)를 시작했다.
펑더하이는 우선 중앙의 3병단으로 정면공격을 하고 서측 19병단과 동측 9병단으로 양측 면 우회공격을 하여 방어선 돌파 후 배후 차단으로 섬멸하는 1단계 작전을 세웠다.
또한 2단계 공세로 정면 돌파와 양측면 협공을 하되 3,9병단은 동부전선에서 국군 방어선을 돌파후 서쪽으로 기동하여 미군의 측면과 배후를 노리고 서측의 19병단은 정면으로 임진강을 돌파하는 기도로 공격을 가했다.
이때 펑더하이의 중공군은 인민지원군 약 77만명, 조선인민군 34만명 등 총 111만명으로 유엔군보다 1.6배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공군은 제 1선에서 9개군으로 정면공격을 하고, 제2선에는 동서해안과 양덕, 곡산 등지에 분산 배치 후 휴식과 훈련을 하면서 상륙작전에 대비하도록 했으며 전역 예비대로 동북지구에 2개군을 확보하였다.
이로써 1, 2선 부대를 2~3개월 단위로 교대하여 전투력을 보존했으며 20병단(67, 68군)을 증파하여 동부전선 경계 보강과 병사 보충, 훈련, 방공 및 대탱크 화력도 강화하며 59군 149사단으로 비행장을 보수하는 등 장기화 될 항미원조전쟁을 대비하였다.
“중공군에게 포위되면 끝장이다”라는 강박관념으로 치욕적 철수
미 1, 9군단도 한국군 6사단 장병들을 '겁쟁이 블루스타' 라고 조롱
1951년 4월 국군 6사단은 위의 상황도처럼 중부전선에서 미 9군단의 작전 계획에 따라 우측 화천은 미 1사단과 좌측 포천은 인접 미 1군단 예하의 미 24사단과 함께 사창리 북방의 와이오밍 선으로 병행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저항이 심해지고 대규모의 적이 남하한다는 정보가 전해지자 6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22일 오후 4시경 선두 좌측의 19연대에겐 광덕산, 선두 우측의 2연대는 두류산, 그리고 예비대로 뒤따르던 7연대는 사창리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공세에 위기위식을 느끼지 못했던 간부나 대다수가 신병들이었던 병사들 모두 저마다 꾸물거렸고, 그렇게 해가 지자 중공군 60사단이 공격준비사격 없이 2연대를 휩쓸었고, 뒤이어 미24사단과의 전투지경선 및 하오고개를 이용하여 후방으로 침투 공격한 중공군들에게 19연대도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
이렇게 한시간이 경과되자 양 연대 전체가 방어진지를 포기하고 무질서하게 도주하기 시작했고, 7연대는 2연대가 버리고 달아난 방어진지를 탈환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역시 역습에 실패했다.
‘50년 11월 북한지역 덕천 및 온정리 전투를 경험한 병사들은 “중공군에게 포위되면 끝장이다.”라는 강박관념 때문에 무질서하게 후방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때 사단은 이미 후방으로 진출한 중공군에 의해 퇴로가 차단되었음은 물론 통신마저 두절되어 혼란이 가중되고 부대의 통제도 불가능하였다.
좌측의 제19연대는 적중에 고립되었고 우측의 제2연대와 예비부대인 제7연대는 차량과 장비를 포기하고 일부는 좌우 인접부대로, 일부는 적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분산 철수하였다. 전선을 돌파해 도마치 고개에 도달한 중공군은 제7연대 후방의 포병부대들을 공격하였고, 이들은 유일한 철수로인 사창리∼춘천 도로를 따라 철수하였다.
한편 미군과 뉴질랜드 포대는 한국군 6사단 구역에 관측소를 설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군의 화력지원본부(fire support center)를 통해 목표를 지정받아야 했다. 하지만 한국군의 전방관측요원이나 포병들까지 모두 도주하는 바람에 이렇다 할 포격 지원을 하지 못한 채 이대로 남아 적의 표적이 되든가, 아니면 패주 행렬에 가담해야 할 지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야포와 각종 차량들이 뒤섞인 패주 행렬은 23시 자정 무렵 사창리 계곡에 집중돼 큰 혼란이 야기되었다. 갈팡질팡 하면서 이리저리 깨지고 뜯어져 없어지기도 하는 혼란상황이 바로 지리멸렬(支離滅裂)이었다. 하나 밖에 없는 도로는 곧 철수하는 병력으로 가득 메워졌다. 장비를 지니고 갈 수 없던 포병대대가 일부 장비를 유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생겼다.
