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의 최우선 과제는 장기적 저성장의 늪에서 벗어나 민간, 기업 위주로 경제 활성화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는 정상사이클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세수(稅收)로 경기를 부양하고 공공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지속가능하지 않은 대증(對症)요법, 땜질 처방일 뿐이다. 뉴스투데이 는 2020년 신년기획으로 한국경제의 가장 중요한 주체인 기업의 활력을 되찾기 위한 정책 대전환 과제를 점검해본다. <편집자 주>편집자>
[뉴스투데이=이상호 전문기자 / 오세은 기자] 반도체는 한국경제를 지탱하는 최고의 효자산업이다. 반도체는 1992년 의류제품을 제치고 수출품목 1위로 올라선 뒤 30년 가까이 한국의 수출을 주도하고 있다. 1992년 67억달러였던 반도체 수출은 2018년 1267억 달러로 20배 가까이 증가했다.
한국의 반도체 생산은 1983년 2월 8일, 당시 삼성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 중에서도 첨단 기술인 초고밀도집적회로(VLSI)에 대규모 투자를 한다고 선언한 유명한 ‘도쿄선언’으로 비롯됐다. 현재 세계 1위인 메모리반도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쌍두체제를 이루고 있다.
▶대한민국 먹여 살리는 메모리 반도체, 삼성-SK 양강구도로 기술격차 벌려
1980년대 초 삼성을 비롯한 국내 전자회사는 가전제품용 고밀도집적회로(LSI)도 겨우 만들던 때라 미국 인텔이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비웃었다. 이병철 회장은 나중에 당시를 회고하면서 “잘못하면 삼성그룹 절반 이상이 날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삼성이 아니면 모험을 하기 어렵다고 봤다”고 말했다.
반도체가 ‘산업의 쌀’이라면 우리나라가 집중 생산하는 메모리 반도체, D램은 ‘쌀 중의 쌀’로 비유된다.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고 모든 산업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세계경기 침체로 인한 변동 하에서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다.
D램 시장의 호황은 고스란히 한국 기업의 실적 상승으로 이어졌다. 세계 D램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위상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D램 제조사는 세계적으로 20여개가 넘었다. 하지만 공급과잉으로 인해 시황이 나빠지자 1990년대 말 일본의 히타치, 후지쯔 등이 시장에서 철수했다. 다시 2000년대 중반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독일 키몬다와 일본 엘피다가 사라졌다.
그 결과 D램 시장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의 3강 구도로 정리됐다. 지난해 2분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세계 D램시장 점유율은 각각 45.7%와 28.7%로, 국내 기업이 74.4%를 차지했다. 3분기에는 삼성과 하이닉스가 각각 46.1%와 28.6%로 74.7%였다. 2012년 일본 엘피다 인수로 2위 자리를 넘보던 미국 마이크론의 지난해 2,3분기 점유율은 20.5%와 19.9%로 5년 전에 비해 오히려 5%포인트 가량 줄었다.
▶세계 2위 굳히고 1위 도전하는 최태원 회장과 SK하이닉스의 ‘야망’
세계 1위 삼성에 이어 SK하이닉스가 2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양상은 한국 반도체산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매우 중요한 요소로 평가된다. 삼성과 SK하이닉스의 경쟁적인 투자와 기술개발이 중국과의 격차를 유지할 수 있는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2018년 10월 4일 문재인 대통령은 충북 청주시 테크노폴리스에서 열린 SK하이닉스 M15 낸드플래시 반도체공장 준공식에서 최태원 SK 회장에게 “SK하이닉스는 어려움을 기회로 반전시킨 불굴의 기업이다. M15 공장으로 새로운 역사를 써 달라”고 당부했다. 이에대해 최태원 회장은 “국민과 지역사회의 응원이 없었으면 SK하이닉스의 성공은 불가능한 것이었다”며 20조원에 달하는 M16 공장 투자계획으로 화답했다.
SK하이닉스는 한때 벼랑 끝 기업에서 반도체 기술을 통해 기적적으로 부활했다. 하이닉스는 2001년 워크아웃(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간 뒤 10년간 채권단 체제로 연명하다 2011년 새 주인 SK를 만났다. 2011년 10조원대 매출과 3600억원대 영업이익은 불과 1년 만에 매출 14조원, 영업이익 3조원으로 늘어났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호황이 닥쳤던 2017년 30조원, 2018년에는 매출 40조원을 돌파했다. 하이닉스의 대박으로 SK그룹은 재계 순위 3위로 올라섰고 최태원 회장의 리더십도 각광을 받았다.
최태원 회장이 주도하는 SK하이닉스의 삼성전자 따라잡기는 2018년 6월 4조원을 들여 도시바메모리 지분을 인수한데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SK하이닉스가 D램은 세계시장 점유율 2위지만, 취약한 낸드플래시 분야의 원천기술을 지닌 도시바에 배팅을 한 것이다. 도시바메모리는 메모리반도체인 낸드플래시시장에서 삼성전자에 이어 글로벌 점유율 2위를 차지하고 있다.
