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희의 뉴스 뒤집기] ⑪부결된 ‘스위스 기본 소득제’는 AI시대의 새 의제
스위스 국민들, 성인에게 월 300만원씩 지급하는 보편적 복지제도 거부
(뉴스투데이=이태희 편집국장)
스위스 국민들이 지난 5일(현지시간)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기본 소득(Basic income)’을 도입하는 헌법 개정안을 부결시켰다. 일자리 유무와 관계없이 성인에게 월 2500스위스 프랑(약 300만원), 18세 이하 미성년자에게 650 스위스 프랑(약 78만원)을 지급하는 것을 골자로 한 ‘보편적 복지제도’였다. 영국 BBC방송 등에 따르면 76.9%가 반대했고 찬성은 23.1%에 그쳤다.
이번 국민투표는 스위스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BIEN)가 2013년 10월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주는 제안을 13만명의 서명을 받아 연방의회에 제출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스위스 헌법상 국민투표를 위한 법적 요건은 10만 명 이상 국민의 서명이다.
다수 스위스 국민들이 이처럼 달콤한 제안을 거부한 이유로는 크게 세 가지가 꼽혔다. 첫째, 근로의욕 박탈이라는 부작용이다. AFP통신은 대다수 사람들의 근로동기를 상실시켜 국가경제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부작용에 주목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둘째, 불법이민자의 양산 가능성이다. 스위스가 기본소득을 지급할 경우 유럽의 난민 뿐만 아니라 인근 국가의 국민들도 스위스행 러시를 선택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셋째, 재정파탄 우려도 부결의 핵심 논리였다. 스위스 정부는 기본소득제가 실시될 경우 연간 2080억 스위스프랑(약 249조원)이 소요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반대했다. 이에 대해 BIEN 등 찬성 측은 기존 복지제도와 중복되는 부분을 제외하면 실제 비용 증가분은 연간 250억 스위스프랑(약 30조원)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다수의 스위스 국민들은 정부 측 설명이 타당하다고 판단한 셈이다.
도덕적 해이나 재정 파탄론은 기본 소득제에 담긴 문제의식과 거리
한국의 보수 언론들도 스위스 국민들의 이번 선택이 ‘공짜 돈을 거부한 것’이라는 식으로 몰고 갔다. 일하지 않는 사람이 근로자나 기업가의 등에 업혀 편하게 살게 만드는 제도라는 시각을 조장하려는 듯한 분위기도 감지된다.
그러나 기본 소득제도를 놀고먹는 사람을 양산하는 도덕적 해이나 재정파탄의 문제로 몰고 가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
스위스에서 기본 소득제 도입을 위한 헌법 개정안을 발의한 BIEN 등과 같은 진보적 시민단체들의 논점은 전혀 다르다. 그 논점은 우리 사회가 앞으로 고민해야 할 과제이다.
기본 소득제 발상은 과거에 유행했던 유토피아적 상상이거나 공산주의적 논리가 아니다. 우리 시대의 격변에 주목한 대책이다. 즉 인공지능(AI)의 급속한 발전에 따른 자동화가 노동의 종말을 초래할 것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AI가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고용의 종말’ 대비책
미국의 문명 비평가 제레미 리프킨은 1994년에 펴낸 저서 ‘노동의 종말’에서 21세기에는 자동화로 인해 현재 직업의 99%가 소멸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당시만해도 리프킨의 전망은 과격해 보였다.
하지만 21세기 초입에 들어선 인류는 리프킨의 관측을 뼈아픈 현실로 받아들이는 중이다.
양극화의 급격한 심화는 기본 소득제를 검토하는 또 다른 맥락이다. 다수의 인간들은 실업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락하는 반면에 극소수의 사람들은 천문학적인 수익을 거둬들이는 추세이다. 미국의 경우만 해도 1970년대 CEO와 직장인간의 연봉 격차는 20~30배에 불과했다. 하지만 21세기에는 그 격차가 200~300배로 폭등했다.
더욱이 기업의 고용능력은 급감 중이다. 국내 대표적 재벌기업의 CEO를 지낸 인사는 “우리 그룹의 매출규모는 1970년대에 비해 100배 이상 성장했다. 하지만 고용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정보화·자동화로 대변되는 제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는 21세기는 불평등을 피할 수 없다. 고수익을 올리는 소수 집단과 만성적 실업 또는 저소득 상태에 시달리는 다수 집단으로 양분되는 게 숙명이다.
이들 집단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실질적 소득’을 보장해주는 제도가 검토돼야 한다는 게 스위스 기본 소득제 논란의 핵심 쟁점이다.
영국, 핀란드, 캐나다 등도 기본소득제 논의 시작
따라서 스위스 국민이 거부했지만 논쟁의 불씨는 커지고 있다. 영국, 핀란드, 네덜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등 서구 선진 국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기본소득 도입방안을 논의 중이다.
영국 시민단체 콤파스(Compass)는 6일(현지시간) 영국 하원에서 ‘보편적 기본소득’(UBI) 정책 시행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단체는 스위스와는 달리 완전한 기본 소득제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절충안을 선택했다. 기존 복지 체계를 보완하면서 일정 금액을 모든 국민에게 지급하는 ‘복합적 기본소득’을 제시했다.
주급으로 연금 생활자에게 51 파운드(약 8만7천원), 25세 이상 성인에게 71 파운드(약 12만원), 25세 미만 성인에게 61파운드(약 10만4천원), 어린이에게 59파운드(약 10만1천원)를 각각 지급하는 방안이다. 이렇게 될 경우 아동 빈곤이 45% 감소하는 등의 소득 불평등 개선 효과가 기대된다는 분석이다.
보고서는 “재원인 80억 파운드(13조 7000억원)를 세금으로 충당하기는 불가능한 정치적 상황”이라면서도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AI같은 기계 중심으로 노동의 본질과 직업 형태가 변화하는 신기술혁명 시대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AI시대의 향방이 기본소득제 도입 여부 좌우
결국 기본 소득제를 둘러싼 도덕적 해이 논쟁은 구태의연한 시각이다. 과연 인류가 AI에 의해 일자리를 빼앗기고 소수의 엘리트만이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시대가 도래 할 것인지에 대한 견해를 정립해야 한다. 그런 시대를 ‘AI가 지배하는 슈퍼양극화시대’라고 규정해보자.
슈퍼양극화시대가 온다면 기본소득제는 도입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런 제도가 도입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일자리가 없거나 먹거리가 끊긴 다수의 대중에 의해 전복될 것이다.
반면에 AI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고 양극화 속도가 조절될 수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기본 소득제 도입은 스위스에서처럼 거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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