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전쟁사](22) 중공군 입장에서 본 한국전쟁, 제 5차 공세 저지시킨 영국군의 설마리 전투

김희철 칼럼니스트 입력 : 2020.02.03 17:57 ㅣ 수정 : 2020.02.05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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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 제 5차 4월공세(’51.4.22~4.30) 상황도와 4월9일 새벽에 해임된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 [자료제공=육사 ‘한국전쟁사 부도’/생명의 항해]
베이징으로 간 펑더하이, 마오쩌둥과 독대해 대규모 병력 증원 결정

 

해임된 맥아더 장군, 하원 연설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유엔군 사령관에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에 밴 플리트 장군이 취임하자 중공군은 5차 공세 시작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은 전력을 보충한 뒤 제 4차 2월공세(’51.2.11~18)를 시작했으나, 중공군의 약점을 파악한 유엔군은 지평리 전투(“[김희철의 전쟁사](3) 유엔군의 '자유전사' 프랑스 몽클레어 장군과 미국 프리만, 크롬베즈 대령”참조)에서 사주방어 및 기동전 등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성공적으로 저지·격퇴시켰다.

 

그리고 계속 공격하여 3월15일 서울을 재탈환하고 4월 22일 리지웨이 사령관의 재반격작전의 목표를 달성하였다.

 

이때 중공군사령관 펑더화이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그들의 제 4차 2월공세가 끝나자 마자 부리나케 베이징으로 달려갔다. 얼마나 급했는지 평소에 타지않던 비행기를 이용해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펑더하이는 베이징에 도착해서 바로 마오쩌둥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때 밤에 일하고 낮에 자는 야행성인 마오쩌둥은 자고 있었다. 펑더하이는 보초의 제지도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마오쩌둥이 자고 있는 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자다 일어난 마오쩌둥에게 “속결로 승리를 거두기에는 어렵다”며 전선의 상황을 단도직입적으로 보고했다. 이어 “한국전선의 중국인민지원군 병사들은 잠도 식사도 제대로 못 자고 탄약도 없으며 동상자들이 속출하고 있고 채소는 구경도 못해 야간전투가 많은 병사들로서는 야맹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더욱이 조선 청년들은 모두 달아나 동원하기 어렵고 겨울에는 동서의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해풍이 겹쳐 무척이나 춥고 피해가 늘어 인원보충이 즉각 이루어지지 않으면 현상태로는 도저히 싸울 수 없다”며 부대의 어려운 현상황을 솔직히 보고 하였다.

 

사태를 파악한 마오쩌둥은 즉시 대책을 강구했다. 대규모의 중공군을 보충하였고 포병부대와 대공포 부대도 증원하였다. 식량 및 탄약도 부족하지 않도록 지원하는 것도 포함 시켰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주도권 장악은 물론이고 수도 서울을 다시 무력으로 빼앗아 전세를 만회하겠다며 펑더하이와 마오쩌둥은 다짐을 했다. 이것이 중공군의 제 5차 4월공세(’51.4.22~27)였다. 이는 전열을 가다듬은 중공군과 재반격작전으로 상승세를 타고 있는 국군과 유엔군의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였다.

 

한편 유엔군 상황으로 리지웨이가 8군 사령관에 부임한 후부터 맥아더의 입지는 무척 좁아졌고 그는 계속해서 워싱턴과 반대되는 견해를 내놓았으며 트루먼 대통령을 별로 존중하지 않는 듯했다. 결정타는 1951년 4월 5일 공화당 마틴 의원에게 보낸 편지가 하원에서 낭독된 것이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하기로 결심했다.

 

많은 망설임과 혼란 속에서 백악관은 4월 9일 새벽에 맥아더의 해임을 공표했고, 이로 인해 트루먼 행정부는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특히 4월 19일 맥아더가 하원에서 행한 연설은 그를 미국의 영웅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는 이 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당시만 해도 맥아더가 출마를 하면 바로 대통령이라도 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후에 맥아더가 상원 청문회에 나와 전쟁에 대한 증언을 하면서 그의 인기는 급락했다. 아마도 하원에서의 연설이 맥아더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고 한다.

 

맥아더의 후임(유엔군 사령관)으로는 8군 사령관 리지웨이가 임명되었고 리지웨이의 자리는 밴 플리트(Van Fleet) 장군이 맡았다. 밴 플리트가 8군 사령관으로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4월 22일 중공군은 5차 공세(춘계공세)가 시작되었다.

 

▲ 영국군 제29여단 전체에 1,300여 명의 사상자 피해를 입으면서도 중공군 제 5차 4월공세를 저지 및 지연시켜 전체 작전에 기여한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의 설마리 전투 전적비 및 추모공원 [자료제공=경기도]
설마리 전투, 영국 글로스터셔 연대가 중공군 제 5차 공세 저지에 기여

 

영국 찰스 왕세자 부부, 1992년 11월 설마리 전적비에서 글로스터셔 대대 추모

유엔군이 4월에는 기존의 38선 지역까지 진출했었다. 이에 중공군은 서울을 다시 점령하기 위해 7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켰다.

 

중공군은 제19병단으로 국군 제1사단과 영국군 제29여단이 지키는 문산-파주 방면을 공격하고, 제3병단은 미 제3사단과 터키여단이 지키는 연천-동두천 방면을 공격해서 서울을 포위하고 점령한다는 5차 공세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1951년 4월 22일 중공군 제19병단이 문산-파주 지역을 공격함으로서 제 5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당시 영국군 제29여단은 임진강 하류인 파주 적성면 일대의 방어를 맡고 있었는데, 특히 글로스터셔 연대(Gloucestershire Regiment)의 제1대대가 지키는 감악산 북서쪽인 마지리 일대를 집중 공격했다.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는 마지리일대의 235고지에서 이틀 동안 분전을 하며 중공군 제63군의 진격을 저지했으나 결국 감악산 기슭인 설마리 일대의 고지로 물러났다.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가 설마리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자 미 제1군단 사령부는 국군 제1사단과 미 제3사단 등의 병력을 보내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구출하려 했다. 하지만 모든 전선에서 중공군의 파상적인 공세가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구출 작전은 실패했다.

 

4월 25일, 대대가 전멸할 위기에 놓이자 진지를 포기하고 탈출하라는 사령부의 명령을 받은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는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60여 명만이 탈출에 성공하고 500여 명이 전사 또는 포로가 되었다.

 

설마리 전투에서 영국군 제29여단은 1개 대대 병력을 잃는 큰 피해를 입었고, 여단 전체로는 1,3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는 3일 동안 중공군의 진격을 처절한 피로써 지연시켜 중공군의 서울 침공 의도를 저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훗날, 영국군 제29여단 소속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가 중공군과 맞서 싸운 235고지를 '글로스터(Gloster Hill)'고지라고 명명하고 인접 도로가에 추모공원과 전적비를 세워 영혼을 달래고있다.

 

▲ 영국 찰스와 다이애나 왕세자 부부가 1992년 11월 설마리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의 설마리 전투 전적비에서 추모하는 모습 [자료제공=동영상 캡쳐]

또한 1992년 11월에 영국 찰스 왕세자 부부가 노태우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에 설마리 전적비를 찾아 제29여단 소속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의 용맹한 전공과 희생을 추모했다.

 

그리고 실제로 두 사람은 이전부터 부부 간의 사이가 파경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한국 방문을 끝으로 공식적으로 별거에 들어갔다고 한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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