도시바의 낸드플래시 기술력은 삼성전자에게만 뒤졌을 뿐이지 2위권 업체 가운데에선 앞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작년 3분기 글로벌 시장점유율(D램익스체인지 기준)에서 도시바(19.8%)가 삼성전자(36.6%) 보다 낮지만 웨스턴디지털(17.1%), SK하이닉스(10.4%), 마이크론테크놀로지(9.8%) 보다 높다.
SK하이닉스는 지난 연말 열린 4분기 컨퍼런스 콜에서도 “총 투자규모 7조원 중 낸드플래시 투자는 점차 늘리고, D램 부문 투자는 줄일 계획”이라고 밝혀 낸드부문에 대한 본격적인 투자를 예고했다.
SK하이닉스는 또 메모리 반도체에 편중된 사업 구조상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시스템 반도체 분야도 적극 공략한다는 전략이다. 시스템 반도체는 중앙처리장치(CPU)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통신, 이미지센서같은 칩, 그리고 이들 반도체를 제조하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전문업체) 산업을 지칭한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세계 시스템 반도체 시장은 2018년 기준으로 3019억달러(약 355조원) 규모다. 시장 점유율은 미국(63%), 유럽(13%), 일본(11%), 중국(4%) 순으로 한국은 3.4%에 그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특히 이미지센서와 파운드리 분야에 공을 들이고 있는데, 올해 1분기 중 중국 우시에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해 현지 시장을 공략한다는 계획이다. SK하이닉스가 공략하는 CMOS(Complementary Metal Oxide Semiconductor) 이미지센서(CMOS Image Sensor)는 일반 반도체 공정을 사용해 가격 경쟁력이 큰 장점이다.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반도체에서 탄탄한 2위 자리를 기반으로 이미지센서와 파운드리 등에 적극 투자해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점유율을 높여 삼성을 따라잡겠다는 전략이다.
시장조사업체 모도인텔리전스에 따르면 2018년 141억달러(약 16조3814억원)였던 이미지센서 시장은 오는 2024년 2523억달러(약 293조 1221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스마트폰에 탑재되는 카메라 수가 늘면서 이미지센서 수요도 증가하기 때문이다.
▶자금력과 정책지원 앞세운 중국의 거센 반도체 추격
중국은 정부가 직접 나서 자금력을 앞세운 ‘반도체 굴기(崛起)’를 도모하고 있다. 한국에 비해 반도체 기술력이 3~5년가량 뒤쳐진 것으로 평가되는 중국은 2025년까지 1조 위안(170조원)을 투입하는 반도체 자급화가 추진 중에 있다.
2만여 명의 반도체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정부와 베이징대 등 주요 대학간 협력도 시작됐다. 현재 중국 전역에서 추진되는 50개 대규모 반도체 사업의 총투자비는 2340억 달러(약 282조원)에 이른다.
여기에 중국 정부는 지난해 10월 289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펀드를 새로 조성해 지원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는 2014년에 이어 두 번째로 조성되는 반도체 펀드로 기술 독립을 이뤄서 세계 반도체 시장의 기술 리더가 되겠다는 포부를 드러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D램 반도체산업의 경쟁력 유지와 시스템반도체 분야 육성을 위해서는 과거 대만 및 현재 중국 정부의 사례를 적극적으로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업계의 지적이다. 삼성전자가 100조원을 투자하는 평택 반도체 생산기지 건설이 고압선 통과와 용수 문제로 차질을 빚는가 하면, SK하이닉스 청주공장 증설도 각종 규제문제로 지자체와 줄다리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는 본사가 있는 경기도 이천시에 2019년 법인지방소득세로 3279억원을 납부했다. 2018년 1903억원에서 두배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이천시 전체 법인지방소득세 3576억원의 91.7%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보다 몇배나 더 많은 임금지출, 자재조달 등으로 지역경제 활성화에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정부나 지자체는 중국과 같은 세금감면에는 인색하기만 하다.
▶일자리의 보고(寶庫) 반도체산업, 못받쳐주는 한국 정부와 지자체
현재 삼성전자의 반도체 부문 고용자 수는 약 5만명, SK하이닉스는 3만명에 달한다. 장비업체 등 관련산업의 직·간접 고용까지 합하면 반도체산업이 만들어 낸 일자리는 최소 2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반도체산업은 한마디로 일자리의 보고(寶庫)다.
특히 SK하이닉스는 최근 몇 년간 임직원 증가폭이 매년 두배 이상 가파르게 늘고 있는데 파운드리를 비롯한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도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어 향후 우수인재 확보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전망이다.
하지만 정부의 노동정책은 세계 1위 반도체산업의 경쟁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과제를 받쳐주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선택근로제와 탄력근로제 같은 유연근무제를 산업현장의 실정에 맞게 보다 신축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행 근로기준법상 선택근로제는 1개월이다. 연구개발, 신제품 개발에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한데 1개월의 선택근로제로 반도체, 메모리 분야의 기술력을 높이기가 쉽지 않은 구조다. 3개월로 규정된 탄력근로제 또한 운영시한을 보다 유연하게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