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식 자동차 1호 '벤츠'는 세 바퀴였다

안대범 입력 : 2011.11.24 14:44 ㅣ 수정 : 2012.01.04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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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토그래피 시리즈 1 - 자동차의 탄생]

-다빈치 태엽차에서 하이브리드까지 (상)

(뉴스투데이=안대범기자) 오늘날 사람과 물화의 이동 수단 중 근간을 이루는 것은 자동차이다.

단거리든 장거리든 자동차 없는 거리 또는 공간 이동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현대인의 삶을 규정짓고 있다.

자동차라는 동력기계장치는 18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세계최초 증기 자동차 탄생, 19세기 독일에서 가솔린 자동차 출현을 거쳐 240여년 동안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고 산업문명의 급속한 발전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어 왔다.

단순한 이동수단의 가치를 넘어 인간과 문명의 발달과 함께 성장해 온 자동차의 기원과 경과를 살펴보고, 자동차의 미래를 전망해 본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태엽자동차.


천재 과학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만든 태엽자동차

현대인이 자동차라 부르는 이동수단의 최초 모습은 오늘날과 매우 다른 형태로 출발했다.

인간의 힘이 아닌 어떤 기계장치의 물리적 힘에 의존해 스스로 움직이는(자동,自動) 이동수단 형태로 최초의 모습을 드러낸 시기는 14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최고 천재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어느날 벽시계에 태엽을 감아주다가 실수로 태엽을 감는 열쇠가 튕겨져 나오면서 이마를 다쳤다.

충격에 번쩍 영감을 얻은 다빈치는 태엽의 풀어지는 힘을 이용하여 자력으로 달릴 수 있는 인류 최초의 자동차를 탄생시켰다. 이른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태엽자동차.

모형을 보면 마치 어린이 장난감 같지만 역사학자들은 이 차를 오늘날 자동차의 기원이라고 믿고 있다.
 
이어 1600년께 폴란드 수학자 시몬 스테빈이 4개의 나무바퀴를 단 수레에 돛을 단 '돛단차'가 만들어졌고, 1680년쯤에는 과학자 아이작 뉴턴이 증기를 이용해 뒤쪽으로 분출시켜 반동으로 달리는 추력(推力) 자주차를 구상했으나 실물로 제작되지는 않았다.

근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자동차로 부를 수 있는 것은 1769년 벨기에 출신으로 프랑스 군사 기술자였던 니콜라스 죠셉 퀴뇨가 제작한 증기 자동차였다.
 

▲ 니콜라스 죠셉 퀴뇨의 증기 자동차.



앞바퀴 앞에 보일러 설치 증기 자동차

브레이크 없어 자동차 규제 초래3륜차인 퀴뇨의 증기 자동차는 현대적 의미의 자동차 모델과는 많이 달랐다.

앞 바퀴에 무거운 보일러와 2개의 실린더가 얹혀져 엔진 역할을 감당했으며 당시 사람의 운송보다 포차를 견인할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무거운 보일러를 앞바퀴보다 전진배치했기에 무게 배분이 나빠 조향이 힘들었고, 수시로 보일러에 물을 채워야 하는 번거로움까지 감수해야 했다.

그럼에도 마차나 인력에 의존했던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인정받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퀴뇨의 증기 자동차는 제동장치가 따로 없었던 탓에 주행시험 도중 병기창 벽을 들이받는 '인류최초의 교통사고' 불명예 기록을 남겼다.

이 후 1834년 증기 자동차가 전복 사고를 일으켜 보일러식 증기엔진이 폭발해 화부와 승객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자동차 운행을 규제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의 증기 자동차는 부피가 크고 속도가 빨랐으며, 석탄을 연소하는 검은 연기가 시민들의 빨래를 더럽히거나, 무쇠 재질의 바퀴가 도로를 깊이 파헤치면서 주민들의 민원이 제기되었다.

여기에 자동차와 경쟁 관계인 마차, 기차 업자들의 의회 로비가 더해지면서 자동차 규제가 현실화되기에 이른다.

결국 1865년 영국 빅토리아 여왕은 이른바 '붉은 깃발법'(Red Flag Act)이라는 세계 최초의 자동차 규제인 '적기조례'를 제정하고 자동차의 운행을 제한했다.

적기조례는 자동차에는 3명의 운전수를 태우고 이 중 1명이 낮에는 붉은 깃발, 밤에는 붉은 등을 가지고 전방 55m 앞에서 자동차가 오고 있다고 소리치거나 후방 55m에서 자동차가 지나갔다고 붉은 깃발을 흔들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이었다.

