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니, '원더풀~ 한국차' 첫 액셀 밟다
[모토그래피 시리즈 1- 자동차의 탄생]
-시발차에서 국산모델 1호 '포니' 거쳐 대형차 '에쿠스'까지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도로 위로 셀 수 없이 많은 자동차들이 위용을 뽐내듯이 달리고 있다.
급속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더이상 선택사항이 아닌 필수사항으로 자리 잡은지 이미 오래된 자동차.
지식경제부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자동차 누적 생산량이 9월 말에 7015만 2984대를 기록했다. 2009년 5월 6000만대를 돌파한 지 2년 4개월 만에 7000만대를 넘어선 것이다. 차종별로 보면 승용차가 84.5%로 가장 많고 트럭과 버스가 각각 9.7%, 5.8%에 달했다. 이를 한 줄로 세울 경우 지구를 8.4바퀴나 돌 수 있는 33만 8123km에 이른다.
지경부 관계자는 "수년 내에 누적 생산 1억대 시대를 맞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재 국내 자동차산업은 지난 56년간 연평균 27.4%의 높은 성장률을 나타내며, 제조업 생산액의 10.1%를 차지하고 있다. 고용과 수출에서도 10.2%의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이렇게 가파른 성장곡선을 그려가는 상황 가운데 대한민국 자동차의 최초 모습과 성장 과정이 궁금해진다.
대한민국 1호차의 탄생
1955년 8월 4기통 엔진에 전진 3단, 후진1단 변속기를 장착한 6인승 지프형 승용차가 수많은 군중의 관심속에 국산 1호의 탄생을 알렸다 .
자동차 정비업을 하던 최무성씨가 처음 선보인 이 승용차는 '첫 출발'을 의미하는 '시발(始發)'로 명명되었다.
엔진과 변속기는 미군이 사용하던 지프형 차량의 부품을 활용하였고, 차체는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드럼통을 망치로 펴서 만들었다. 그 모양이 어쨌든 명실상부한 수제(手製)승용차였다.
주요 부품이 미국 차량에서 가져온 부분이 많아 사람들로 하여금 국산차의 원조라는 부분에 대한 비평을 낳기도 하였으나 실린더 헤드 및 엔진 부품을 한국 기술자가 공작기계로 깎아 만들었기 때문에 최초라는 수식어를 사용하여도 전혀 무방하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당시 시발 자동차의 엔진이 군용 지프에 사용되었던 고-데빌(GO-Devil)엔진을 복제하는 것으로 국산화를 시작하였기 때문에 미군 지프의 엔진을 재생해 사용했다는 논란도 있었다.
이에 창업주인 최무성과 당시 공장장이었던 오원철은 1992년 월간지 '자동차생활'과 인터뷰에서 크게 카뷰레터(carburetor), 미션기어, 차동기어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부품을 점진적으로 국산화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부품 국산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발차는 당시 열악한 제작 환경으로 근원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가령, 당시에 차 유리는 지금의 2중접합유리나 강화유리가 아닌 일반유리를 사용해 비포장 도로를 달릴 때 유리가 깨지는 웃지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
당시 시발 자동차가 과연 최초의 대한민국 자동차인지에 명쾌한 답을 내리기 어렵지만, 수많은 대한민국의 자동차 회사가 다른 나라의 자동차를 비교적 쉽게 조립 생산하여 판매하면서 성장해 온 것과 비교하면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한국인의 손으로 자동차와 엔진을 만들어보겠다는 의지는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1957년에는 9인승 '시발 세단'이 나왔다. 6기통 엔진을 얹은 정원 9인승 차로, 당시 대한뉴스는 "시발 세단이 최고 시속 80마일(약 128km)을 내고 가격은 대당 30만환"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시발은1963년까지 2000여대가 생산된 뒤 단종되면서 차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자동차 인기가 석유 파동을 일으킬 것을 염려한 정부가 1957년부터 자동차 등록 대수를 제한한데다 1962년 닛산과 합작한 새나라 자동차가 닛산의 블루버드 모델의 반(半)제품을 들여와 국내에서 조립, 판매하면서 시발차의 인기가 급격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서울서 밀려난 시발은 일부 지방 택시업체들에 싼값에 '땡처리'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최초 국산 자동차 '시발'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자동차산업의 서막이 올랐고, 그 단초는 이후 숱한 기술 연구개발과 자동차 제조 및 인력의 축적을 거쳐 한국을 자동차 강대국으로 우뚝 자리잡게 한 원동력으로 작용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모델 자동차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모델 자동차는 1975년 12월 생산이 시작된 현대 자동차의 '포니'다.