또한 철수 중 통신장비를 유기하였기 때문에 중공군의 추격이 중지된 자정 무렵에도 지휘통제가 곤란함은 물론 전방연대의 상황 파악이 불가능하였고, 다음날(23일) 새벽에 겨우 2,500여 명 정도가 이틀 전 공격을 준비하였던 석룡산∼화악산 후방에 집결할 수 있었다.
날이 밝아 중공군의 공격이 둔화되자, 미 9군단장은 한국군 6사단에 신속히 부대를 재편성하여 석용산∼화악산의 캔사스선에서 적을 저지하도록 했다.
6사단은 명령에 따라 부대를 배치하였으나 어둠이 깔리고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한 적이 공격을 재개하자, 방어진지를 고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미 사기가 저하된 사단 장병들이 적의 파상공격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조차도 실패하고 영연방 제27여단의 엄호 하에 24일 아침 가평까지 철수하여 부대를 재편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미 1, 9군단도 후퇴하게 되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던 영국군 27여단이 3일 동안 가평을 고수했고, 이 틈을 타 유엔군이 북한강 남쪽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함으로서 중부전선 붕괴까진 되지 않았다. 또한 무질서하게 패주하는 바람에 포위당해 전멸하는 것보다 사상자가 적었다.
이때까지 6사단은 소총 2,263정, 자동화기 168정, 2.36"로케트포 66문, 대전차포 2문, 박격포 42문, 곡사포 13문, 그리고 차량 87대의 손실을 입었다. 사단을 화력 지원한 미 포병부대도 105밀리 곡사포 15문을 비롯하여, 4.2인치 박격포 13문과 242대의 무전기, 그리고 차량 73대의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다행히 낙오한 병력들이 계속 부대로 복귀하여 4월 25일에는 6,313명이 집결하였다.
한편 영국군 제 29여단은 감악산 설마리 지역에서 4월22~26일간 1,3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도 3일 동안 중공군의 제 5차 공세를 처절한 피로써 지연시켜 중공군의 서울 침공 의도를 저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국군 6사단은 동시간대에 치욕스런 패배를 맛보고 있었다.
6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26일 아침 밴플리트 사령관으로부터 "당신, 싸울 수는 있냐?(Can you fight?)"는 고함을 들었고, 패전의 치욕에 괴로워하던 장 장군도 이에 지지않고 "싸울 수 있다!"고 맞고함을 쳤다고 한다.
또한 미 제9군단장 호그(William Morris Hoge) 소장은 장도영 준장과 직접 대면한 25일 "전부 다 이길 수는 없다(You can't win them all)"고 위로하는 한편 엄중한 질책을 담은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 비보는 워싱턴에도 알려져 마샬 국방장관, 브래들리 합참의장, 콜린스 참모총장은 이구동성으로 "한국군 6사단은 실제로 전혀 싸우지도 않고 30Km 이상 후퇴했으며 그 결과 미군까지 곤경에 빠져들었다"고 맹비난했고, 미군들 역시 한국군 6사단 장병들을 볼 때마다 '겁쟁이 블루스타' 라고 조롱했다고 한다.
6사단의 패배는 4월 24일 이승만 대통령이 미 트루먼 대통령에게 요청한 한국군 10개 사단 증편계획에 먹칠을 하고 말았다. 2연대장 김봉철 대령은 "유엔군의 재반격작전으로 승승장구하며 북상할 때라 적을 너무 과소평가했다."며 패배를 깔끔하게 시인했다.
패주한 6사단은 재편성을 마치고 절치부심(切齒腐心)하여 한 달 뒤, 용문산 전투에서 중공군 3개 사단, 3만명을 막아내며 대승을 거두어 이 치욕을 설욕했다.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