속도도 제한해 최고속도는 시속 6.4㎞이하, 특히 시가지에서는 시속 3.2㎞로 제한했다. 적기조례는 1896년까지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자동차산업의 위축을 가져왔다.

▲ 벤츠 페이턴트 모터바겐.


현대적 의미의 최초 자동차 가솔린엔진의 벤츠

이렇듯 궁지에 몰린 자동차에 재기의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카를 프리드리히 벤츠(Karl Friedrich Benz, 1844~1929년)의 가솔린 엔진 자동차의 발명이었다.

훗날 독일 자동차회사 벤츠의 설립자가 된 카를 벤츠는 13세 때 증기 기관차를 처음 보고 난 뒤 자동차에 매료되어 대학교에 입학한 15세부터 '말이 필요 없는 마차'를 꿈꾼다.

기술 전문학교에서 내연기관을 공부한 벤츠는 졸업 뒤 아내 베르타와 함께 연구에 힘쓰면서 1878년 벤츠사를 설립하고 이듬해 가솔린엔진을 발명하는데 성공했다.

벤츠는 1883년 10월 독일 만하임에 세계 최초의 자동차 공장 '벤츠&시에(Benz &Cie)'를 세우고 2년 뒤 1885년 드디어 세계 최초로 가솔린엔진을 장착한 3륜차를 개발했다.

바로 첫 가솔린엔진 3륜차가 현대적 의미의 최초 자동차로 기록된 '벤츠 페이턴트 모터바겐'(Benz Patent Motorwagen)이다.

나름대로 자동차의 골격을 갖춘 벤츠 모터바겐은 배기량 954㏄, 엔진 무게 100㎏ 가량, 차체 중량 250㎏를 구현해 당시로선 획기적인 기술로 평가받았다.

1888년부터 자동차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벤츠&시에는 벤츠 모터바겐을 비롯해 앞바퀴를 여러 각도로 돌릴 수 있는 '빅토리아'까지 생산하며 1900년까지 매년 600대의 자동차를 생산하기에 이른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악화된 경영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벤츠는 독일 기술자 고틀리프 다임러(Gottlieb Daimler)의 다임러사와 1926년 손잡으면서 세계 자동차업계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다임러의 고유 브랜드 메르세데스를 따온 '메르세데스 벤츠'란 이름도 이때에 탄생한 것이다.

▲ 초기의 디젤엔진.

가솔린 엔진보다 배기가스 적고 연비 높은 디젤엔진의 탄생

벤츠 등장 이후에도 자동차의 발전은 브레이크가 없었다.

다름아닌 가솔린 엔진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현재 자동차산업의 양대 산맥을 형성한 디젤엔진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디젤엔진의 발명자 루돌프 디젤(Rudolph Diesel, 1858~1913)은 독일인 양부모의 지원 아래 뮌헨 기술고등학교와 공과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암모니아 냉동기' 발명가인 린데 박사가 세운 프랑스 냉동기 회사의 지사장으로 취업했다.

디젤은 당시 레오나르도 사디 카르노가 발표한 증기엔진에서 증기 대신 암모니아를 가열해 증기를 만들면 증기기관의 열효율이 더 높아진다는 이론을 접하게 되지만 당시엔 이 이론을 뒷받침해 줄 만한 기술력이 없었다.

디젤은 압축 공기에 연료를 뿌리면 자연착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냈지만 이 역시 기술적 문제에 부딪혔다.하지만 디젤은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인 연구를 거듭해 '합리적 열기관의 이론과 구조'(1893)라는 책을 발표하며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디젤의 연구성과는 1893년 크루프와 아우크스부르크 기계회사로부터 인정을 받았지만, 실용화에는 거듭 실패했다.

그러다 디젤은 마침내 1894년 2월 등유를 사용해 당시 휘발류를 사용하는 엔진보다 배기가스가 적고 연비가 높은 엔진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그는 아내의 권유에 따라 엔진 이름을 '디젤 엔진(Diesel Engine)'이라 명명했다.

1895년에 자동차에 적용하며 시운전을 성공한데 이어 1897년 25마력의 4행정 단일 수직 실린더 압축기관을 발명함으로써 디젤엔진은 이듬해인 1898년 뮌헨 만국박람회에서 참가해 우수성을 널리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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