현대는 1973년 9월 이탈리아의 유명한 차체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와 손잡고 한국형 승용차 포니 개발을 계약하게 된다.
당초 미국 포드사와 합작을 추진했으나 허사로 돌아가자 현대는 주지아로에게 독자모델 디자인을 의뢰했던 것.
이렇게 탄생한 국산모델 승용차 포니는 1974년 10월 이탈리아 제55회 토리노 모터쇼에 성공적으로 데뷔하고, 본격적인 한국형 승용차의 시대를 선포했다.
포니는 한국인의 취향과 체격, 그리고 도로사정에 맞는 경제형 차종인데다가 내구성이 좋아 국민들로부터 인기를 끌었으며, 1970년대 이후 '마이카 시대'를 연 주역이었다.
비록 엔진 등 주요부품은 일본 미쓰비시에서 들여왔지만, 포니의 개발로 한국은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독자적 모델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나라가 됐다.
포니는 판매 시작 첫 해인 1976년 1만726대가 팔렸고, 그 해 7월 에콰도르로 5대가 수출돼 '국산 1호 수출차'라는 명예도 안았다.
"독자모델 개발은 회사를 들어먹는 일"이라는 회사 안팎의 우려와 반대를 이겨내고 포니를 성공시킨 현대차는 이후 기술적 진화를 거쳐 지난해 기준으로 전세계에 310만 6000대를 수출하는 명실상부한 완성차 글로벌 메이커로 회사로 성장했다.
포니의 신화를 이어받은 '포니2', '포니엑셀'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선두주자로 군림한 포니의 신화는 1982년 '포니2'로 이어진다.
1984년부터 캐나다에 수출되어 미국시장 진출의 기반을 닦은 포니2는 1990년 1월까지 35만9000여대를 판매됐다.
또 이러한 포니2의 저력을 포니 엑셀이 물려받았다. 1985년 2월 생산이 시작된 엑셀 시리즈는 국산 승용차 중에서는 최초로 전륜구동방식을 채용해 당시에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포니엑셀은 처음부터 수출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차량인 만큼 '좀더 나아진 포니, 뛰어난 포니'라는 컨셉트로 해외시장에서 기존 포니의 인지도와 명성을 살리면서도 차별화된 이미지로 인식되었다.
1986년 1월 20일 울산항 부두에서 포니엑셀은 한국자동차업계의 오랜 숙원이던 미국시장을 향해 출발했다. 당시 미국 경제지 '포춘'은 "이 차(포니엑셀)가 미국 역사상 가장 빠른 매출 신장률을 기록한 수입품"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포니엑셀은 인기몰이에 성공해 1988년 7월 7일 100만대 생산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최초의 중형모델 '스텔라'
최초의 고유모델 포니가 현대차의 시작을 알렸다면 두 번째 고유모델 스텔라는 현대차의 앞길을 터준 주인공이다.
고유모델이 늘어나고 수출이 시작되면서 적자에 허덕였던 회사도 재정적인 안정을 찾았다. 결국 스텔라의 출시가 이후 연구개발에 나설 수 있는 종자돈을 벌어준 셈이다.
1983년 5월 모습을 드러낸 스텔라는 1978년부터 'Y카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스텔라가 개발되는 5년 동안 총 270억원에 이르는 연구개발 자금이 들어갔다.
석유 파동의 여파를 벗어나고 적자에 허덕였던 당시 상황에서 270억원은 가히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이렇듯 큰 결심으로 중형차 시장에 뛰어든 현대차였지만 개발비용은 최대한 아껴야만 했다. 포니2에 얹었던 1400cc 엔진을 바탕으로 스텔라의 차체를 키우기로 결정했던 것.
엔진 배기량이 포니2와 같아 '힘 부족'이 문제로 대두됐지만, 넉넉한 차체와 저배기량에 따른 낮은 세금은 고객들에게 큰 매력이었다.
동시에 포드와 기술제휴로 생산하던 코티나를 대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형차 개발을 더욱 부추겼다. 스텔라가 나오기 바로 직전, 현대차는 영국 포드의 코티나 시리즈 '마크V'의 조립을 마무리 지었다 .
고유모델 중형차를 본격적으로 생산하면서 이제 더 이상 남의 차를 조립해 생산하는 일은 사라지게 된 셈이다.
그렇게 스텔라는 큰 관심 속에서 출시되며 많은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
미래지향적 스타일을 갖추고 공기역학적 개념을 적용해 출시부터 큰 관심을 모았던 스텔라는 수출형인 CXL과 아펙스 등으로 차종을 다양화했다.
스텔라가 출시됐던 1980년대 국산차는 수출형과 내수형을 달리 만들었다. 당시 현대차는 내수형 포니2와 수출형 포니2 두 가지를 한국시장에 팔았는데 캐나다 수출형 포니2는 저속 충돌 때 앞,뒤 범퍼의 복원력과 충격 흡수력을 강조하며 두툼한 범퍼를 달았다. 이른바 '5마일 범퍼'였다.
시속 5마일(약16km)로 장애물에 충돌했을 때 범퍼가 충격을 흡수하고 승객을 충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성 범퍼였다 .
현대차는 캐나다 수출형을 내수시장에 포니2CX로 판매하며 고급형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현대의 야심작 쏘나타의 등장
1980년대 국내 중형차 시장은 대우 로열 레코드의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현대차도 중형차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로열 레코드의 대항마인 뉴쏘나타를 1988년 6월 1일 내놓았다.
당시 쏘나타는 큰 실내 공간과 조용한 엔진, 부드러운 승차감과 각종 편의장치 등으로 큰 인기를 모았다. 1989년 한 해 동안 국내에서 7만9700대 가량이 팔려 현대차의 중형차 시장점유율을 단숨에 68%로 끌어올렸다.
뉴쏘나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쏘나타는 1993년 쏘나타2, 1996년 쏘나타3, 1998년 3월 EF쏘나타, 2001년 뉴EF쏘나타, 2004년 NF쏘나타로 그 명성을 이어갔다 . 쏘나타 시리즈는 1994년 이래 승용차 부분에서 베스트셀러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대형차량의 선두두자 그랜저
그랜저는 현대가 일본 미쓰비시와 공동개발, 공동생산해 1986년에 등장시킨 '벤츠 스타일'의 대형차이다.
한때 대형 고급차의 대명사로 불렸던 그랜저는 1992년 뉴그랜저와 1999년 그랜저XG로 바통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 그랜저의 선전에 힘입어 1996년에는 또다른 대형차 모델 '다이너스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
출고 당시 예상보다 많은 판매량에 차량 인도가 늦어져 출고 담당자가 회사 안팎에서 걸려오는 출고 독촉 전화를 못이겨 전화기를 내려놓고 지낼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다이너스티의 인기는 1998년 그랜저XG가 등장할 때까지 현대차에 많은 이익을 안겨주었다.
1998년 등장한 그랜저XG는 기존의 그랜저 시리즈와는 달리 일본 미쓰비시의 기술력이 포함되지않은 순수한 자체 기술력만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차량이었다.
현대차는 3년 6개월동안 4600억원이라는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스타일과 성능, 안전, 편의성이 대폭 업그레이드 시킨 오너 중심의 그랜저 XG를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기존 그랜저에 비해 차체 크기는 줄어들었지만 실내공간은 오히려 넓어졌다.
이러한 편의성이 소비자들에게 전달되면서 그랜저XG는 2003년말까지 총 23만9천여 대가 팔리면서 대한민국 대형 승용차 시장을 석권하게 된다.
국산 초대형 차량 '에쿠스'
1999년 4월 수입차 시장의 전면 개방에 대응하기 위해 현대는 프리미엄 야심작 '에쿠스'를 등장시켰다.
일본 미쓰비시사와 함께 개발한 에쿠스는 가장 큰 배기량과 안전성, 각종 편의장치를 자랑하며 그 크기에 걸맞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에쿠스는 기존의 현대차량들과는 그 마케팅 방식부터가 달랐다.
'현대'의 'H'마크를 사용하지 않은 것. 이는 에쿠스를 고급차 이미지로 자리매김하긴 위한 전략이었다.
도요타에서 생산되는 렉서스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 생산은 도요타에서 이뤄지지만 판매될때의 차량 이름은 렉서스를 달게 된다.
이런 식으로 기존의 이미지를 과감히 탈피하고, 신개념의 초대형 세단임을 강조하며 현재 대한민국 및 세계의 수많은 오너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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